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부품 수직계열화 전략을 가동하는 애플이 유독 5G 모뎀칩에서는 퀄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분간 퀄컴의 5G 모뎀칩을 수급할 수 밖에 없다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퀄컴이 오히려 탈 모바일을 기치로 걸어 다양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어 눈길을 끈다.

먹이사슬의 최상단에 군림하는 완성품 업체와, 핵심 부품 인프라를 보유한 업체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다.

궈밍치 트위터 갈무리. 출처=갈무리
궈밍치 트위터 갈무리. 출처=갈무리

"애플, 당분간 퀄컴 5G 모뎀칩 쓸 것"
애플이 5G 모뎀칩 자체 개발에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실제로 애플 전문가로 통하는 궈밍치 TF인터내셔널증권 분석가는 트위터를 통해 "애플이 자체 5G 모뎀칩 개발에 실패했을 수 있다"면서 "내년 애플 아이폰에는 퀄컴의 5G 모뎀칩이 100%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5G 모뎀칩 공급자인 기존 퀄컴의 전망과 크게 다르다.

퀄컴은 지난해 말 자사의 애플 물량 소화비율이 2023년 20%일 것이라 전망한 바 있다. 실제로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는 지난해 11월 퀄컴 투자자의 날을 통해 추후 10년 내 퀄컴이 진출할 수 있는 시장을 현재 1000억달러에서 7000억달러로 키우겠다고 강조하는 한편 "애플에 제공하는 통신칩 공급 비율은 20% 줄어들 것"이라 밝혔다. 그는 "퀄컴은 단일 시장, 단일 고객에 정의되지 않는다"면서 "다양한 파트너들과 더 많은 기회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궈밍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부품을 제공하는 쪽에는 20% 공급량을 예견했으나 막상 부품을 받아야 하는 쪽은 100% 공급량이 필요해진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지난해 12월 하와이에서 열린 스냅드래곤 서밋에서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가 한국 기자들과 만나 삼성 스마트폰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최진홍 기자
지난해 12월 하와이에서 열린 스냅드래곤 서밋에서 크리스티아노 아몬 퀄컴 CEO가 한국 기자들과 만나 삼성 스마트폰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최진홍 기자

애플의 아픈 기억
5G 모뎀칩에 쓰라린 기억이 있는 애플 입장에서는 궈밍치의 주장이 더 가슴 아프다.

현재 애플은 전세계 200여개가 넘는 협력 업체에서 부품을 공급받고 있으며 특히 모뎀 칩은 지난 2011년 이래 퀄컴과 독점 계약을 맺고 공급받았다.

애플과 퀄컴의 동행은 2017년부터 불안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통신 네트워크 시장에서 퀄컴이 시장 지배자적 위치를 활용, 제조사들에게 일종의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비판의 중심에는 애플이 있었다. 강력한 연구개발을 통해 라이선스 비즈니스 모델을 추구하는 퀄컴을 압박해 자사의 비용 지출을 줄이려는 의도가 깔렸다.

애플은 분쟁이 벌어지기 시작하자 자기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퀄컴의 제조사 파트너들을 규합해 일종의 여론몰이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국내 공정거래위원회가 퀄컴에 시장 독과점을 두고 과징금을 부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나아가 모뎀칩에 있어 인텔의 손을 잡기 시작했다. 애플 아이폰 오리지널부터 아이폰4까지 모뎀칩을 제공했던 인피니온을 인수한 인텔이 아이폰7부터 애플과 가까워졌고, 동시에 퀄컴과 애플의 관계는 본격적으로 틀어지기 시작했다.

애플 스토어. 출처=갈무리
애플 스토어. 출처=갈무리

난타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애플은 퀄컴과의 분쟁과는 별도로 인텔과 협력해 5G 모뎀칩 개발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퀄컴으로부터 부품을 제공받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인텔과의 협력으로 5G 모뎀칩 개발에 성공, 일종의 '탈퀄컴'을 노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애플의 생각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텔 모뎀칩 사업부를 10억달러에 인수하는 등 발 빠른 행보에 나섰으나 막상 중요한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2019년을 기점으로 삼성전자 및 LG전자를 비롯해 중국의 화웨이 등은 빠르게 5G 스마트폰을 출시했으나 애플은 아이폰에 5G 서비스를 덧대지 못했다.

굴욕 릴레이도 이어졌다. 급해진 애플이 삼성전자에 5G 모뎀칩 조달을 조심스레 타진했으나 퇴짜를 맞았다는 보도가 나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폰아레나는 2019년 초 애플이 삼성전자에 5G 모뎀칩 공급을 요청했으나 물량 부족을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보도했다. 삼성전자는 갤럭시S10 5G 등 자체 물량에 5G 모뎀을 탑재해야 하기 때문에 애플에 추가 물량을 공급할 수 없는 상태기 때문이다.

