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이종우(LEE Chongwoo)=친구의 초상 45.6×38.7㎝ 캔버스에 유채, 1926. (오른쪽)김중현(KIM Junghyun)=농악(農樂). 사진=권동철.
(왼쪽)이종우(LEE Chongwoo)=친구의 초상 45.6×38.7㎝ 캔버스에 유채, 1926. (오른쪽)김중현(KIM Junghyun)=농악(農樂). 사진=권동철.

◇이종우(LEE Chongwoo, 1899~1981)

이종우는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8년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1923년에 졸업했다. 이후 서울로 돌아와 이듬해부터 고려미술원에서 연구생을 지도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황해도 봉산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부유한 집안 환경덕분에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1925년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 당시 러시아 혁명 중 국외로 망명한 화가 슈하이에프 미술연구소에서 수학하며, 1927년에 열린 ‘살롱 도톤드(Salon d'automne’에 ‘모부인상(某婦人像)’과 ‘인형이 있는 정물’을 출품하여 수상하기도 했다.

1928년 11월에 동아일보사에서 유학시기 작품을 선보이는 귀국작품전 개최하였고, 1934년 서양화가 모임인 목일회를 창립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친구의 초상’은 파리 유학시절 친우 최근우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인물의 데생이 매우 정확하게 묘사되어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이 작품은 1920년대 초기 유화를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글=김은주>

 

김중현=농악, 72×91㎝ 캔버스에 유채, 1941. 국립현대미술관제공.
김중현=농악, 72×91㎝ 캔버스에 유채, 1941. 국립현대미술관제공.

◇김중현(KIM Junghyun, 1901~1953)

김중현은 전차 차장, 점원, 총독부의 제도사 등 다양한 직업을 거치며 독학에 가까운 방식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1925년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 하천계에서 근무할 당시에는 기관에서 발간한 잡지에 표지화를 그리는 등 삽화가로도 활동했다. 다양한 직업 활동 중에도 1928년부터 1943년까지 꾸준히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선과 특선을 거듭했다.

김중현은 서양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동서양의 기법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작품을 제작했다. 1936년에는 동·서양화부에 각각 ‘춘양(春陽)’과 ‘농촌 소녀’를 출품하여 모두 특선을 받기도 했다. 해방 후 조선상업미술가협회 회장과 ‘대한민국미술전람회’심사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1954년 천일백화점 화랑에서 한국전쟁을 거치며 어이없이 요절한 3인의 천재화가 유작전이 열렸는데, 이때 구본웅, 이인성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농악(農樂)’은 사물놀이 패가 한 판을 벌이는 장면의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김중현은 일반 서민들의 진솔한 삶의 애환과 풍속을 주제로 한 작품을 자주 그렸는데, 농악은 바로 그런 주제의 대표적인 예이다. 검게 그을린 피부의 농민들이 북과 꽹과리를 치며 상모를 돌리는 역동적인 모습을 소재로 삼았다.

화면의 정중앙을 차지한 정면의 인물에서부터, 화면 밖으로 나와 뒷모습을 보이는 왼쪽 전면의 인물, 고개를 돌려 측면을 보여주는 오른쪽 인물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화면 구성을 바탕으로, 각자 다른 몸동작을 표현하고 있다. 마치 농악의 강렬한 리듬을 그림으로 옮긴 듯, 리드미컬한 형태감을 화면 전체에 부여했다. 강한 빛을 받은 흰색 옷의 명암처리도 매우 극적으로 묘사되었다. 일견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치밀한 회화적 고려가 담긴 작품이다.<글=김인혜>

 

김종태(KIM Chongtai)=사내아이, 53×45.4㎝ 캔버스에 유채, 1929. 국립현대미술관제공.
김종태(KIM Chongtai)=사내아이, 53×45.4㎝ 캔버스에 유채, 1929. 국립현대미술관제공.

◇김종태(KIM Chongtai, 1906~1935)

김종태는 경성사범학교에서 수학한 후 주교보통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며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작품을 발표했던 서양화가이다. 거의 독학에 가까운 방식으로 독자적인 서양화기법을 연마했다. 1926년 20세의 나이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후 연달아 특선을 차지하면서, 조선인 최초로 선전 서양화부 추천작가가 되었다.

술과 얽힌 기행(奇行)으로 여러 일화를 낳은 천재 화가로 알려졌으나, 1935년 개인전을 열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29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요절을 안타까워한 친구들이 작품을 서울로 가지고 와 명치제과에서 유작전을 열어주었다. 신문기사나 도록 등에 사진으로 전하는 수많은 김종태의 작품은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대표작 ‘노란 저고리’를 포함 총 4점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사내아이’는 4점의 현존 작품 중 하나로 ‘노란 저고리’와 같은 1929년에 제작되었다. 마치 소녀와 소년이 쌍을 이룬 것처럼 ‘노란 저고리’를 입은 소녀는 볼그스레한 볼을 가진 앳된 표정으로 정면을 직시하는 반면, 초록과 남색 한복을 입은 소년은 졸음에 겨워 의자에 기댄 모습으로 그려졌다.

김종태의 작품은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며, 대상의 자연스러운 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특징이다. 서양화이지만 마치 동양화의 ‘일필휘지(一筆揮之)’를 보는 듯, 간단한 한 번의 붓질로 대상을 묘사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다. 주변 화가들의 회고에 따르면, 김종태는 이와 같은 작품을 매우 짧은 시간에 제작했다고 한다. 서명은 항상 ‘한자세로쓰기’를 지향해서, 화면의 왼쪽 위에 제작연도와 함께 표기되어 있다.<글=김인혜>

#캡션

1=(왼쪽)이종우(LEE Chongwoo)=친구의 초상 45.6×38.7㎝ 캔버스에 유채, 1926. (오른쪽)김중현(KIM Junghyun)=농악(農樂). 사진=권동철.

2=김중현=농악, 72×91㎝ 캔버스에 유채, 1941. 국립현대미술관제공.

3=김종태(KIM Chongtai)=사내아이, 53×45.4㎝ 캔버스에 유채, 1929. 국립현대미술관제공.

 

권동철 미술전문기자
권동철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