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을 배경으로 한 여인이 대청마루에 앉아 있다. 잘 빗어 넘긴 머리카락, 그 아래에 드러난 볼록한 이마, 날선 콧날. 이미 넘어가고 있는 해는 새하얀 얼굴에 부드러운 음영을 남겨 놓았다. 맞은편에 앉은 한 사내가 여인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마에 드리워진 잔 머리 한 올까지 빠뜨리지 않고 정성을 기한다. 완성된 그림은 여인 의 형상뿐만 아니라 당시 심상까지 담고 있다. 전신사조(傳神寫照) 개념의 사실주의 초상화다. 우리는 한때 이를 ‘사진’이라고 불렀다.

“모르셨죠? 이게 우리사진의 시초예요.” 북촌에서 마주한 김현식 흑백인상사진관 대표가 말했다. 흑백인상사진관은 설명 속에 등장한 한옥과 마루, 그리고 해가 질 무렵의 빛을 그대로 재현해 낸 사진관이다.

사진을 전공한 김 대표는 20년 넘게 카메라를 만졌다. 그러다 문득 사진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싶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사진용어는거의 일본어였다. 그러던1989년, 해외여행자율화가 되면서서서히 서양문화를 입었다. 김대표는 ‘그렇다면 우리만의 사진은뭔가’하는 질문에서 ‘우리 또한 고유의 ‘이미지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답을 얻어냈다. 김 대표는 “일본과 서양의 그늘을 걷어내니 정체성이 보였다”고했다. 2000년도초반까지만 해도 필름은 흔했다. 허나 후반 인쇄공정에서 수지가 맞지 않자 급속도로 사라졌다. 이제 필름은 역사의 뒤안길로자취를 감추는 듯하다. “ 덤덤해요. 자연스러운 변화니까요. 그런데 무턱대고사장시키는 건 잘못된거죠. 제가 아는 만큼이라도 말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사진관을 차렸죠.”

그렇다면 왜 하필 ‘흑백’일까. 흑백사진은 시간을 담아 낸다. 10년 전 내 얼굴이 담긴 흑백사진을 보면, 당시 내 모습과 10년의 세월을 모두느낄수있다. “나와 나이를 함께 드는것”이 김대표가 말하는 흑백사진의 매력이다.

흑백인상사진관에서는 오로지 아날로그기법으로 사진을 찍는다. 이 같은 사진관은 국내는 물론 일본까지 포함했을 때도유일하다. “사진관을 ‘복원’했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일제시대 때 사진관이 가장 처음 생긴 게 북촌이기도 하고요.”

오픈2년여. 가장 기억에 남는고객이 누구냐고 물었다. “사진의 본질은‘기록’입니다. 유방암  때문에 가슴 절개술을 받기 직전 마지막으로가슴사진을 남기겠다는 고객이 있었어요. 자신을 기록하기 위 해 찾아온 거죠. 이래서 사진관은 있어야 되는구나 싶었어요.”

오픈 전에는 걸림돌도 있었다. 필름 사진의 경우, 원판에다 연필로 이미지를 수정한다. 이를 전문적으로 하는 ‘필름수정사’를 찾을 때였다. 전국 방방곡곡 수소문 끝에 찾아냈다. 팔순의 노인이었다. 그는“그 일을 요즘 누가하느냐”고 했다. 필름수정작업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은 아니기 때문에 큰일은 아니었다. 우여곡절 끝에오픈을 했는데 초반에는 찾는 사람이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흥밋거리가 되긴 했지만 그 호기심이 ‘직접찍어보겠다’는결심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년 남짓 한자리에서 터를 잡아가자 서서히 반응이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3개월 전부터는 사정이 나아졌단다.

김 대표는 앞으로도 흑백사진관을 고집할 거라고 했다. 그는“사진관을 운영하며 사진 트렌드의 기준을 ‘한국적인시각’으로 바꿔놓는 게 가장 큰 목표”라고언급했다. “당분간은 계속 있을 거예요. 임대살이라 계속 북촌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딘가에는 이 사진관 을찾아볼수있을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