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이 위치한 울산 조선소에 가면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유품과 활동사진이 전시돼 있는 ‘아산기념전시실’이 있다. 전시실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진은 영빈관 잔디밭에서 직원들과 함께 둘러앉아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정 명예회장은 스스로를 ‘부유한 노동자’라고 자처하며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기를 즐겼다.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특히 근로자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직원과 씨름·배구 등을 함께 하며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신입사원 수련회에도 빠진 적이 없었다.

우리나라 산업 중흥기를 이끈 선대 기업가들은 하나같이 근로자들과 어울리며 고충을 이해하고자 했다. 창업 이후 적지 않은 위기를 겪으면서도 대량 감원에 나서기보다는 고용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비용 절감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는 노사 화합의 전통을 만들어왔다. 노사가 공동운명체라는 상생의 노사관계를 통해 기업을 성장시키는 선순환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국내 기업들이 짧은 기간에 세계가 놀랄 만큼 비약적인 성장을 한 데는 이처럼 노사 간 화합이 큰 힘이 됐다.

최근 들어 재계에는 기업가정신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박근혜 새 정부가 재계에 강조한 바람도 ‘기업가정신’이었다. 복지와 나눔이 강조되던 대통령선거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들이 노사가 공동운명체라는 상생의 노사관계를 통해 기업을 성장시킬 것을 강조하는 모습이랄까. 박 당선인은 기업인들에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투자와 고용이며 국민의 최대 복지는 일자리”라며, “근로자들이 정년까지 일할 수 있도록 기업들도 고통분담에 적극 나서달라”고 당부한바 있다.

그러나 우리기업의 현실은 기업가정신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노사관계는 이미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저하시키는 주요 요인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지난해 발표한 국가경쟁력 평가에서도 한국의 ‘노사 간 협력’은 129위로 최하위권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에 신세계 이마트가 직원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리스트(서류)’를 만들어 특별 관리했다는 폭로가 있었다. 직원들의 관리를 위한 ‘리스트’를 보면 이 회사가 직원을 사랑하고 협력을 하고 있는 회사가 맞는지 참으로 의심이 간다. 직원들을 차별하면서 서로를 감시하게 만드는 이런 모습은 어린 시절 초등학교 때 배운 북한의 ‘5호담당제’를 연상시킨다.

5호담당제는 북한 공산당이 주민 5세대마다 1명의 열성 당원을 배치해 일상적인 가정생활 전반에 걸쳐 당적 지도라는 구실 하에 간섭·통제·감시하는 제도다. 이런 제도가 북한에만 있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니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서에 이름이 게재된 직원은 얼마나 허탈할지 안 봐도 알 수 있다. 남편이나 아내가 이런 대접을 당한 사실을 가족이 안다면 역시 얼마나 황당할지 눈앞에 선하다. 이런 문서를 만들어 놓고 ‘정도경영’을 선언했던 신세계 경영진은 올바른 기업가정신을 지닌 경영인인지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백화점, 마트에서 계속 쇼핑을 하면서 근로자와 상생할 줄 모르는 기업인에게 돈을 벌어줘야 하는지 '후회막급'이다. “정도경영을 한다”고 했으면 이제라도 고쳐야 한다. 선대 경영인들이 보여줬던 노사화합의 문화는 못 만들더라도 적어도 차별화된 고용환경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일을 못하면 인사고과를 통해 ‘신상필벌’하면 된다. 근로자가 우리 회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명심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러한 교훈은 비단 신세계뿐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기업을 경영하는 모든 기업가가 명심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