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불꼬불 시나브로 들어가는 옛 고갯길 여행. 속도전이 만연한 시대, 문명의 속도를 내려놓고 ‘느리게 가는 시간’과 ‘손대지 않은 풍광’에 빠져들면 새로운 삶이 동행한다.

사실 도회지의 시간에 익숙한 사람에게 ‘느린 시간여행’을 말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그것도 평지가 아닌 좁고 굽어진 옛길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느릿느릿 뒷짐 지고 고갯길을 걷다 보면 아름다운 자연과 그곳에서 생명을 싹틔우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낄 수 있다.

강원도 진부령의 소똥령 고갯길이 그런 곳이다. 언제 찾아도 포근한 어머니의 품처럼 온기와 생명감을 느끼게 해준다.

지난 주말 금방이라고 비를 쏟아낼 듯 한 날씨를 안고 소똥령 고갯길을 찾아나섰다.
소똥령의 본래 이름은 소동령(小東嶺)이다. 동쪽의 작은 고개라는 뜻이지만 ‘작다’에 방점을 찍으면 안 된다. 백두대간의 고개 중에서 낮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인제 원통을 지나 진부령 길을 오른다. 진부령은 미시령과 한계령에 비해 경사가 비교적 낮은 고갯길이다.

하지만 경사가 낮은 만큼 고갯길 정상까지의 길이는 인제와 고성 쪽을 합쳐 16km에 이를 정도로 길다. 해발 520m 진부령 정상. 기어코 하늘은 골짜기마다 운무를 만들어내며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자동차들이 짙은 운무 속의 진부령을 헉헉거리며 넘는다. 구절양장 굽이진 길을 따라 운무를 헤치고 꺾어지고 휘어지는 일이 한편으로 어렵고 짜릿하다.

서행할 수밖에 없으니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느림의 미학’을 맛보게 된다. 숲과 바람 소리는 굽잇길 내내 귓가를 따라온다. 정상에서 5분여 내려서자 고성군에 속하는 소똥령 등산로 간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소똥령 고갯길로 들어서 북천계곡 구름다리를 지나자 안개바람을 타고 코끝으로 전해오는 숲 내음이 촉촉하고 싱그럽다. 물기를 듬뿍 머금은 안개 속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곧 하늘이 완전히 가려지고 녹음 속으로 빠져들었다. 빗줄기는 나무에 막혀 숲길을 넘보지 못하고 안개 낀 숲은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소똥령은 길이 닦인 시간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옛날 고성에서 한양으로 가기 위한 국도 1번지라는 말을 들으면 차량소음으로 가득 찬 지금의 1번국도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 길은 다르다.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으로 과거 길에 오르는 선비나 물건을 사고팔러 다니는 장사치들이 힘겹게 넘던 골짜기다. 그만큼 산세가 험해 산적도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이름의 유래도 소동령이라는 것 외에 재밌는 설이 많다. 원통장으로 소를 팔기 위해 소똥령을 넘다가 주막에서 소가 똥을 하도 많이 누어 소똥령이라는 이름이 붙어졌다는 것과 많은 세월 사람들이 소똥령을 넘다 보니 자연적으로 길이 패여 생긴 소똥 모양의 봉우리를 두고 소똥령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설이다.

어떤 연유가 되었던 소똥령이라는 이름에서 풍겨나는 포근함과 진한 고향의 향기는 정겹기만 하다.

10여분 오르자 숲은 고요하다. 초록빛깔의 새 옷을 갈아입고 비를 막아낸 나뭇잎들은 촉촉하다. 새 생명을 뿜어내는 나무줄기만 촘촘히 박힌 숲 속은 태고적 적막감에 깊숙이 잠겨 있다.

길섶에 금낭화가 피어나 초록에 점점이 분홍빛 물감을 덧칠한다. 그 옆엔 비바람을 이겨낸 들꽃들이 빗방울을 잔뜩 머금은 채 초롱초롱 빛을 내고 있다.

이끼 낀 조그만 개울에선 숲 속의 새 생명을 깨우듯 맑고 청량한 기운을 쏟아내고 있다. 슬쩍 다가온 안개에 갑자기 길을 잃는다.

하지만 숲엔 소리가 있다. 바람소리, 물소리, 그리고 나뭇가지가 부딪히는 소리.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새들도 초여름 수풀 속을 부지런히 날아다닌다.

30여분을 올라가니 한 무더기의 흙무덤이 눈앞에 나타난다. 바로 제1소똥이다. 소똥령의 유래가 되었다는 봉우리가 길가에 봉긋하게 자리 잡고 앉아 지나는 나그네에게 나침반의 역할을 하고 있다.

정상으로 갈수록 숲은 더욱더 깊어지고 울창하다. 고갯길은 대낮에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가 우거져 짙은 안개를 뿜어내고 있다.

쉬엄쉬엄 산길을 따라 1시간30여분을 훌쩍 넘겨 소똥령(제1봉) 정상에 섰다. 빼곡히 들어선 안개나무들 사이로 간이의자 하나가 힘들게 올라온 길손을 반겼다.

옛날 지친 나그네의 발길을 잡던 주막의 흔적은 간데없지만 나무의자 하나만으로도 그 당시 나그네들의 편안함을 오롯이 느껴볼 수 있다.

이곳에서 길이 두 갈래로 이어진다. 하나는 원통으로 가는 소똥령 길이 계속되고 다른 한쪽은 소똥령 마을로 가는 길이다. 안개로 인해 더 이상 고갯길을 넘지 못하고 마을길로 방향을 잡았다.

처음보다 빗줄기는 강해졌지만 숲에서 맞는 비는 온몸을 깨우듯 토닥이는 엄마의 손길처럼 부드럽고 조심스럽다.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우헐장제초색다 송군남포동비가, 내려서는 길, 걸음을 멈추고 아쉬움에 뒤를 돌아본다.)”고 노래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소똥령도 이 비 그치고 나면 풀빛은 무성해 오고 고갯길은 짙푸른 초록 옷으로 색칠을 할 것이다.

여행정보

가는 길
팔당대교를 지나 44번 국도를 이용해 양평, 홍천, 인제를 지나 진부령 길을 탄다. 정상에서 고성 방향으로 한 5분여 내려가면 오른쪽에 소똥령 표지판이 보인다. 마을은 여기서 5분 정도 더 내려가면 된다.

볼거리
소똥령에서 20여분 거리에 우리나라 최북단 사찰인 건봉사가 있어 들러볼 만하다. 또 전통마을인 왕곡마을을 비롯해 청간정, 화진포, 통일전망대 등 볼거리가 풍성하다.

체험
소똥령 마을에선 계절별로 트레킹과 산나물, 송이 캐기, 소달구지 타기, 묵 쑤기, 전통주 담그기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있는 농촌전통 테마마을이다.(http://sottong.go2vil.org)

소똥령(고성)=글ㆍ사진 아시아경제신문 조용준 기자 (jun21@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