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가·국제수지흑자 등 각종 지표의 호전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업들은 경제가 아직 바닥을 통과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있었다. 사진은 부산항에서 선적을 기다리는 컨테이너들.


‘본격적인 경기회복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최근의 주가상승과 인파로 북적이는 몇몇 아파트 분양 현장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지난해 10월24일 938.75까지 추락했던 종합주가지수는 지난 5월11일에는 1415.16까지 치솟았다.

또 최근 서울 시내와 인천 청라지구에서 분양을 한 아파트들은 수십대 일의 경쟁률을 기록하며 분양이 완료되기도 했다.

게다가 지난달 발표된 주요기업들의 1분기 실적은 이런 기대감을 더욱 부풀게 한다. 대규모 적자가 날 것으로 예상됐던 삼성전자가 오히려 흑자전환하고, LG전자와 SK에너지 등도 시장의 기대치를 뛰어넘는 깜짝 실적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1월 전년 동기 대비 34.2%나 폭락하며 공포감을 조성했던 수출도 점차 급락세가 진정되고 있다. 3월과 4월엔 오히려 무역수지가 사상 최대 흑자를 기록, 경기회복론에 힘을 보태줬다.

그러나 이 같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경기회복은 아직 멀었다는 것이 실물경제 현장에서 뛰는 주요기업들의 판단이었다.

<이코노믹 리뷰>가 20대 주요그룹의 경영기획 담당 임원들을 상대로 경기 전망에 대해 조사한 결과 기업들은 경기가 아직 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올해 안에 경기회복 힘들어”
우선 국내 경기가 바닥을 지났는가를 묻는 질문에 조사대상 기업 중 절반이 넘는 12개 기업이 ‘현재 경기가 바닥이고 당분간 현재와 같은 상태가 지속될 것’이라고 응답했으며, ‘아직 바닥이 오지 않았고 더 나빠질 것’으로 보는 기업도 6개나 됐다.

반면 경기가 현재 바닥을 지나 회복 중이라는 의견을 내놓은 기업은 2개에 불과했다.
해외의 경기에 대한 기업들의 의견은 더욱 비관적이어서 바닥을 지나 회복 중이라는 기업은 단 1개 기업에 불과했다.

나머지 기업들은 모두 ‘현재가 바닥이고 이 상태가 당분간 지속될 것’(13개)이라고 답하거나, ‘상황이 더 악화될 것’(6개)으로 전망했다.

이에 대해 A그룹 경영기획실의 한 임원은 “지금 세계 경기는 각국 정부가 나서서 간신히 금융시장의 붕괴만 막아놓은 상태”라며 “금융위기 이후 많은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실물경기 침체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이 같은 기업의 경기인식은 “세계 경제가 당분간 L자형 침체를 이어갈 것”이라는 대다수 전문가들의 의견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기업들의 경기에 대한 비관적인 인식은 경기회복 시점을 묻는 질문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는데 참여 기업들 가운데 올해 안에 본격적인 경기회복이 시작될 것으로 보는 기업은 단 한 군데도 없었으며, 2010년 상반기가 지나야 경기회복이 시작될 것으로 전망한 기업이 8개로 가장 많았다.

이어서 2009년 하반기 이후에나 경기회복이 시작될 것이라고 응답한 기업과 2010년 하반기 이후에 경기회복이 시작될 것이라고 응답한 기업이 각각 5개였다.


“1분기 실적은 환율 덕”
그렇다면 3~4월에 수출 급락세가 진정되고 무역수지가 사상 최대 흑자를 기록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난달 무역수지 흑자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에 20개 기업 중 12개 기업이 ‘환율하락으로 인해 한국 상품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응답했으며, 5개 기업이 ‘환율하락과 국내 경기침체로 인해 수입이 감소해 발생한 흑자’라고 응답했다.

즉 20대 기업 중 절대다수의 기업들이 3~4월 우리 경제가 무역흑자를 기록한 배경에 대해 한국 경제나 기업의 체질이 바뀌었다기보다 환율요인이 큰 것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지난 3~4월 무역수지 흑자가 큰 폭으로 늘어난 것에 대해 국내 실물경기 침체가 가속화되는 불길한 징조로 보는 기업도 있었다.

이에 대해 H그룹의 경영기획실 임원은 “지난 3~4월 흑자는 수입 감소가 주요인이 된 전형적인 불황형 흑자”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4월 수출실적은 지난해 4월에 비해 19%나 감소했는데도 수입이 35%나 줄어 흑자 폭이 늘어났다.

