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에서 기대보다 호전된 지표들이 나오면서 투자심리가 살아났지만 진짜 반등의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사람들이 앞서가고 있다

《불황의 경제학》
- 폴 크루그먼 지음
- 안진환 옮김
- 세종서적 펴냄
- 1만4000원

최근 코스피지수와 원·달러 환율을 보면 지난해 가을부터 나온 세계 경제에 대한 우려가 괜한 호들갑으로 여겨질 정도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최근 “희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으며,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역시 “경기 하락 속도가 완화되고 있다는 신호를 포착했다”는 말로 이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는 여전히 높다. 희망적 예측은 주로 정부에서 나오고 있는 반면, 학계는 지금의 일시적 회복이 단지 착시 현상에 불과하다며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러한 주장의 중심에는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교수가 있다.
정부 또는 시장참여자들이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경기 사이클을 길들일 수 있다는 낙관론이야말로 오늘의 재앙을 불러온 화근이라고 크루그먼은 말한다. 그리고 그 불씨는 2009년 봄, 미약한 경기회복 조짐이 보이자마자 되살아나고 있다.

크루그먼은 꼭 10년 전인 1999년에 같은 제목의 책 《불황경제학》을 펴내면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제국, 러시아 등을 강타했던 IMF 사태의 원인을 정확히 짚어낸 바 있다.

이번 《불황의 경제학》은 10년 동안 변치 않은 세계 경제의 기본 사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내용을 다시 쓴 것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올 2월 출간되면서 큰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지은이는 책을 통해 현 경제위기의 모든 측면을 샅샅이 파헤쳐 조명하고 있다. 사실 그는 다른 경제학자들이 쉽게 놓치는 경기후퇴의 이면까지도 손바닥 보듯 하는 불황 전문가다.

그래서 한때는 ‘불황전도사’, ‘우울한 경제학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불황이 경제의 근본적인 강점이나 약점과는 거의 혹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말한다. 튼튼한 경제에서도 얼마든지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경제학자와 정책 입안자들은 우리가 불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비즈니스 사이클을 길들일 수 있다면 불황도 없을 거라고 속단한 것이다.

폴 크루그먼은 “대공황이 우리 할아버지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준 교훈들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케인스의 오래된 목소리에 다시 한번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1930년대 전 세계를 휩쓸었던 대공황은 성공적으로 치유된 바 있고, 완쾌됐다고 믿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요즘의 경제 상황이 “현대의학에 의해 박멸된 줄 알았던 치명적 병원균이 기존의 모든 항생제에 내성을 지닌 형태로 재출현한 것과 같다”며 “이 전염병이 다시 전 세계를 덮치고 있다”고 진단한다.

말하자면 지금의 ‘반짝 회복’은 이 병원균이 잠복기에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 세계 경제가 여전히 중병 상태라고 그가 단언하는 이유는 이번 병마의 가장 큰 원인인 ‘그림자 금융’에 대한 칼질을 아직 시작도 못했기 때문이다.

크루그먼이 이름 지은 ‘그림자 금융’이란 투자은행이나 신탁회사와 같은 ‘은행인 체’하는 기업들을 말한다. 지난해 큰 파장을 일으키며 파산한 리먼브러더스 등의 회사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투자에 따른 이득은 챙기려 들면서 리스크에 대한 최종 책임은 사회에 떠넘기려는 모럴 해저드의 문제를 지녀왔다.

한동안 이들의 행태는 ‘첨단 금융공학’이라는 칭송까지 받으며 많은 투자자들의 열광을 이끌어냈지만 결과는 지금의 금융위기다.

‘은행인 체’하는 투자은행이나 신탁회사들은 투자에 따른 이득은 챙기려 들면서
리스크에 대한 최종 책임은 사회에 떠넘기려는 행태를 보여왔다.

투자은행들이 천문학적 액수의 수익을 올리는 동안 경제 거품은 계속 커졌고, 전 세계의 금융체계는 취약해져만 갔다.

그림자 금융 체계를 올바로 관리 감독했어야 할 미국 재무부와 FRB도 제 역할을 못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FRB 의장이었던 앨런 그린스펀이 이들을 그냥 방치했다고 비난한다. 정부로서는 이들이 은행이 아니기 때문에 지불 보증의 의무가 없었고, 따라서 충분한 규제를 할 수도 없었다는 점을 이유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폴 크루그먼은 최근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일부에서 기대보다 호전된 지표들이 나오면서 투자심리가 살아났지만 진짜 반등의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며 “사람들이 앞서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세계 경제는 교훈을 배우지 못하고 또다시 실수를 반복할 것인가?

크루그먼은 책에서 “공황은 절대로 오지 않겠지만 불황은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제 불황은 우리의 일상이 될 듯하다. 그래서 그는 “지금 세계가 필요로 하는 것은 대규모 구조작전”이라고 강조한다.

경기부양을 위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액수의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하며, 또 좀비와도 같은 거대 금융기관들은 하루라도 빨리 국유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가 발표한 규모의 구제조치로는 상황이 바뀌기 힘들 것이라고 크루그먼은 예측한다.

어느 정도의 구제책이 나와야 문제의 핵심인 그림자 금융 체계에 도달할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설령 이 구제책이 성공하더라도 이는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한 미봉책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지점에서 크루그먼이 제시하는 해결책이 바로 ‘불황의 경제학’이다. 불황을 무조건 터부시하지 않고 체제 내에서 다루는 경제학이다.

크루그먼은 공급 중심의 경제학, 즉 공급이 넘쳐나는데 세상은 경기 후퇴의 늪에 빠지고 있다는 것에 기존 경제학의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제 경제학의 패러다임은 수요 중심으로 전환할 때라고 말한다. 그리고 경기 회복과 호황을 일으키는 데만 몰두해 왔던 경제학 연구의 초점을, 변방에 버려져 있는 ‘경기후퇴’ 쪽으로 돌려야 한다고 언급한다.

그는 ‘공짜 점심’이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사용할 수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는 자원이 있기 때문에 공짜 점심이 가능하다는 것. ‘공짜 점심’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해 그가 내세우는 것은 잠재적 ‘수요’를 수면 위로 끌어내는 것이다.

잠재적 수요가 현실의 시장으로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막힘 현상을 뚫어주는 것이 불황의 경제학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아시아경제신문 박소연 기자 (mus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