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이코노믹리뷰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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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믹리뷰=박민규 기자] 1년 6개월 가량 미국에서 치열한 '배터리 소송전'을 벌여 온 LG화학(051910)과 SK이노베이션(096770)이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 양 사의 갈등이 K-배터리 불화로 조명되고 있는 만큼 배터리 업계 안팎에서도 첫 결과를 두고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오는 26일(현지 시간)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제기한 배터리 영업 비밀 침해 소송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릴 예정이다.

앞서 LG화학은 지난해 4월 SK이노베이션을 영업 비밀 침해 혐의로 미국 ITC에 제소했다.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의 배터리 사업 관련 핵심 인력을 빼갔으며, 이를 통해 얻은 영업 비밀로 폭스바겐과 포드 등 자동차 업체들의 전기차용 배터리 물량을 수주했다는 주장이다.

4가지 시나리오

ITC의 최종 결정에 대한 시나리오는 크게 네 가지로 꼽힌다.

첫째, 미 ITC가 지난 2월 SK이노베이션에 내린 '조기 패소' 예비 결정을 최종 결정으로 고수해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셀·팩·모듈 및 관련 소재 등에 대한 수입 금지를 조치할 경우다.

SK이노베이션에 있어 최악의 상황이다. SK이노베이션이 현재 미국 조지아주에서 진행하고 있는 21.5기가와트시(GWh) 규모 배터리 공장 건설이 백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SK이노베이션은 해당 사업에만 총 25억달러(약 2조8200억원) 가량을 투입했으며, 향후 조지아주 공장에서 생산할 배터리를 폭스바겐·포드 등에 납품하기로 계약한 것까지 감안하면 손해 비용은 이 이상일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또한 SK이노베이션이 최종 패소에 불복해 즉각 항소하더라도, 항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수출을 재개할 수 없다.

둘째, SK이노베이션의 패소가 최종적으로 결정되더라도 수입 금지 등에 대한 행정 명령으로는 이어지지 않을 경우다. ITC가 현지 일자리 이슈 등 공공 이익을 고려해 공청회를 개최, SK이노베이션의 미국 공장 운영 여부를 추가로 따질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SK이노베이션의 미국 배터리 사업이 당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의견이 우세할 시 SK이노베이션의 조지아주 공장 가동은 가능해질 것으로 점쳐진다. 이와 관련, 폭스바겐·포드 등과 조지아주 당국은 올해 7월 SK이노베이션의 현지 생산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문을 ITC에 제출하기도 했다.

셋째, ITC가 예비 결정에 대한 '수정'을 결론으로 내려 해당 소송을 새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는 SK이노베이션에게 최선인 시나리오로, 여태 LG화학에 유리하게 돌아가던 판도가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양 사의 분위기도 반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할 경우 최종 결정은 6개월 가량 미뤄진다.

ITC가 최종 결정에서 예비 결정을 뒤집은 전례는 없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ITC가 조기 패소 결정에 대한 SK이노베이션의 이의 신청에 만장일치로 해당 소송 재검토를 의결했다는 점에 주목해, 이 같은 가능성에도 힘을 싣고 있다.

마지막으로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ITC가 SK이노베이션의 패소를 확정할 경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에 대한 비토(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현지 고용 시장 위축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 2013년 삼성과 애플의 특허권 침해 소송전 당시 ITC는 삼성의 손을 들어줬으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이를 거부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자국 기업 보호 차원의 조치이며, 해외 기업 간 분쟁에는 적용되기 힘들 것이란 게 업계의 중론이다.

어느 쪽도 승복 못할 패소

당초 지난 5일로 예정됐던 ITC의 최종 결정이 3주 연기되면서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극적인 협상 타결에 대한 기대감이 부상했으나, 합의는 결국 불발탄에 그친 것으로 추측된다.

앞서 양 사 간 협상은 각 사가 제시한 합의금 규모의 간극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으면서 잠정 중단된 것으로 알려졌다. SK이노베이션이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으로 금액을 상향 조정했음에도, LG화학은 애초에 제시한 수조 대에서 타협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모두 미국을 배터리 사업의 핵심 거점 가운데 하나로 삼고 있는 만큼, 패소에 따른 치명타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SK이노베이션의 경우, 조지아주 공장을 수호하기 위한 최근 행보가 미국 사업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8월 미국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 한국인을 불법으로 고용한 의혹으로 현지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던 SK이노베이션은 내년 말까지 1000명 이상의 현지 인력을 채용할 계획을 밝히면서 논란 수습에 나섰다.

또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과 공개적으로 원색적인 비난을 주고 받는 장외 논쟁까지 불사하는 한편, 협상 재개의 문은 지속적으로 열어 두는 모습이다.

