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선전시는 “지난 18일까지 인민은행과 공동으로 진행한 디지털화폐 시험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발표했다.  출처= SCMP
중국 선전시는 “지난 18일까지 인민은행과 공동으로 진행한 디지털화폐 시험이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발표했다. 출처= SCMP

[이코노믹리뷰=홍석윤 기자] 2020년 2월부터 전세계를 강타하기 시작한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으로 글로벌 경제 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대면 경제 영역이 급속도로 확장되면서 비대면 경제에 걸맞은 결제 수단의 필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이른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CBDC) 발행 논의에도 가속도가 붙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최근 “코로나19 사태 이후 중앙은행들이 CBDC 발행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고 전했다.

코로나가 앞당긴 디지털화폐 시대

최근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코로나19는 우리가 일하고 거래하고 지불하는 방식을 포함해 우리의 삶에 구조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고 지적하고 “바이러스 감염 우려가 있는 접촉식 화폐 대신 보건상 목적으로라도 CBDC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국제결제은행(BIS)도 최근 보고서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이 소액결제용 CBDC 발행을 앞당기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전 세계 각국 중앙은행에게 CBDC 연구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최근 BIS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66개국 중앙은행 가운데 80% 이상이 CBDC 연구에 돌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불과 1년전에 비해 10%포인트 이상 높아졌다.

특히, 3년 내 CBDC를 발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한 중앙은행의 비율은 전년 대비 두 배 높아진 20%에 달했다. 현재 CBDC 발행에 있어 가장 선두에 선 국가는 중국이다.

위안화 패권 속도내는 중국

다른 나라들이 이제 막 디지털 화폐 연구를 시작한 단계인 반면, 중국은 어느덧 공개 테스트까지 진행했다. 중국은 최근 광동성 선전시민 5만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디지털위안 공개 테스트를 완료했다.

중국 인민은행은 이번 실험에서 선전시민 5만명에게 1인당 200위안(3만 4000원)의 디지털위안을 지급하고 18일까지 선전시의 슈퍼마켓, 약국 등 3389개의 가맹점에서 디지털 위안을 직접 사용하도록 했다. 이 테스트는 5만명을 추첨해 진행됐는데, 무려 191만명의 선전주민이 신청하면서 시작 전부터 높은 인기를 끌었다. 사용기한이 지나 남은 디지털위안은 이미 효력이 사라진 상태다.

선전시는 “지난 18일까지 인민은행과 공동으로 진행한 디지털화폐 시험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며 “4만 7573명이 성공적으로 디지털위안을 받아가 총 6만 2788건의 거래가 이뤄졌다”고 공개했다.

중국인들이 이미 스마트폰 간편결제에 익숙하기 때문에 디지털위안도 큰 혼란없이 테스트를 마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국은 인민은행이 발행한 디지털위안을 DCEP(Digital Currency, Electronical Payment)라고 부른다. 알리바바의 알리페이, 텐센트의 위챗페이가 현금과 신용카드 결제 서비스를 대체하고 있지만, DECP는 전자결제가 가능한 모든 상점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반면 알리페이와 위챗페이는 해당 플랫폼 가맹점에서만 이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더 큰 차이는 DECP는 법정통화이기 때문에 은행 계좌 연동이 필요 없다는 점이다.

이더리움 개발사인 콘센시스(ConsenSys)의 찰스 드하우시 이사는 "이번 테스트를 통해 중국이 디지털 화폐를 출시할 완전한 준비가 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오는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디지털위안을 공식 사용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중국은 이번 실험을 바탕으로, 미국 달러에 대항하는 통화체계 구축행보 적극 나설 태세다.

세계는 미국과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이 달러 체계에 맞설 미래형 디지털통화 패권을 잡기 위한 목적이 숨어있다고 보고 있다. 굳건한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직접 흔들기보다는 '디지털 화폐'라는 승부수를 던져 국제 금융질서 재편을 꾀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도이체방크는 보고서를 통해 중국의 디지털 화폐가 미국 달러의 지위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 따르면 국제 지급 거래에서 위안화의 비중은 1.91%에 불과하다. 달러(38.96%), 유로(36.04%), 파운드(6.7%)에 아직은 크게 못 미친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향후 전 세계 기축통화 패권의 가장 큰 변수로 중국의 눈에 띄는 경제성장을 꼽고 있다. 중국은 올해 2% 내외의 경제성장률로 주요국 가운데 유일하게 플러스 성장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됐다. 일부 전문가들은 10여년 안에 중국 국내총생산(GDP)이 미국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중국의 경제 규모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으로 올라서면 전 세계 기축통화 구도에 변화가 올 수 있다는 의미다.

BIS의 조사에 따르면 전세계 중앙은행 66곳 가운데 CBDC 관련 연구를 진행하는 곳은 2018년 70%에서 2019년에는 80%으로 늘었다. 출처= Ledger Insight
BIS의 조사에 따르면 전세계 중앙은행 66곳 가운데 CBDC 관련 연구를 진행하는 곳은 2018년 70%에서 2019년에는 80%으로 늘었다. 출처= Ledger Insight

달러 수성, 신중한 미국

중국과 달리 미국은 디지털화폐 개발에 대해 보다 신중 모드를 보였다.

