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한국시리즈에서 관중들과 함께 SK와이번스를 응원하는 최태원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지난 2000년 LG트윈스의 전지훈련장을 방문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면 백지수표를 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LG그룹뿐만이 아니라 삼성그룹은 2002년 이후 우승의 한을 풀기 위해 이건희 회장이 직접 김응용 당시 해태타이거즈 감독의 영입을 지시하기도 했다.

또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1999년 창단 후 첫 우승을 차지하자 선수들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재벌 총수들은 왜 이토록 야구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삼성그룹의 한 임원은 “대부분의 재벌 총수들이 프로야구가 성행한 미국과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한 것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임원에 따르면 “이건희 전 회장의 경우 일본 유학 시절 프로야구를 보며 객지에서의 외로움을 달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며 “젊은 시절 객지에서 큰 위안이 된 경험이 야구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국내의 재벌 총수들이 야구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로 “상대 분석과 작전이 많고 선수와 팀의 실적이 데이터로 남는 야구라는 스포츠의 특성이 CEO들과 잘 맞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는 이도 있다.

이에 대해 한 일간지의 야구담당 기자는 “상황에 따른 다양한 작전이 나오고 이를 분석해 가며 관람이 가능한 야구라는 스포츠의 특성이 CEO들과 어울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야구·골프·럭비’ 삼성 3대 스포츠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1993년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신(新)경영을 선언한 후 야구, 럭비, 골프를 ‘삼성의 3대 스포츠’로 지정했을 정도로 야구를 아낀다.

젊은 시절 일본 유학 때부터 야구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이 전 회장은 프로야구단 삼성라이온즈의 창단에도 깊이 관여해 초대 구단주를 맡기도 했다.

삼성라이온즈 구단에 따르면 이건희 구단주는 초창기 선진 야구기술의 접목과 어린이 등 아마야구 저변 확대도 직접 지시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삼성은 초·중·고 야구대회를 개최해 홈런왕 이승엽, 에이스 투수 배영수 등 꿈나무를 발굴했다.

또 호화 군단이라는 찬사에도 불구하고 1985년 반쪽 우승(한국시리즈 없이 전후기 리그 모두 우승)을 제외하고는 무관에 머물렀던 삼성라이온즈가 2000년대 들어서 세 번(2002, 2005, 2006년) 이나 우승을 하게 된 것도 이건희 회장의 과감한 투자와 S급 인재 영입전략 덕분이었다.

2004년 감독 출신 구단 CEO로 처음 발탁된 김응룡 삼성라이온즈 사장은 취임 당시 “내가 사장이 될 수 있도록 이건희 회장이 직접 낙점하고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같은 이건희 회장의 야구사랑은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이 전무는 국내에 있을 때면 틈날 때마다 야구장을 찾아 삼성라이온즈를 응원하곤 한다.

수시로 야구장 찾는 구본무·본능·본준 3형제
재계에서 LG그룹 오너들의 야구사랑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맏형인 구본무 LG그룹 회장을 비롯해 둘째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 막내인 구본준 LG상사 부회장이 모두 지극한 야구사랑으로 유명하다.

구본무 회장을 비롯한 3형제는 시간이 나면 수시로 야구장을 찾고 직접 경기장에 못 갈 경우에는 야구중계를 챙겨본다고 한다. 이 때문에 LG그룹의 사장단 회의는 ‘전날 열린 야구 이야기로 시작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지난 1990년 LG트윈스를 창단할 당시 그룹 부회장으로 초대 구단주를 맡았던 구본무 회장의 경우 창단 이후 지난 2000년까지 오키나와 전지훈련 캠프를 찾아 선수단을 격려하는 등 야구단 업무도 손수 챙길 정도이다.

지금도 구 회장은 해마다 경남 진주 단목리 생가에서 선수단 전체가 모이는 ‘단목행사’를 직접 주재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큰형인 구본무 회장을 대신해 구단주 대행을 맡고 있는 구본준 LG상사 부회장도 소문난 야구광. 야구명문 경남고 출신인 그는 지금도 사회인 야구를 즐길 정도로 야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구 부회장은 요즘도 잠실구장에서 LG트윈스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직접 경기장을 찾아 자리를 뜨지 않고 경기를 관전한다. 경기가 끝나면 승패에 관계없이 더그아웃으로 내려가 선수들을 찾아 일일이 격려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구본무 회장의 둘째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도 야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다.

자신이 보유한 12만장의 야구 관련 소장 사진 가운데 800여점의 사진을 추려 《사진으로 보는 한국야구》라는 책을 발간했다. 지난 2006년 말에는 원로 야구인의 모임인 일구회로부터 최고 영예인 ‘일구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서울 경기 꼭 관람하는 박용곤 명예회장
LG트윈스와 잠실구장을 함께 사용하는 ‘서울 라이벌’ 두산베어스를 운영하는 두산그룹 오너 일가들의 야구 사랑도 LG그룹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특히 박용곤 두산그룹 명예회장의 야구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규 시즌이 시작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서울 경기는 빼놓지 않고 관람할 정도이다.