최근에는 지동섭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사업 부문 대표가 직접 합의를 타진하는 제스처를 취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지동섭 대표는 지난 21일 열린 국내 최대 규모의 이차 전지 산업 전시회인 '인터배터리 2020'에서 LG화학 부스를 깜짝 방문했으며, LG화학과의 소송전과 관련해 "(양 사가) 빨리 (합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며, (양 사가) 대화를 지속하려 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또 당시 지 대표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 또한 배터리 사업 분사를 검토하고 있으며, '선수주 후증설'이라는 기존 전기차용 배터리 생산 방식에서 탈피해 과감히 '선투자'를 단행할 가능성도 시사됐다.

승소는 LG화학에게도 절실하다.

LG화학은 최근 배터리 사업 분사 추진과 자사의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들의 화재 사고로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모습이다. 일부 주주들과 노조가 전지 부문 분사를 반대하는 상황에서 현대자동차 '코나 EV'와 미국 제너럴모터스(GM) '볼트 EV'의 화재 원인이 LG화학 배터리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해당 전기차들의 화재 원인은 아직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으며, 배터리발 화재라는 분석도 이러한 상황에서 나와 LG화학의 억울함은 커지는 모양새다. LG화학은 적극적으로 반론을 펼치고 있으나, 전기차 화재가 그 자체만으로 배터리 제조사에 치명적인 악재인 만큼 논란 진화는 쉽지 않아 보인다. 배터리 산업이 성장 동력으로 삼는 전기차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투자 불확실성을 키우기 때문이다. 최근 LG화학 주가가 연일 하락세를 거듭하는 모습이 이를 반영한다.

안팎의 여론이 냉담한 가운데, 당초 당연시됐던 승소도 이제는 LG화학에게 절실한 기다림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오는 30일 전지 부문 분사에 대한 이사회의 승인을 앞두고 불확실성 제거 및 여론 돌리기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평가다.

또 LG화학 역시 미국 내 배터리 사업자라는 점에서 승소는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다. LG화학은 GM과 미 오하이오주에 합작 법인을 설립했으며, 차세대 배터리인 '얼티움'을 함께 개발 중이다. 얼티움은 향후 GM의 럭셔리 브랜드 캐딜락이 첫 전기차로 출시하는 '리릭'에 탑재될 것으로 알려졌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 전쟁은 완성차 업체들과 주 정부의 연합 전선으로까지 발전한 양상이다. SK이노베이션이 폭스바겐·포드·조지아주 등을 아군으로 두고 있다면, LG화학은 GM·오하이오주 등과 연맹을 맺고 있는 셈이다. 이번 판결에 따라 현지 평판도 갈리면서 배터리 업체들은 물론 완성차 업체와 주 정부의 전기차 로드맵에도 파장이 일 전망이다. 특히 SK이노베이션이 패소 및 전면 수입 금지 판결을 받을 경우, 폭스바겐과 포드의 전기차 출시는 물론 조지아주의 일자리 로드맵에도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높다.

아울러 LG화학은 현재 120기가와트시(GWh) 수준의 배터리 생산 능력을 2023년 260GWh까지 확대할 계획에 따라 북미 공략을 강화할 방침이다. LG화학은 올해 3분기 경영 실적 발표 콘퍼런스 콜에서는 "급증하는 (전기차용 배터리에 대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과 북미 등에 추가적인 (배터리) 생산 기지를 확보할 예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번 판결이 종전 선언은 아냐

26일부로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전쟁이 종전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판결은 LG화학의 제소에 대한 최종 결정일 뿐,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을 상대로 제기한 배터리 특허 침해 소송에 대한 결과가 남아 있다. 또한 해당 소송에 대한 청문회가 오는 12월 10일부터 11일까지 이틀 동안 화상 회의 방식으로 개최될 예정이다.

잃을 게 많은 싸움이라 어느 한 쪽도 물러설 수 없을 것이라는 강대강 대치가 예상되는 한편, '갈 데 까지 가자'라는 기조가 화해 무드로 급물살 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ITC의 이번 판결로 LG화학의 제소가 마무리되더라도 두 달 간의 유예 기간이 있는 만큼 양 사 간 합의를 다시 한번 기대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LG화학의 승소로 무게 추가 기울어진 상황에서 SK이노베이션도 현실적으로 합의를 1순위 해결책으로 보고 있으리라는 진단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양 사가 한 치 양보 없이 팽팽히 대치하고 있으나, LG화학 또한 배터리 사업을 독립 법인으로 출범시키기에 앞서 리스크 제거가 필요한 바 종전보다 타협적인 자세로 협상에 임할 수 있다는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한편, 이번 주는 'K-배터리'의 분수령이 될 시점으로 꼽힌다. 당장 오는 26일(현지 시간) 미국 ITC의 최종 결정이 발표되는 것 외에도 K-배터리의 향방을 좌우할 척도는 여럿 남았다. 30일(한국 시간)에는 LG화학의 전지 부문 분사에 대한 임시 주주 총회가 열린다. 또 지난주 LG화학에 이어, 이 주에는 삼성SDI와 SK이노베이션 등 국내 배터리 3사의 올해 3분기 실적 발표가 모두 완료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