시장은 바닥을 모른 채 가라앉고 있었다. 금감원 동료들은 민간기업행을 선택한 그를 걱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금융계의 대선배가 동양고전 한 권을 선물한 것은 이듬해(2009년) 봄이었다.

그가 건넨 책이 바로 《귀곡자》였다. 중국 춘추 전국시대의 대학자 ‘왕후’의 통찰력을 집대성한 처세서이자 전략의 바이블이다. 중국사의 물줄기를 돌린 ‘합종연횡’의 주인공 소진과 장의가 그의 제자들이었다.

장동헌 ‘얼라이언스번스타인(Allian-ceBernstein)자산운용’ 사장은 요즘 이 책을 자주 펼쳐든다. 진퇴 시기를 저울질하는 지혜를 다룬 ‘패합(稗闔)’편이 그 백미이다.

장동헌 사장은 지난 1990년대 말 ‘잘나가는’ 펀드매니저였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과 더불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실명(實名)펀드’ 시대를 개막한 주인공이다. 박현주 펀드가 투자자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자 한국투자신탁은 장동헌 펀드로 맞불을 놓았다.

순풍에 돛을 단 격이었다. 그의 이름을 내건 ‘일반 주식형(골든칩펀드)’은 3000억원(1~6호)어치가 판매됐다. 100억원 규모의 스폿펀드 10여개도 설정됐다. 주식투자 열풍은 실명펀드 전성시대를 불러왔으며, 실명펀드는 다시 주식투자 열기를 지피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그로부터 10여년, 장 사장은 《귀곡자》의 ‘오합’과 ‘췌마’, ‘비겸’, ‘패합’편에서 자산운용시장 판도를 뒤흔들 ‘묘수’찾기에 골몰하고 있다. 장 사장과 지존의 자리를 다투던 ‘박현주(미래에셋 회장)’, ‘장인환(KTB자산운용 사장)’등 ‘맞수’들은 한국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하는 거물로 성장했다.

패합:성패는 끊임없이 교차한다

그가 외도에 나선 것은 지난 2005년 이었다. 금감원에서 ‘주식·채권·외환 시장’을 모니터링하며 교란요인에 선제적으로 대처하는 일이 그의 업무였다. 그리고 지난해 8월 다시 미국계 얼라이언스번스타인자산운용 사장으로 부임하며 시장에 ‘컴백’했다.

“이 회사가 자산규모만 568조원에 달하며, 뉴욕 증시에도 상장된 글로벌 강자라는 점은 인터뷰 무렵까지도 잘 몰랐어요. ‘얼라이언스캐피털’과 ‘샌포드번스타인’이 합병한 회사라는 점도 추후에 알게됐습니다.”

본사에서는 스타 펀드매니저와 금융감독원을 두루 경험한 그의 역량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국계 자산운용사의 대표이사로 인생 3막을 연 장동헌 대표는 요즘 영어 삼매경에 빠져 있다.

종로구 광화문 이 회사 회의실에 설치된 폴리콤사의 화상회의 설비는 그의 고민을 가늠하게 했다. 본사나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지역 자회사들과 콘퍼런스 콜을 해야 하는 일이 부담거리다. ‘MP3플레이어’에 늘 ‘CNN방송’ 파일을 넣고 다니며 늦깎이 공부에 한창이라는 게 장 사장의 ‘하소연’이다.

2분기 미국 경제의 ‘재고 소진(inventory liquidation)’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다. 2분기 미 GDP는 예상보다 소폭 감소하겠지만 3~4분기 미국 경제가 회복할 것이다.

국내 철강·유화·반도체·정보통신 분야는 경기회복 국면의 수혜 종목이 될 가능성이 있다.

췌마:외국계 운용사 ‘노장’에 주목해야

자산운용사의 비교우위는 ‘리서치’다. 국내 업계도 리서치 역량이 일취월장했지만, 글로벌 운용사들에 비해 여전히 한 수 아래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이 회사 애널리스트들의 근속연수는 평균 20~30년.

이 글로벌 자산운용사에서만 평균 15년 이상 근무하며 특정 섹터를 분석해 온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애널리스트들이 경쟁우위의 버팀목이다. 단기성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전문가들을 장기간 육성해 온 특유의 인력양성 시스템이 주효했다.

반면 국내 자산운용사들은 ‘리서치’를 중시하면서도 여전히 단기성과를 앞세우는 경향이 강하다. 리서치 품질이 글로벌 기업들과 격차를 보이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장 사장은 매주 발행하는 주간보고서를 실례로 들었다. 본사가 발행하는 보고서는 세계경제 동향의 풍향계이다.

지난달 26일자 보고서는 2분기 미국 경제의 ‘재고 소진(inventory liquidation)’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다고 진단한 뒤 3~4분기 미국 경제가 회복할 것으로 관측했다. 장 사장이 국내 철강·유화·반도체·정보통신 분야를 이러한 경기회복 국면의 수혜 종목으로 꼽는 배경이기도 하다.

경기회복과 더불어 재고 물량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수급도 균형을 회복하게 되면서 이 분야가 뚜렷한 약진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한국 기업들은 이들 분야에서 최고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경제가 꿈틀거리면서 이 분야의 수급 상황이 점차 빡빡해지고 있어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 거죠.” 그는 지난 4월 우리나라를 방문한 글로벌 성장주팀의 CIO가 제시한 국내 시장 분석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귀곡자》는 일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인으로 ‘췌마’편을 꼽았다. 정보전에서 상대방을 압도하기 위한 방안을 집대성한 대목이다. 장 사장은 자사의 40~50대 애널리스트들이 이러한 ‘췌마’의 달인들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보는 시장상황은 이렇다.
시장에는 봄기운이 무르익고 있지만, 투자자들은 고민도 많다. 주가가 작년 말에 비해 큰 폭으로 오른 점이 부담거리다. 혹시 지금 뛰어들었다가 상투를 잡는 것은 아닌가는 우려 섞인 시선도 고개를 들고 있다.

韓 철강·반도체, 유화섹터 ‘매력적’

장 사장은 이런 투자자들을 상대로 자사의 ‘글로벌 고수익 채권 재간접 펀드’를 추천했다. 300개 글로벌기업들의 우량종목 채권에 투자하는 ‘고수익, 중위험’의 상품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미국 기업의 채권, 그리고 이머징 국가와 기업의 고수익 채권에 주로 투자하는 이 펀드의 자산규모는 6조원이라는 것이 장 사장의 설명이다.

한국 자본시장은 그가 맹활약을 펼치던 지난 1990년대 말에 비해 ‘상전벽해(桑田碧海)’식의 변화를 겪었다.

은행, 증권, 보험사를 구분하던 칸막이가 점차 사라지고 있어 금융사들은 덩지를 불리거나 운용의 효율성을 높이면서 적자생존의 대회전을 준비 중이다.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금융상품 선택의 폭도 매우 넓어졌다. “시장의 가파른 변화에서 성장의 기회를 엿보는 것이 최고경영자의 ‘숙명’입니다. 한국의 퇴직연금시장, 그리고 국민연금·한국투자공사를 비롯한 큰손들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귀곡자는 형세를 살피고 기세를 타는 방법으로 ‘오합’을, 사람을 움직여 일을 성사시키는 방법으로 ‘모’를 꼽았다. 장동헌 얼라이언스번스타인자산운용 사장이 요즘 주목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