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촌스러운 감격’부터 하자. 이제껏 우리나라를 이만큼 전면에 내세운 외국영화가 있었던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 삼성 전광판이 걸리는 것만 봐도 반갑고, <본 레거시>에서 장윤정의 트로트가 흘러나오는 것에 귀가 쫑긋 서고, <로스트>의 엉터리 한국어에 기겁을 하면서도 즐거워했던 우리다. 그런데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의 명감독 워쇼스키 남매가 1억2천만 달러(약 1천2백82억원)를 쏟아 부어 만든 블록버스터 급 영화의 주요 무대로 ‘서울’이 등장한다니, ‘세계적으로 높아진 한국의 위상’ 운운은 다소 손가락이 오그라드는 수사지만 그런 진부한 호기심과 설렘을 생략하고 이 영화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고 난 나의 소감은, 이 대목에서 어정쩡하다. 물론 영화 자체로는 볼만했다. 주제의식의 참신성이나 이야기의 완결성은 차치하고라도, 화면의 세공력만으로도 눈길을 잡는 힘이 있었다. 함께 영화를 보고 난 아내의 첫 소감이 “돈 나오는 수도꼭지가 있다면, 이 영화는 장면 하나하나가 수도꼭지를 한 백 개쯤 콸콸 틀어놓고 만든 것 같더라”였을 정도다. 아내는 그중에 몇 개는 달려가 잠그고 싶더라는 말도 했지만, 이런 비주얼을 단돈 8천원에 볼 수 있다는 건 분명 대중예술 시대의 미덕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등장하는 서울은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후인 2144년의 ‘네오 서울’이다. 해수면이 상승해 옛 도시는 물에 잠기고, 순혈인간과 복제인간이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얽히고설켜 살아간다. 국경이 무너지고 전 세계의 언어와 문화가 뒤섞인 미래 사회에서, 서울은 영어와 한국어를 공용어로 하는 중심 도시로 묘사된다.

이에 대해 공동 연출을 맡은 워쇼스키 감독과 티크베어 감독은 “영화에서 미래의 서울은 해수면 상승으로 바다에 잠겨버린 아시아의 중심 도시가 된다. 모든 아시아인이 서울로 모이게 되고 언어와 문화가 온통 뒤섞이는 과정에서 다른 언어들이 점점 사어(死語)가 되는 반면, 한국어는 영어와 더불어 다수가 쓰는 ‘살아남은’ 언어가 돼 세계 공용어로 사용되는 것”이라고 연출 배경을 밝혔다. 한때 국가 경쟁력을 끌어올리자는 취지에서 ‘영어 공용화 논쟁’까지 겪었던 것을 돌이켜보면, 단일민족이라는 ‘섬’에 고립되어 사고무친(四顧無親)하게 명맥을 이어온 한국어의 팔자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그저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가슴이 살짝 뭉클해진다.

하지만 영화의 ‘설정’ 자체는 흐뭇하지만, 실제 ‘영화적인 묘사’는 서운하다. “영화를 통해 굳이 일본적이냐, 중국적이냐, 한국적이냐를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관습을 뛰어넘어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제시하고 싶었다”는 라나 워쇼스키의 인터뷰를 읽은 뒤라, 기대치를 한껏 낮추고 영화를 봤는데도 그랬다.

극 중에서 복제인간 ‘손미’로 분한 배두나가 입은 기모노 풍의 옷도 마음에 걸렸지만, 손미와 혜주가 지낸 다다미방이며 벽면을 꽉 채운 일본풍의 매화 그림이 너무 강렬해서, 영화의 배경이 ‘네오 서울’이 아니라 ‘네오 도쿄’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이를 상쇄할 만한 비중으로 한국적인 이미지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카메라가 네오 서울의 전경을 부감으로 훑을 때 손톱만 하게 보이는 기와지붕은 너무 사소하며, 저 멀리 ‘옥의 티’처럼 보이는 남산타워는 130년 뒤의 미래라는 설정을 생각하면 ‘의도’라기보다는 생각이 미처 가닿지 못한 ‘무의도’나 ‘무성의’로 보인다.

그나마 빼도 박도 못하게, 여기가 ‘서울’임을 부르짖는 이미지는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한글이다. 하지만 이것도 뒷맛이 좀 석연찮다. 손미가 밤마다 마시는 ‘비누’ 음료 패키지에 조악한 타이포그래피와 키치 풍의 색감을 동원해 등장하는 한국어를 보라. 애초에 이 영화 또는 서구 사회가 서울 또는 아시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 무의식이 언뜻 느껴진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속단이 될까.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원피스에 등장해 우리를 웃게 만든 ‘호남향우회’ 글씨처럼, 그들은 우리를 이렇게 소비한다!

그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한지 극명하게 느낀 대목은 또 하나 있다. 어쩐 일인지 서울을 무대로 한 미래 사회 에피소드에서 모든 남성의 역할을 비(非) 아시아인(백인) 배우들이 도맡는데, 그들의 아시아계 남자 분장이 꽤나 충격적이었다(이 때문에 한 ‘미국 내 아시아계 시민단체’는 이 영화가 인종차별적이라는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넓은 미간과 과장된 몽고주름으로, 모든 아시아계 남자들의 얼굴을 <스타트랙>의 불칸인 부함장 ‘스팍’처럼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영화를 함께 본 아내는 그게 아시아계 남자 분장이 아니라, 미래 사회에 인류가 치명적인 환경오염으로 외형 변화를 겪은 것인 줄 알았다고 털어놓았다.

이렇게 영화의 ‘겉말’과 ‘속말’은 종종 서로 모순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세계의 중심’이라고 추켜세워서 봤더니, 여전히 ‘세계의 변방’임을 확인하게 된다. 집에 돌아와 거울을 보고 눈자위를 손으로 헤집으며, 아내가 혼잣말을 한다. “이래서 연예인들이 죄다 앞트임, 뒤트임을 하나봐, 그치?”

2012년 1월 28일 (6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