“디지털 화폐를 첫 번째로 시행하는 것보다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 의장은 지난 19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국제통화기금(IMF) 연차총회에서 디지털 화폐 발행 가능성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그는 “제대로 한다는 것은 디지털 화폐의 잠재적 이익 뿐 아니라 잠재적 위험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라며 “디지털 화폐 발행 시 다른 정책들에 끼칠 영향 등을 고려해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파월 의장은 “디지털 화폐는 잠재적 이익 외에도 정책·운영상 철저히 평가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 또 사이버 공격, 위조, 사기로부터 디지털 화폐를 보호할 필요성도 있다.”고 말하고 “우리는 미국 경제와 결제 시스템에 대한 디지털 화폐의 잠재적 비용과 편익을 신중하고 철저하게 평가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 디지털 화폐를 발행할 것인지 결정하지 않았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파월 의장은 또 “달러화를 믿고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법, 강력하고 투명한 기관, 심층적인 금융시장, 그리고 개방형 자본계좌 덕분”이라며 “건전하고 효율적인 지급결제 시스템은 단순한 기술을 넘어 이러한 기능들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는 기존 통화 시스템을 보완하겠지만 대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달러가 현재 차지하고 있는 ‘기축통화’ 지위는 기술적으로 준비된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신뢰성과 통용성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뜻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파월 의장의 이 같은 인식은 디지털 화폐가 미 달러화의 기축 통화로서의 역할·지위 등에 어떤 파급력을 가질 것인지를 신중하게 분석하고 도입을 결정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2조 달러가 유통되고 있는데, 절반은 미국 이외 지역에서 보유하고 있다.

각국의 움직임

CBDC의 주도권을 중국이 잡으면서 주요 국가들에서도 CBDC 실험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G20은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등 국제금융기구와 함께 CBDC에 대한 국제표준을 수립하겠다는 보고서를 내놓은 바 있다. CBDC에 대한 기술연구를 통해 디지털화폐 설계 뿐 아니라 활용방안, 기존 금융권과 연계방안, 규제 틀 등 글로벌 기준을 마련해 오는 2022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14일 열렸던 G20 재무장관 회의에서 CBDC에 대한 정책 로드맵이 제시되면 중국이 독주하고 있는 디지털화폐 분야에서 다른 나라들도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지만, 당초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회의가 코로나 대유행으로 화상 회의로 전환되고 저소득국 채무상환 유예 등에 초점을 맞추면서 CBDC에 대한 논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미국 연방준비제도(FRB), 캐나다은행(BOC), 유럽중앙은행(ECB), 영국은행(BOE), 스위스국립은행(SNB), 스웨덴 중앙은행인 릭스방크, 일본중앙은행(BOJ)까지 주요7개국(G7) 중앙은행들이 BIS를 통해 발표한 보고서에도 CBDC 관련 주요 요구사항과 CBDC의 타당성 평가가 담겨 있다.

보고서는 CBDC 시스템이 기존 금융 시스템과 연계돼야 하며, 사이버 공격과 정전으로부터 안전해야 한다고 전했다. 또 중앙은행의 규제와 모니터링을 준수해야 한다고 했다.

보고서는 또 현금 및 기타 유형의 화폐와 공존, 통화 및 금융 시장의 안정에 해를 끼치지 않을 것, 혁신과 효율성 촉진이라는 'CBDC의 3대 핵심 원칙'을 강조했다.

BIS의 조사에 따르면 전세계 중앙은행 66곳 가운데 CBDC 관련 연구를 진행하는 곳은 2018년 70%에서 2019년에는 80%으로 늘었다. BIS는 "오는 2026년까지 각국 중앙은행의 20%가 CBDC를 발행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장 유럽은 지난 9월 ‘디지털유로’의 상표등록을 출원한 데 이어 내년 중에 도입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방침이다. 라 가르드 ECB 총재는 “현금이 왕이던 독일·이탈리아 같은 나라들에서도 디지털결제가 크게 늘었다”며 “디지털유로 발행을 매우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싱크탱크 아틀란틱 카운실은 “유럽이 CBDC 발행을 통한 결제시스템 통합을 완성함으로써 기축 통화로서의 위상을 유지·강화하려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은행도 ‘디지털 엔화’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국제금융협회(IIF) 연례 총회에서 “내년 봄부터 실험을 시작할 것”이라며 구체적인 스케줄까지 내놓았다.

러시아도 CBDC 시장을 선점, 국제적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디지털 루블’ 발행을 위한 본격적은 검토작업에 착수했다. 러시아 연방중앙은행은 오는 2021년 실험용 디지털 루블화를 공개하고, 이후 복리후생비나 급여 등에 디지털 루블화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한국은행도 디지털화폐 설계 및 요건 정의와 구현기술 검토를 포함한 'CBDC 기반업무'를 완료하고 오는 2021년 CBDC 파일럿(시범) 시스템 출시를 목표로 현재 외부 컨설팅을 받고 있다. 내년부터는 컨설팅 결과를 바탕으로 실험유통 시스템을 구축해 유통실험에 나선다는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