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때는 고참 방귀소리에 자다가도 일어나서 관등성명 하기 바빴는데’

‘난 코 한번 골았다가 방독면 쓰고 잤어…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하다’

군대의 추억을 가진 예비역이라는 누구나 고단했던 군 생활을 기억한다. 원산폭격, 절대복종, 구타, 공포의 점호시간, 짬밥…. 군대 얘기에서 빠질 수 없었던 단어들이다. 그런데 귀에 맴돌던 이런 단어들이 군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최근 내무반 시설이 좋아졌고, 구타와 폭언도 사라졌다는 소식을 종종 듣고 있다. 그렇지만 반세기 넘게 이어져 온 군대문화가 바뀌었을까. 새해를 바라보는 지금 달라진 병영생활을 알아보고자 동서울터미널과 서울역 등에서 휴가나 외출을 나온 병사들에게 군대의 변화상을 직접 들었다.

인터넷 TV부터 댄스 연습장까지

“근무하느라 놓친 무한도전도 언제든 다시 찾아볼 수 있어요!”

강원도 양구에서 근무 중인 모 상병은 초소근무 때문에 보지 못한 무한도전을 인터넷TV를 통해 다시 본다고 말했다. 그의 생활관에는 위성TV 수신기와 인터넷TV(IPTV) 수신기를 나란히 연결한 42인치 대형 평면 TV가 설치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이뿐만 아니라 사이버지식정보방 (싸지방)에서 컴퓨터를 이용해 개인 홈페이지에 글도 올리고 '플스 (플레이스테이션)'로 축구 게임 '위닝일레븐'을 즐길 수 있다고 했다. 부대마다 차이가 있지만, 인터뷰에 응한 대다수 병사가 위와 같은 시설을 갖춘 생활관에서 지냈다고 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보안상의 이유로 인터넷과 TV 시청이 제한되었던 것을 상기해보면 최근 생활관 시설 좋아졌다는 것은 사실인 듯했다.

또 부대마다 도서관, 영화관 그리고 당구장까지 다양한 시설이 갖춰진 복지관이 있다고 병사들은 전했다. 평일에는 사용이 제한되어 있지만, 주말에는 모든 사병이 사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학 시절 댄스동아리로 활동했다는 모 병사는 주말 타 중대 병사들과 복지관에 마련된 댄스 연습실에서 춤 연습을 한다고 했다. 이 병사는 지난 부대 장기자랑에서 동료 병사들과 댄스 공연으로 우수상을 받아 이번에 휴가를 나왔다고 덧붙였다.

10여 년 전만 해도 부대 내의 시설과 휴일 풍경은 단조로웠다. 농구와 축구 골대가 전부였던 부대시설에서 기껏해야 중대 혹은 소대별로 축구시합을 하는 것이 주말을 보내는 모습이었다. 놀이문화가 전혀 없었던 시절 “누가 온종일 공을 찰 수 있나”에 내기를 걸기도 했다.

 1인 1침대, 개인용 관물대

“매트리스요? 침대에서 자는데요. 동기나 비슷한 기수끼리 한 내무반에서 생활해요.

국방부가 지난 2003년부터 7조 원 넘은 예산을 투입한 병영생활관 현대화 사업으로 침상용 내무실에서 분대단위 침대형으로 개선되어왔다. 침상용 내무실에서 분대단위 침대형으로 개선되면서 한 내무실 수용인원도 8명 내외로 줄어들었다. 소대단위 생활이 아닌 분대단위 생활로 바뀌면서 장병의 개인 생활도 바뀌었다. 과거 칼잠밖에 잘 수 없었던 좁은 공간, 선임의 눈치를 봐야 했던 내무실에서 개인 생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두 다리 쭉 펴고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과 동기 혹은 비슷한 기수들과의 내무실 생활은 자신만의 생활공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동기들과 같이 지내니깐 좋죠. 비슷한 계급에 또래니깐 아무래도 이야기하기도 편하고”

국방부에 따르면 동기들끼리 한 생활관에서 병영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율병영생활관제도를 확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지금 실험 운영하고 있는 이 제도는 아침점호에서부터 일과시간에는 기존처럼 건제단위로 활동하지만, 일과 시간이 종료되면 다음 날 아침까지는 동기들끼리 한 내무실에서 자율시간을 가질 수 있다.

