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서울 시내 한 은행에 업무시간 변경을 알리는 표지판이 붙어있다.

(가운데)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34개 기관 노사가 조인식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아래)서울 시내 한 은행에서 여행원이 자통법 이후 달라진 펀드가입절차를 설명하고 있다.

김소연(가명·25) 씨는 우리은행 3년차 행원이다. 그녀는 요즘 매일 전쟁 중이다. ‘만능통장’으로 널리 알려진 청약저축통장이 골칫거리다. 판매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통장 판매 목표치를 채우느라 동문들에게 전화도 돌리고, 친척들에게 읍소도 하다 보면 어느새 파김치가 되기 일쑤다.

지난 20일은 가정의 날이었다. 오후 6시30분 이전에 퇴근해 오랜만에 같은 대학을 나온 직장 선후배들을 만나 신세한탄을 주고받으면서 모처럼 은행 생활의 스트레스를 씻어버릴 수 있었다. 동병상련이다.

그녀가 재작년 서울시내 중위권 대학을 졸업하고 시중은행 입사에 성공하자, 친구들을 비롯한 주변에서 온통 부러움의 시선이 가득했다.

졸업을 1년가량 앞두고 은행권에 입사한 동아리 선배들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입행의 노하우를 전수받은 덕분이었지만, 요즘 같아서는 선택을 되돌리고만 싶다. “마치 총알받이가 된 느낌”이라고 그녀는 토로한다.

그녀는 요즘 은행원들의 자화상이다. “사무실에 있는 시계를 바라볼 여유조차 잃어버렸습니다….” 5년차 은행원인 김일환(가명·35) 씨는 지난주 수요일 부인과 모처럼 저녁을 함께 했다.

시중은행 영업점들은 총성 없는 전쟁터다. 영업점 창구 직원들은 펀드 상품을 하나 판매하기 위해 때로 한 시간씩 고객과 씨름을 한다는 게 김 씨의 설명이다. 파김치가 되고도 주말에는 다시 학원에 나가 펀드 관련 자격증을 준비하는 직원들이 적지 않다.

출근시간이 30분 앞당겨진 것도 적지 않은 부담거리다. 하지만 퇴근 시간은 아직도 과거와 달라진 게 없어 업무 부담이 가중된 동료 행원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게 김 씨의 전언이다. 근무시간 정상화는 올해 은행권 임금 단체 협상의 주요 현안이기도 하다.

국내 은행들은 지난해 원·달러 환율이 치솟는 금융위기에 불을 붙인 방화범으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부동산 대출 부문이 뜨자 달러를 들여와 국내에서 과잉 대출 경쟁을 벌이다 금융위기의 유탄을 맞고 한국경제를 휘청이게 했다는 비판이 골자였다. 하지만 그는 은행원들도 피해자라고 강변한다.

실적 경쟁에 내몰린 은행원들 중에는 자기 돈으로 펀드 상품을 구입했다 손실폭이 눈덩이처럼 커지자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병만 키우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귀띔을 한다.

그러면서도 행내 동문회나 휴식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여전히 ‘KPI(은행 성과지표)’를 화제에 올리는 것이 요즘 은행원들의 현주소이다.

그는 실적 경쟁에 내몰리는 서로의 고충을 속속들이 알다 보니 이른바 직장 커플들이 앞으로는 더 많이 나올 것 같다며 “수수한 용모의 여직원이 예뻐 보이는 순간을 조심하라”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언제 정권이 바뀌었는지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말단 은행원이 어디에서 정권 교체를 느끼겠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의 넋두리 속에서 현 정부의 금융정책에 대한 불만을 엿볼 수 있었다.

“보수적인 시중은행들이 이른바 녹색상품을 일제히 출시했지만, 아직까지 수익성을 담보하기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정부 영향력하에 있는 은행들이 현정부와 코드 맞추기에 나섰다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입니다.”

시중은행 노조간부로 근무하는 송형일(가명·40) 씨는 녹색상품 출시 붐에서 노 전 대통령의 뇌물 수수 스캔들로 뭇매를 맞고 있는 참여정부 시대의 종언을 읽는다.

지구촌의 위기에서 성장의 기회를 포착한다는 발상의 전환은 MB정부의 성장 철학이다. 문제는 시장성이다.

“금융지주사 회장이 왜 부실 주범이냐”
국내 굴뚝기업들은 이 분야 시장 진입이 다소 늦은 편이다. 소문은 무성한데 아직 실체가 없는 형국이다. 태양광이나 LED 부문에서 급성장하고 있는 기업들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며 일각에서는 회의론도 대두되고 있다.

지난 2000년대 중반 일찌감치 에너지 고효율 제품이나 솔루션을 출시하면서 시장을 선점해 온 GE 등 글로벌 기업들은 비행기 엔진이나 LED, 터빈 등 자사 제품에 녹색을 입히며 이 분야에서 막대한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은행가의 녹색상품은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송 씨는 소속 금융지주사 회장이 은행 부실의 주범인 양 손가락질을 받는 것도 사실 납득하기 어렵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우리은행에 근무하며 서브 프라임 파생상품에 투자하는 등 공격적인 행보로 위기의 씨앗을 뿌렸다는 것이 이러한 비판의 골자이지만, 이 파생상품이 수년 뒤 글로벌 금융위기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내다본 이들은 당시만 해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의 긴 터널을 거치면서 은행 최고경영자의 평가 잣대는 철저히 ‘성과’에 방점을 찍었으며, 경기확장기에 공세적인 전략을 펼친 것은 당시 상황논리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거리낌 없이 활동하는 정보기관 직원들
그는 ‘은행은 금융기관이 아니라 금융회사’라고 공언한 현 대통령이 왜 이런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건지 납득하기 어렵다고도 했다. 송 씨는 MB 시대의 도래를 색다른 시각에서 분석하기도 했다.

바로 정보기관 직원들의 활동 양태다.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정부기관원들의 정보 수집 형태가 전 정권과는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은행에 출입하는 이들은 과거에는 조심스럽게 활동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만, 현 정부 들어서는 정보 수집활동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는 요즘이 마치 2차 대전에서 패하고 사회대립이 극으로 치닫던 바이마르공화국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고 토로한다.

경쟁사 회장이 고초를 겪고 있는 것도 정권의 교체를 깨닫게 하는 풍향계가 아니겠냐고 반문한다.

여의도는 비만 오면 물속에 잠겨 한때는 버린 땅 취급을 받던 불모지였다.
오죽했으면 ‘여의도(汝矣島)’라는 이름이 ‘너나 가져라’는 뜻으로 풀이될까. 하지만 이 섬은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금융타운으로 성장했다.

섬을 둘러싼 한강 물이 재물이 다른 지역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준다는 타고난 풍수지리 명당이 바로 여의도라는 게 풍수가들의 설명이다.

돈이 움직이는 땅 여의도에는 요즘, 대선캠프에 참여하거나 대한민국호의 최고경영자와 지연·학연이 있는 금융권 인사들의 수뇌부 입성이 줄을 잇고 있다.

여의도에는 최근 MB정부 출범 후 세 번째로 대선 캠프 출신 증권사 최고경영자가 등장했다. 임기를 1년 정도 남겨둔 일부 경영자들의 자발적 사퇴도 줄을 잇고 있다.

“은행원들은 요즘 전 정권에 비해 고압적이면서도 교묘한 신 정부의 등장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노조원인 송 씨가 인터뷰 말미에 털어 놓은 속내다.

박영환 기자 blad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