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이 최근 유통업계 라이벌 롯데를 흠집내는 발언을 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롯데가 국내 최고 유통업체임은 분명하지만 의사결정 시스템에 있어서는 밀리지 않았나 싶다. 신세계는 이 땅을 살 거냐 말 거냐 하는 데 있어 우왕좌왕하지 않고 한두 시간 만에 결정이 끝났다.”

지난 5월25일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기자들과 만난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이 한 말이다.

정 부회장은 5월27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자체브랜드박람회(PLMA, Private Label Manufacturers Association)’에 참석하기 위해 들른 뒤셀도르프에서 동행한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지고 이렇게 말했다.

“롯데 의사결정 시스템 신세계에 밀려”
이날 정 부회장이 언급한 파주 땅은 부동산 개발업체인 ㈜CIT랜드가 경기 파주 통일동산 일대 53만4000㎡의 땅에 1조원을 들여 추진하는 휴양단지사업.

당초 이 땅에는 롯데가 이 땅의 일부(8만6000㎡)를 사들여 아울렛 매장을 지으려 했으나, 롯데가 ㈜CIT랜드와 토지매입가를 놓고 줄다리기를 벌이는 사이에 신세계가 끼어들어 계약을 체결해 버린 것이다.

이날 정 부회장의 발언은 아울렛 2호점 부지로, 롯데가 먼저 선점했던 경기도 파주 일대의 땅을 사들일 수 있었던 비결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CEO들이 경쟁업체와 관련한 민감한 질문은 아예 언급을 안 하거나 우회적으로 피해 가는 데 비해 정 부회장은 기자들도 당황할 정도로 롯데의 아픈 곳을 찌른 것이다.

정 부회장의 이 같은 이례적인 발언은 바로 재계의 화제를 모았고, 여러 매체들이 정 부회장의 발언을 기사화했다.

그런데 정 부회장이 라이벌 롯데에 관련해 재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대담한’ 발언을 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정 부회장은 지난해 1월에도 “롯데가 중국에선 우리의 경쟁상대가 못 된다”며 직접적으로 롯데를 언급했다.

당시 신세계 임직원들과 함께 자원봉사를 위해 태안 기름유출 현장을 찾은 정 부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중국 사업은 하면 할수록 ‘아직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멀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며 “롯데가 국내에서는 몰라도 중국에선 우리의 경쟁 상대가 못 된다”고 말했다.

작년에도 “롯데 중국에서 신세계에 안 돼” 발언
당시 롯데는 유럽계 대형마트인 중국 마크로의 점포 8개를 인수한 후 본격적인 중국 시장 진출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새 시장 진출을 준비 중인 경쟁업체에 대해 먼지 진출한 선발업체의 CEO가 이처럼 대놓고 기를 죽이는 발언을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정 부회장이 이처럼 유독 롯데에 대해서 과감한 발언을 서슴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와 관련해 유통업계 관계자들은 먼저 올해 들어 매출에서 신세계가 롯데를 따돌리고 부산 센텀시티를 성공적으로 오픈하는 등 롯데와의 경쟁에서 앞서가는 데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분석한다.

이에 대해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롯데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부산에서 신세계 센텀시티를 성공적으로 오픈하고 파주 아울렛 부지 확보 싸움에서 롯데에 실질적인 판정승을 거두면서 신세계 경영진의 자신감이 부쩍 높아진 듯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부산 센텀시티점의 성공에 힘입어 올해 1분기 신세계의 총 매출액은 3조651억원으로 매출 2조9152억원을 기록한 롯데를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지난 3월3일 문을 연 신세계 센텀시티점은 개점 100일 만에 470만명의 방문객이 다녀가 누적매출 1500억원을 기록하는 등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처럼 신세계 센텀시티점이 큰 성공을 거두자 롯데 측은 신격호 회장이 지난 5월10일 이철우 롯데쇼핑 사장을 대동하고 직접 신세계 센텀시티점을 둘러보기도 했다.

신격호 회장이 직접 신세계 센텀시티점을 방문한 것에 대해 유통업계에서는 신 회장이 사실상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부산에서 라이벌 신세계에 밀리는 것에 대한 위기의식을 나타난 것으로 분석했다.

여기에 지난 4월 파주 아울렛 부지를 놓고 벌인 경쟁에서 신세계가 판정승을 거두면서 정 부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의 자신감이 부쩍 높아졌다는 분석이다.

자신감 표현 이면에 담긴 경쟁의식
그러나 정 부회장의 롯데와 관련한 발언이 자신감의 표현이자 롯데그룹 신동빈 부회장에 대한 라이벌 의식의 발로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정용진 부회장은 지난 2006년 아버지인 정재은 명예회장이 보유한 지분 7.82% 중 4.72%를 상속받아 신세계 지분이 4.86%에서 7.32%로 크게 늘었다.

게다가 같은 해 부회장 승진까지 하면서 신세계그룹의 정용진 부회장으로의 후계구도가 가속화될 거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그러나 이후로도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정 부회장의 신세계 보유 지분율 7.32%는 아직까지 그대로다. 오히려 어머니인 이명희 회장이 지난해 하반기에만 20만주 넘는 주식을 확보하며 신세계 지분율을 17.3%까지 끌어올렸다.

이에 반해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은 2006년 롯데쇼핑 대표이사 부회장이 됐다.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은 2007년 12월에 회장이 되면서 실질적으로 경영권을 승계했다. 유독 정 부회장만이 아직 경영수업 중인 셈이다. 언제 경영 전면에 나설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실제로 정 부회장은 이번에 뒤셀도르프에서도, 최근 활발한 대외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경영 전면에 나서는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지분을 언제 물려주실 것인지는 알지 못한다”고 선을 그으며 “이분들을 대신해 대주주 역할까지 하고 있는 만큼 위기의식을 가지고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재계의 한 관계자는 “신동빈 부회장이 실질적인 롯데그룹의 총수로서 경영 전면에 나서고 있는 데 반해 후계 승계가 늦어지고 있는 정 부회장이 롯데와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위상과 입지를 굳히려고 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자신감의 표현’인지 ‘라이벌에 대한 견제’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정용진 부회장의 잇단 파격발언이 유통업계의 라이벌 구도를 더욱 흥미진진하게 만들고 있다.

이형구 기자 lhg0544@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