 군대에서 토익 준비를?

몇 달 전 19개월 군 생활 동안 총 9개의 자격증을 취득한 병사가 화제였다. 자유시간을 이용해 공부했다고 전해졌다. 괜한 의구심에 이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 병사들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자격증 시험이나 영어공부를 하는 병사도 꽤 있습니다. 특히 전역이 며칠 남지 않은 선임들은 토익 공부를 하더군요”

인터뷰를 마친 모 상병 손에는 위드프로세스 1급 자격증에 관련된 책들이 있었다. 휴가를 마치고 부대에 복귀하면서 구입한 책이라고 했다. 중대 내에서 서무계를 맡은 모 상병은 행정실에서 컴퓨터로 작업하는 시간이 많아서 이번 기회에 필기시험을 준비한 뒤 3월에 있는 워드프로세스 1급에 응시할 계획이라고 얘기했다. 인터뷰한 대다수 병사는 일과 후 개인 공부를 하는데 별 지장이 없다고 말했다.

대구에 근무하는 모 상병은 “며칠 전 토익시험에서 800점을 넘은 선임은 2박3일 휴가도 다녀왔습니다. 자격증을 따면 외박이나 휴가를 주기 때문에 일과시간이 끝나고 공부하는 동기들도 많다”며 자신도 이번 겨울에는 토익공부를 시작 것이라고 말했다. 입대 전 대학생이었던 그는 전역하기 전까지 토익 900점 획득하고 어학연수를 갈 것이라고 당찬 목표를 말했다.

얼차려, 흰 장갑의 청소 검열… 숨조차 쉴 수 없었던 점호시간은?

각 잡힌 모포와 관물대, 침상 끝 선 정렬, 일석점호시간은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이 보인다면, 곧바로 얼차려로 이어졌다. 군대 생활을 한 사람들이라면, 공통으로 ‘군대는 점호로 시작해 점호로 끝난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그만큼 점호는 복종과 서열이 절대시 되는 병영생활의 한 단면이다. 군기로 가득한 점호시간마저 바뀌었을까.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간단한 인원점검과 암구호 숙지 정도 점검합니다”

몸을 뻣뻣하게 세워 각을 잡고 우렁차게 번호를 외치는 일석점호가 차츰 사라지고 있다. 인터뷰한 모 상병은 일직사관이 오기 전까지 생활관 내 병사들끼리 대화시간을 가진다고 말했다. 여자친구, 가족 등 사적인 이야기부터 오후 일과 때의 교육훈련 얘기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뤄진다고 했다. 물론 부대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었지만 이제 더는 전투화 검사 등 사소한 문제로 군기를 잡던 일석 점호를 찾아 볼 수 없었다.

변화된 병영 생활

사실 인터뷰를 하면서 최근 달라진 병영생활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이었다. 즉각적이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군 특성상 달라진 병영생활이 군 기강 해이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직접 병사들을 만나고 의견을 들어보니 결국 변화하는 군 생활이 우리 군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닌가 싶었다. 말년휴가를 나온 모 병장은 “이등병 때와 달라서 본전 생각도 나지만 서로 지킬 것만 잘 지키면 사소한 문제로 서로 갈등을 빚을 일이 없다”며 변화된 병영생활을 긍정적으로 표현했다. 군부대 환경이 변한만큼 병사들의 군대 의식도 차츰 변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해간다는 여세추이( 與世推移 ) 말이 있다. 일각에서는 병영생활의 변화에 우려의 목소리가 있지만, 시대와 세대가 변한만큼 우리 장병이 더욱 보람되고 값진 군 복무를 할 수 있도록 군 환경과 시스템이 변하길 선배 예비역으로서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