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금용 일섭-제존집회도, 1951, 종이에 채색, 140×196.5㎝, 송광사성보박물관 소장.  (중앙)장운상-화랑연무도, 1964, 종이에 수묵채색, 92×235.5㎝ (맨 오른쪽)이종상-장비, 1963, 종이에 수묵담채, 290×20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권동철
(왼쪽)금용 일섭-제존집회도, 1951, 종이에 채색, 140×196.5㎝, 송광사성보박물관 소장. (중앙)장운상-화랑연무도, 1964, 종이에 수묵채색, 92×235.5㎝ (맨 오른쪽)이종상-장비, 1963, 종이에 수묵담채, 290×205㎝,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권동철

[이코노믹리뷰=권동철 미술전문기자 ] 서양 미술과 조선 및 근현대의 아카데믹한 미술에 대한 반작용으로 표현주의적이고 강렬한 미감이 추구되었던 장식미(裝飾美) 고찰한다. 아울러 민족주의적 회귀와 전통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1970, 1980년대 전통론을 살펴본다. 조선 시대 풍속화와 미인도, 민화는 이러한 속의 미학을 잘 반영한다. 조선 시대, 불교회화의 정신 및 미감과도 통한다. 아래 글은 ‘DNA:한국미술 어제와 오늘’ 전시도록(국립현대미술관, 2021)에 수록된 글을 요약 발췌했다.

◇제존집회도‥화기에는 ‘미륵불탱’이라 적혀

이번 전시에 출품된 제존집회도(諸尊集會圖)는 일섭이 1951년에 그가 주석하던 부용사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한 불화로, 화기(畵記)에는 ‘미륵불탱’이라 적혀 있다. 이 불화에는 석가모니불과 포대화상, 관음과 지장보살, 불교의 호법신들 외에 흥미로운 존격들이 등장한다. 아기예수를 안은 마리아, 공자 등 동서양 성인들이 마치 부처의 설법을 들으러 오는 것처럼 구름을 타고 모여든다. <근현대기 불화의 파격을 이끈 화승들, 최엽 동국대학교 강사>

 

‘전(傳) 단원 김홍도-경직풍속도8폭 병풍’전시전경, 사진=권동철
‘전(傳) 단원 김홍도-경직풍속도8폭 병풍’전시전경, 사진=권동철

◇김홍도‥못 그리는 그림이 없는 화가

경직도(耕織圖)는 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모를 심고 수확하는 농사꾼, 실을 잣고 베를 짜는 아녀자의 모습과 같은 농경 사회의 주요한 장면들을 담아내면서 김홍도 풍속화의 주요한 모티프들을 공유하게 된다.

‘단원풍속도첩(檀園風俗圖帖, 국립중앙박물관)’ 가운데 〈벼타작〉, 〈밭갈이〉, 〈서당〉, 〈행상) 속 등장인물을 산수 배경의 화면 속으로 그대로 옮겨 온 듯한데, ‘한양가(漢陽歌)’에서 광통교 아래 그림가게에 늘어놓은 경직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을 만큼, 경직도의 민간수요가 널리 확대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傳) 단원 김홍도-경직풍속도8폭 병풍, 조선18세기, 비단에 수묵채색, 140.2×47×(8)㎝. 한양대학교박물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傳) 단원 김홍도-경직풍속도8폭 병풍, 조선18세기, 비단에 수묵채색, 140.2×47×(8)㎝. 한양대학교박물관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와 같은 풍속화의 전개에서 김홍도의 역할은 대체 불가능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화가 김홍도를 조망함에 있어 유독 풍속화만을 강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엄밀히 말해 조선 시대의 사료를 망라하고 현전하는 작품들에 기초할 때, 김홍도는 무소불능(無所不能), 무불응향(無不應向)의 못 그리는 그림이 없는 화가였다. 풍속화뿐만 아니라 산수화, 화조영모화 등 모든 분야에서 특출한 화가였다는 평가가 명확한 것이다.<김홍도 풍속화: 신화 탄생의 궤적을 따라, 김소연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신윤복-미인도, 비단에 채색, 113.9×45.6㎝,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신윤복-미인도, 비단에 채색, 113.9×45.6㎝,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미술문화재단.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신윤복 미인도‥제작시기엔 감계의 목적

신윤복이 ‘미인도’를 제작했던 시기의 미인도는 감계(鑑戒)의 목적을 가지고 문인들에 의해 은밀히 감상되며 수장되어 전해지는 완상물이었다. 이는 ‘미인도’가 그리진 18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 해외전시에 출품되기까기 약 200여 년간의 기록이 부재했던 이유를 방증한다.

