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껏 합천에 여러 번 다녀왔으나 기억의 대부분은 해인사뿐이다. 몇 년 사이에 네댓 번을 해인사만 들렀던 까닭이다.

그러니 머릿속에는 가야산과 해인사, 해인사의 비로자나불뿐이다. 물론 이전에는 여기저기 둘러볼 시간적 여유를 지닌 여행이 아니었기에 그럴 수도 있겠으나 합천 하면 ‘해인사’ 하나에 굳어버린 생각의 문제가 더 클 것이다.

늘 그렇듯 우리는 다양한 방향의 생각을 펼치지 못하고 하나에만 ‘주구장창’ 파고든다. 주변을 살필 겨를조차 가져보지 못한다. 여행뿐만이 아니라 삶에서도 매한가지다. 여유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 곁에 있어도 보이질 않는다.

그래서 여행은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짧고 분주한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빡빡한 삶의 일정에 불과하다.


바람, 철쭉, 산과 사람은 모두 하나
황매산으로 가는 길에는 합천영상테마파크, 합천댐, 바람흔적미술관이 차례대로 있으나 철쭉을 보려는 급한 마음에 순서를 바꿔 황매산 철쭉제가 벌어지는 장소 아래에 있는 바람흔적미술관을 들른다.

같은 이름을 가진 바람흔적미술관은 경상남도에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남해에 있고 다른 하나가 바로 합천 황매산 아래에 있는 것이다.

산아래 아담하게 자리 잡은 합천의 바람흔적미술관은 차 한잔 마시며 야외에 설치된 조형물을 감상해도 좋고 전시실을 둘러보아도 좋다.

그늘 아래 나무벤치에 앉아 바람개비 조형물을 보며 바람의 흔적을 좇는 것도 괜찮겠다. 그늘 속은 시원한데 그늘 밖으로 나오니 30도 가까운 기온 때문인지 바람이 불어도 크게 시원한 줄을 모르겠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바람흔적미술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촬영한 황매산 정상쪽 주차장으로 오른다. 황매산은 가야산에 이어 합천 제2의 명산이며 800m 고지에 전국 최대 규모 철쭉 군락지가 형성되어 있다.

매년 5월 초 황매산 철쭉제가 개최되며 많은 관광객과 등산객이 찾는다고 한다. 등산을 목적으로 온 사람들은 산 아래 마을 초입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오르는 이들도 꽤나 많다.


황매산 정상엔 철쭉과 사람, 바람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황매산은 매우 아름답다. 이따금 나무들이 외로운 얼굴로 서 있을 뿐 철쭉과 억새, 풀과 돌덩이들이 전부이다.

트레킹하기 적합한 조건을 갖춰서 그런지 가벼운 차림으로 트레킹하는 이들이 많다. 어린 아이들부터 나이 지긋한 분들까지 모두들 환한 얼굴로 매끄러운 황매산 등자락을 밟고 다닌다.

폭신한 잔디밭을 걷는 듯 발 아래는 유순하고 부드럽다. 거칠고 저항하는 산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이고 자신의 품에 안는다.

이불 위에 수놓은 꽃처럼 펼쳐진 철쭉들은 아름답고 부드럽다. 철쭉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어느새 사람도 핑크빛 꽃이 되고 바람마저 분홍색으로 변하는 듯하다. 독특한 지형과 풍광을 지닌 황매산은 낯선 이국에 온 듯 황홀하기까지 하다.

지난 시절 고스란히 담은 옛 풍경 속에서
황매산 철쭉을 보고 돌아서 나오는 길에 지나쳤던 합천영상테마파크에 들른다.

2003년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평양시가지 전투 세트장을 제작하여 영화 흥행 후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자 합천군이 본격적으로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CF 등을 촬영하는 영상테마파크로 조성하였다.

2004년 4월 개장하였으며 약 7만5000㎡ 면적에 조성되어 건너편 산등성에서 내려다보면 도시 하나로 보일 정도다.

증기기관차·탱크·장갑차 등이 서 있는 폐허가 된 평양시가지를 비롯하여 전차가 오가는 거리, 조선총독부·헌병대 건물, 경성역·반도호텔·세브란스병원·파고다극장, 책방·목욕탕·이발소·양장점·살롱·찻집 등 1930~40년대 일제강점기의 경성 시가지 모습이 재현되어 있으며, 1960~80년대 서울 소공동 거리도 만들어져 있어 지나간 옛 시절의 모습을 실감나게 느껴볼 수 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모던보이>를 비롯하여 드라마 <서울 1945>, <경성스캔들>, <에덴의 동쪽> 등이 바로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테마파크에 들어서자 전찻길을 지키고 있는 전차가 먼저 반긴다. 이따금 전차가 지나가는 것으로 보아 일정 시간 간격으로 운행되는 모양이다.

몇 십 년 거슬러온 듯 고색창연한 느낌을 지닌 테마파크는 지난 시절에 대한 향수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아주 오래된 골목과 거리를 거닐다 보니 어느새 빛 바랜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지난 풋사랑의 애틋함, 가족의 웃음소리, 저녁밥 짓는 냄새로 가득하던 골목길이 기억의 자물쇠를 풀고서 나온다.

갑자기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진다. 옛 시절의 우리가 저 골목과 거리 위에 서성이는 듯하다.

법고 소리에 차분해지는 마음
빛이 천천히 몸을 눕히기 시작하는 오후가 되자 해인사로 향했다. 오랜만에 간 해인사에 재미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바로 해인도. 해인도 안에는 팔만대장경의 가르침을 30개 시구로서 함축하여 해인도 도안의 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절에서 나눠주는 해인도와 소원을 적은 종이를 합장하고 돌면서 ‘옴 아모카 바이로차나 마하무드라 마니 파드마 즈바라 프라바릍타야 훔’이란 광명진언을 21번, 49번, 혹은 108번을 외우면 무수한 공덕을 성취하고 업장을 소멸하여 바라는 소원을 성취하게 된다고 한다.

미리 시작한 다른 이들을 따라 광명진언을 외며 돌아본다. 마침 한 무리 초등학생들도 작은 손을 합장하고 해인도를 따라 돈다.

이조차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마음과 마음이 해인도 안에서 노니는 느낌이다. 마음 안의 생각들이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돌고 나오자 네 명의 스님이 돌아가며 법고를 울리기 시작한다. 정확히 7시까지 진행된 저녁예불 법고는 흐트러졌던 마음을 바로 세우고 자신을 들여다보게 하여 일깨우는 듯하다. 법고 소리는 언제나 마음에 큰 울림을 준다.

쉬이 들뜨고 흥분하던 마음이 차분해지며 삶을 찬찬히 바라보게 한다. 무릇 깨달음은 이렇듯 가까이에서 쉽게 마주 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해인사를 나와 합천을 벗어나 서울로 향하면서 조금 느리지만 명료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억지로가 아닌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조금 더 의미 있는 삶일 것이리라. 느리지만 투명하고, 고요하지만 명쾌하고, 그대로인 듯하나 능동적으로 변화하는 합천의 모습은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을 얻기에 충분했다. 마음 한 자락 제대로 보고 느낀 듯하니 웰빙 마음여행이라 칭해도 좋겠다.

글·사진 김기연 (hatssal@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