두산 관계자는 “서울 경기는 거의 빼놓지 않고 관람할 정도로 박 명예회장의 야구사랑은 정말 남다르다”며 “정규 시즌 120경기 중 평균 60여경기는 관람한다”고 말했다.

박 명예회장은 그룹 회장에 오른 다음 해인 1983년 직접 나서 두산베어스의 창단을 주도했으며, 외환위기 전후 그룹이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나섰을 때에도 프로야구단의 매각만은 막았을 정도로 야구에 대한 사랑이 깊다.

두산이 유달리 젊은 선수들의 활약에 힘입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박 명예회장 덕분이다. 두산은 신인선수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입단 계약 후 명예회장실을 찾는데, 주요 신인들의 고교 시절 성적을 꿰뚫고 있는 박 명예회장의 관심 어린 한마디에 어린 선수들은 뜻하지 않은 감동을 받는다고 한다.

현재 두산베어스는 박 명예회장의 장남인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이 구단주를 맡고 있는데 박 회장 역시 수시로 야구장을 찾아 야구 경기를 관람하는 한편 올해 초에는 김경문 두산 감독의 승용차를 직접 바꿔주었을 정도로 야구단에 대한 애정이 깊다.

신동빈 부회장, 한·일 프로야구 다리 역할
국내 프로스포츠팀 중에서 최고의 관중 동원력을 자랑하는 인기구단인 롯데자이언츠를 운영하는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과 신동빈 부회장의 야구사랑도 상당하다.

특히 롯데그룹은 국내와 일본에서 함께 사업을 하는 그룹의 특성 덕분에 1980년대 일본의 선진 야구문화를 국내에 접목하는 데 앞장섰다.

롯데자이언츠의 초대 구단주인 신격호 회장은 1984년 삼성 이만수와 타율 1리 차로 타격왕을 겨뤘던 홍문종을 영입해 재일동포 야구선수들이 한국 프로야구로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현재 신 회장에 이어 구단주를 맡고 있는 신동빈 부회장 역시 한·일 프로야구의 교류에 앞장서고 있다.

신 부회장은 자신이 구단주 대행을 겸임하고 있는 일본 프로야구팀 지바롯데마린스에 국내의 대표적 홈런 타자 이승엽을 영입해 2005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수입만이 아닌 수출로도 재미를 본 셈이다.

이수빈 삼성라이온즈 구단주와 함께 야구장을 찾은 삼성전자 이재용 전무(좌).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은 이승엽 선수의 일본진출 길을 열어줬다.


뒤늦게 시작된 최태원 회장의 야구사랑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는 기업 중 가장 늦은 2000년에 프로야구에 뛰어들었지만 야구에 대한 애정은 결코 다른 재벌 총수에 뒤지지 않는다.

최 회장은 2000년 프로야구단 SK와이번스를 창단한 후 회사안팎의 야구장을 찾지 않다가 2007년 한국시리즈 당시 처음 야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두산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 1, 2차전을 연달아 져 사기가 꺾인 3차전 경기에서 최 회장은 VIP석이 아닌 SK 응원석에서 직집 응원을 진두지휘하며 선수단의 사기를 끌어올려 눈길을 끌었다.

최 회장의 진두지휘에 힘을 냈는지 SK와이번스는 결국 2007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2007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우승을 차지해 한국 프로야구 2연속 우승이라는 위업을 쌓았다.

2007년 SK와이번스의 우승 이후 최 회장의 야구사랑은 더욱 깊어져 SK텔레콤, SK네트웍스 등 모든 계열사에 직장인 야구팀을 만들어 매년 SK그룹 리그를 벌일 정도로 야구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한화이글스의 ‘큰형’, 김승연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야구사랑도 유명하다. 특히 평소 화끈하고 선 굵은 승부사적 기질을 보여온 김 회장은 야구단에 대한 애정 표현도 화끈하다고 한다.

다른 기업보다 늦게 프로야구에 뛰어들어 1999년 한국시리즈에서 처음 우승했을 당시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던 김 회장은 요즘도 선수단과 자주 식사자리를 갖는다고 한다.

또 김 회장은 프로야구 최고령 투수인 송진우 선수에게 그룹 계열사 주식을 나눠준 일도 있다. 이 밖에도 김 회장은 7년여 동안 한화에서 뛰었던 투수 진정필 선수가 은퇴 후 백혈병으로 투병하자 수술비 전액을 지원하기도 했다.

이형구 기자 lhg0544@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