이처럼 미인도는 문방이라는 사적 공간에서 개인적으로 소장되고 감상되며 지인들에게 회람되던 그림이었다.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이 1930년대에 ‘미인도’를 구입한 이후에도 소장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이나, 지인에게만 열람을 허락한 보화각에 진열해 개인적으로 완상한 것은 이러한 감상 방식의 연장으로 보인다.<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김지혜 건국대학교 강사>

 

까치호랑이, 조선후기, 종이에 채색, 93×60㎝, 가나문화재단 소장. 사진=권동철
까치호랑이, 조선후기, 종이에 채색, 93×60㎝, 가나문화재단 소장. 사진=권동철

◇까치호랑이‥대중적으로 흥행

민화의 여러 화제들 가운데 대중적으로 흥행했던 주제로는 까치호랑이, 책거리, 화조화, 십장생 등을 들 수 있다. 까치호랑이의 초기 도상은 의외로 도자기에서 볼 수 있다. 예컨대 일본에 있는 조선 후기의 ‘백자청화호작문호(白磁靑畵虎鵲文壺)’의 경우, 도자사 전공자들에 의하면 제작 시기는 18세기 말로 편년된다고 한다. 도자기 표면에는 까치와 호랑이가 그려져 있지만, 그 뒷면에는 의외로 사자와 까치가 등장한다.

민화 까치호랑이는 대부분 19세기 이후의 그림이지만, 초기 단계에는 호랑이와 사자가 함께 시각화되었던 여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까치와 조합된 것은 호랑이로 단일화되었다. 호랑이의 상징과 표상이 훨씬 대중적 요소를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민화의 전통과 조형 세계,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천경자-탱고가 흐르는 황혼, 1978, 종이에 채색, 46.5×42.5㎝, 개인소장. 사진=권동철
천경자-탱고가 흐르는 황혼, 1978, 종이에 채색, 46.5×42.5㎝, 개인소장. 사진=권동철

◇천경자‥화려한 슬픔 여성적 자의식

천경자(千鏡子, 1924~2015)화가의 ‘탱고가 흐르는 황혼’에서는 노란색 눈동자와 머리카락에서 서구적 풍모를 지닌 여인이 담배를 피워 입에 문 모습을 프로필로 그렸다. 파란색 장미는 여인의 가슴에 꽂혀 있고, 노랑색 장미 한 송이와 뱀처럼 똬리를 튼 연기가 배경을 채운다.

천경자는 단독상의 젊은 여인을 많이 그렸는데, ‘화려한 슬픔’이라는 역설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여성적 자의식의 세계를 똑바로 마주하는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도 니코틴의 몽환에 잠시나마 위안을 받는 순간을 담담하게 묘사했다. <현대의 미인도 그 가능성에 대해서, 조인수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

 

(왼쪽)김기창-무녀도, 1968, 종이에 채색, 117×81.5㎝,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오른쪽)이화자-달밤, 1995, 종이에 채색, 145.5×97㎝, 개인소장. 사진=권동철
(왼쪽)김기창-무녀도, 1968, 종이에 채색, 117×81.5㎝,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오른쪽)이화자-달밤, 1995, 종이에 채색, 145.5×97㎝, 개인소장. 사진=권동철

◇채색화‥1980년대의 시대의식

1980년대는 국제교류전이 활발하게 개최되고, 화가들의 해외 전람회, 국제비엔날레 참여가 빈번해 지면서 화단의 다양성이 증대되었다.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해외 견문을 쌓고 세계 미술의 흐름 속에서 한국미술의 정체성과 방향을 고민하는 과제가 피부로 다가왔다.

채색화단의 부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1984년 문예진흥원에서 열린 ‘박생광’전을 들 수 있다. 박생광(朴生光, 1904~1985)은 생애 말년에 채색화는 일본적이라는 오랜 편견을 잠식시키고, 한국적 채색화의 진일보를 이루며 예술적 완성을 보여주었다. 1981년 백상기념관 개인전에서 보여준 불교와 무속, 민화에서 가져온 소재를 단청 안료와 아교, 먹을 배합한 불화 기법을 활용해 역동적이고 강렬한 채색화의 새 세계를 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예술은 없다. 모든 민족예술은 그 민족 전통 위에 있다.”라는 말은 박생광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철학이자 1980년대의 시대의식을 보여준다. <전통에 색 입힌 근현대 채색화 부흥, 강민기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외래교수>

권동철 미술전문기자
권동철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