중국 화웨이가 애플에 자사 5G 모뎀칩을 제공하겠다며 손을 내미는 이색적인 장면도 연출됐다. 런정페이 화웨이 창업주가 2019년 4월 15일 미국 CNBC 인터뷰에서 애플에 자사의 5G 모뎀칩을 판매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우리는 애플에 열려있다"면서 적극적인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물론 당시 미중 패권전쟁이 극에 달한 상태라 화웨이의 메시지는 현실성 없는 제안이었다. 

결국 애플은 자존심을 내려두고 같은 미국 기업인 퀄컴과 합의했다. 애플은 퀄컴에게 45억달러를 합의금으로 지급하며 간신히 5G 아이폰을 출시할 수 있었다. 

법원의 판단도 퀄컴의 승리였다. 2019년 애플이 제기한 특허침해소송은 퀄컴이 승소했으며 역시 애플은 퀄컴에 3100만달러를 지급했다. 여기에 애플이 퀄컴에게 추가로 걸었던 특허무효소송도 퀄컴의 승리로 끝났다. 로이터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 연방대법원은 28일 애플이 제기한 상고 신청을 기각, 최종적으로 퀄컴의 손을 들어줬다. 퀄컴의 완승이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현장에서 퀄컴과 인텔의 로고가 보인다. 사진=최진홍 기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현장에서 퀄컴과 인텔의 로고가 보인다. 사진=최진홍 기자

시장에서는?
애플은 하드웨어에 스토리텔링으로 가미한 소프트웨어를 탑재해 판매하는 기업이다. 특유의 폐쇄적 생태계를 가동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최근에는 수직계열화 전략을 가동하는 중이다.

지난 6일(현지시간) 세계개발자대회 WWDC 2022를 열어 M2 및 iOS16을 비롯한 다양한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M2에 시선이 집중된다. 최초의 애플의 시스템온칩(SoC) M1의 후속이며 애플은 M1 발표 후 M1 울트라, 나아가 M2까지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다. M1 대비 50% 확장된 초당 100기가바이트(GB)의 메모리 대역폭을 자랑하며 24GB의 통합 메모리를 지원한다.

트랜지스터는 M1 대비 25% 많은 200억개를 채웠고 8코어 중앙처리장치(CPU)는 M1 대비 18%, 10코어 그래픽처리장치(GPU)는 역시 M1 대비 35% 빠르다. 5나노가 적용됐다.

M2. 출처=애플
M2. 출처=애플

시장에서는 애플이 PC에 있어 M2까지 빠르게 제작, 하드웨어 수직계열화 전략을 가동하고 있으나 모바일 5G 모뎀칩에서는 퀄컴의 강력한 기술력과 유독 결별하지 못하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궈밍치의 예언대로 애플이 여전히 자체 5G 모뎀칩을 개발하지 못했다면, 당분간 퀄컴과의 동행이 이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애플이 퀄컴과 결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오히려 판의 주도권이 퀄컴에게 쏠리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최근 모바일 AP 시장에서 퀄컴은 미디어텍 등의 공습에 잠시 주춤하고 있다. 미디어텍이 삼성의 중저가 단말기 라인업에 모바일 AP를 제공하며 조금씩 프리미엄 시장을 넘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다만 퀄컴은 지난해 11월 선언한 것처럼 모바일을 넘어 다양한 스펙트럼을 품어가고 있다. 

28일 신규 RFFE 모듈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번에 선보인 확장된 제품군은 블루투스, 와이파이 6E 와 차세대 표준인 와이파이 7용으로 설계되었으며 스마트폰을 넘어 자동차, 확장현실(XR), PC, 웨어러블 모바일 광대역 및 사물인터넷(IoT) 등을 비롯한 다양한 기기 부문을 지원하도록 설계되었다. 

예단할 수 없지만 강력한 기술력을 가진 부품 업체가 오히려 선택지를 넓히고 있으며, 생태계의 최정상에 선 완성품 업체가 부품업체의 기술력과 쉽게 결별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펼쳐지고 있다. 그 자체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출처=퀄컴
출처=퀄컴

"싸움, 끝나지 않았다"
애플이 당장 5G 모뎀칩에서 '탈'퀄컴에 나설 수 없지만, 장기적 관점으로는 기어이 수직계열화를 완성할 것이라는 전망도 만만치않다. 사실 애플에게 있어 디스플레이 제작 및 파운드리 등 자사가 필요로 하지 않는 영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설계 영역에서 하드웨어 수직계열화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5G 모뎀칩도 시간문제라는 뜻이다.

양사의 분쟁이 대부분 끝났으나 퀄컴이 애플에게 물량을 제공하는 합의 기한은 2025년까지다. 만약 그 때까지 애플이 자체적인 기초체력을 키울 수 있다면 2025년 이후 다시 기술 분쟁이 벌어지는 한편, 애플의 전격적인 승부수가 나올 수 있는 균열이 벌어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