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핀테크 기업 와이어카드 사태가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2019년부터 회계부정 논란이 끊이지 않은 가운데 파이낸셜타임스는 10일(현지시간) 수사 당국의 조사 결과 결국 와이어카드의 회계부정이 사실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시장에서는 와이어카드 후폭풍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무엇보다 글로벌 경제 위기가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와이어카드의 흥망성쇠에서 오는 '특이점'에 주목하는 중이다.

와이어카드 본사. 출처=연합뉴스
와이어카드 본사. 출처=연합뉴스

잘 나가던 핀테크, 결국 비극으로 끝나다

와이어카드는 1999년 독일에서 설립된 핀테크 기업이다. 선불기반 가상결제 서비스인 E-wallet(Emoney)를 주력으로 삼아 최종결제를 지원하는 핀테크 기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18년 말 기준 총 자산이 58억5000만유로에 달할정도로 엄청난 존재감을 자랑했으며 시가총액은 독일 도이치뱅크를 넘어서기도 했다. 

비즈니스 포트폴리오 자체가 다양한 비즈니스를 가동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의 경우 신용카드 문화가 안착되어 있어 체감하기 어렵지만, 와이어카드와 같은 곳은 개인의 신용을 확인하기 어려운 많은 나라에서 말 그대로 다양한 신용 기반 결제 서비스를 가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4년 인포지니에 인수된 후 와이어카드의 핀테크 존재감은 더욱 커졌다. 2007년에는 싱가포르에 진출해 아시아로 저변을 넓혔고 2017년에는 미국 시티은행의 선불카드 사업을 인수하는 등 광폭행보를 거듭했다. 

뜨거운 논란이 일고있는 크립토 시장에서 진출했다. 특히 와이어카드 비즈니스 포트폴리오의 유연성에 기대어 중간 발행사로 와이어카드와 인연을 맺고 있는 결제사들이 눈길을 끈다. 크립토닷컴도 와이어카드의 자회사인 WCS(와이어카드솔루션)을 운용하는 중이다.

균열은 2019년 내부고발이 나오며 시작됐다.

존재하지 않는 가공거래로 장부를 조작했다는 폭로가 시작됐고 그 결과 와이어카드 내부에서 회계조작이 벌어져 19억유로에 달하는 돈이 실제하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와이어카드가 돈을 보관한 은행으로 비디오유니뱅크(BDO)와 필리핀군도은행(BPI)을 지목했으나 막상 그곳에는 와이어카드의 계좌가 자사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이낸셜타임스 등에 따르면 최근 독일 수사당국은 와이어카드의 회계 담당자로부터 회계조작에 대한 진술을 받아냈으며, 조만간 경영진에 대한 명확한 조사에 나설 전망이다.

와이어카드에 거액을 투자한 소프트뱅크 입장에서는 충격의 연속이다. 특히 2019년 내부폭로가 나왔음에도 거액을 투자한 소프트뱅크의 감각을 두고 업계의 뒷 말이 무성하다. 

일부 외신에 따르면 당시 와이어카드는 컴퓨터 상의 장부만 보여주면서 소프트뱅크의 투자를 유치했다는 말까지 나온다. 글로벌 ICT 트렌드가 급변하고 있음에도 사실상 '감'에 의존해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 이후 만신창이 엑시트에 그치면서 지루한 법정공방을 벌였던 위워크 흑역사가 오버랩되는 순간이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출처=연합뉴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출처=연합뉴스

예고된 비극?

와이어카드는 이례적으로 빠른 성장을 거듭했으나 그만큼 수상한 점도 많았다. 특히 내부관리에 있어 잡음이 있었다. 2019년 회계조작 내부폭로가 나오기 전인 2018년에도 회사 내에서 부적절한 자금이동이 많았다는 지적을 받곤 했다.

다만 더 큰 논란은 비록 결과론적 해석에 가깝지만, 다른 ICT 기업 달리 보수적 스탠스를 밟아가야 할 핀테크 기업이 지나친 광폭행보를 보였다는 점이다. 물론 핀테크도 혁신에 기반을 둔 ICT 기업이지만 업의 특성상 보수적으로 움직일 여지는 충분했다. 그런 측면에서 연쇄적으로 아시아 지역 진출 및 크립토 시장 진입 등을 끌어낸 와이어카드의 행보는 그 자체로 불안했던 것이 사실이다.

내부에서 수상한 루머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외부적으로 지나친 광폭행보를 거듭하는 것은 그 자체로 위기의 시그널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경기침체 및 강력한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지는 지금은 상황이 더 심각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글로벌 경제가 신냉전과 경제 블록화의 갈림길에 선 상태에서 와이어카드와 같은 핀테크 기업은 더욱 살아남기 어려워졌다는 평가다. 팬데믹을 거치며 어느정도 '눈속임'이 가능했던 기업들도 이제는 황량한 벌판에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역대급 몸값을 부르며 개발자 확보에 사활을 걸었던 주요 스타트업을 중심으로 최근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비슷한 배경이다.

존디어 트랙터. 출처=연합뉴스
존디어 트랙터. 출처=연합뉴스

겨울이 온다...지금은 집중할 때

녹색 트랙터로 유명한 미국의 농기계 제조기업 존디어는 1837년 설립 후 세계 최대 농기계 생산업체가 됐으나 2014년 큰 위기를 겪은 바 있다. 당시 농업경기 침체와 제조업의 한계가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존디어는 분골쇄신을 택했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강력한 ICT 기반 농업 솔루션을 구축하는 한편 비즈니스 모델의 극적인 변화를 꾀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의 존디어는 단순히 양산형 트랙터를 찍어내는 곳이 아닌, 농업과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수집해 애그리테크 시장을 선도하는 거대한 플랫폼이 되어가고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존디어의 정체성이다. 존디어는 데이터 기반의 농업 비즈니스 모델을 추구하면서 많은 스타트업을 인수했지만 단 한 번도 녹색 트랙터의 연장선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데이터, AI, 클라우드 등 다양한 ICT 기술을 총동원해 일종의 플랫폼 로드맵을 힘있게 끌어갔으나 본연의 농업 정체성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겨울이 온다면 누가 버틸 수 있을까? 최근 기업의 비즈니스 전략이 답도 없는, 유행따라 흘러가는 슈퍼앱 전략만 맹목적으로 쫒으며 아마존 방식의 어설픈 가두리 생태계만 추종하는 사이 와이어카드의 몰락과 '오래된 기업' 존디어의 행존은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