한편 기업들은 올해 하반기 원·달러 환율 전망을 묻는 질문에 20개 기업 중 절반이 넘는 11개 기업이 하반기 환율이 달러당 1200원대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또 6개 기업이 올 하반기 환율을 달러 당 1100원대로 전망했다. 반면 환율이 달러당 1300원을 넘어설 것이라고 전망한 기업은 1개에 불과해 대부분의 기업이 환율이 달러당 1200원대에서 안정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와 관련해 원동현 국제무역연구원 연구위원은 “문제는 환율수준이 아니라 환율의 변동폭”이라며 “달러화의 약세 분위기속에서 한국에 대한 외국인의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지만 세계경제는 아직 회복되지 못한 상태에서 약간의 충격에도 달러화에 대한 수요, 공급이 한쪽 방향으로 몰릴 가능성이 있는데다 이를 수용하기에는 아직 한국의 외환시장이 크지 않아 앞으로 달러화의 변동폭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따라서 기업들은 환율 변동 수준에 따라 여러 시나리오를 상정해놓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원 연구위원의 지적이다.

한편 우리 경제의 중요한 변수인 원유가격의 경우 20대 그룹 중 절반 이상인 12개 기업이 배럴당 60~80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으며 5개 기업은 유가가 40~60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에 대해 이규복 금융연구원 연구원은 “석유산유국들의 감산에 따른 공급조절, 2010년 하반기 중 경기 회복 조짐의 가시화 가능성으로 인해 국제 유가는 상반기를 저점으로 하반기에는 소폭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석유를 제외한 원자재 가격의 전망에 대해서는 9개 기업이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했으며 6개 기업이 보합세를 보일 것이라고 응답했다.

반면 원자재가격이 하락할 것이라고 응답한 기업은 3개에 불과해 기업들은 세계경제 침체에도 불구하고 원자재 난이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투자와 고용은 최대한 유지”
그러나 경기회복의 조짐을 찾아보기 어려운 데에도 불구하고 20대 그룹 대부분은 투자와 고용은 작년 수준을 유지한다는 방침을 나타냈다. 오히려 지난해보다 채용을 늘리겠다는 기업도 일부 있었다.

올해 예정된 투자계획을 제대로 집행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15개 기업이 계획대로 차질없이 집행하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2개 기업이 아직 집행하지 못하고 있지만 곧 집행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반면 투자계획은 잡아놓았지만 올해 집행할 계획이 없다고 말한 기업은 2곳에 불과했다.

또 하반기 신규채용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꼭 절반인 10개 기업이 예년과 비슷한 규모의 신규채용을 할 것이라고 응답했으며, 3개 기업은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예년보다 많이 채용할 계획이라고 응답했다.

신규채용 규모를 예년보다 다소 줄일 것이라고 응답한 기업은 5개 기업이었으며 아예 채용계획이 없다고 응답한 기업도 1곳 있었다.

이 같은 조사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기업이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미래 경쟁력을 위해 투자와 고용은 최대한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하반기 기업 경영에서 최우선 순위가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는 20대 그룹 중 6개 기업이 ‘영업 강화를 통한 판매 확대’라고 응답했다.

영업 강화에 이어 ‘유동성 확보’를 하반기 최우선 경영순위로 꼽은 기업이 5개였으며, 경영효율 제고를 경영의 최우선 순위로 꼽은 기업도 4개였고, 2개 기업이 신규사업의 발굴과 성공을 최우선 순위로 꼽았다.


“하반기 중점 경영목표는 ‘영업’”
이 같은 설문조사 결과 알 수 있는 것은 대다수의 기업들이 ‘생존’을 경영의 최우선 순위로 꼽으면서도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경제위기 이후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적극적인 생존’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위기는 우리 기업들에게는 위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세계 시장에서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획이기도 하다”며 “시장의 변화에 따른 적절한 마케팅전략으로 글로벌 시장에서의 위상을 높이는 계기로 삼겠다”는 한 그룹 임원의 말은 우리 기업들이 이번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자세를 잘 보여준다.

한편 불황 이후에 대비한 장기경영전략이나 신규전략사업을 묻는 질문에 20대 그룹의 40%에 해당하는 8개 기업이 ‘신재생에너지 등 녹생성장사업’을 꼽았다.

‘녹생성장산업’에 이어 6개 기업이 ‘글로벌 비즈니스 강화’를 불황 이후 장기경영전략으로 꼽아 현재 우리 기업들에게 ‘녹색성장’과 ‘글로벌 경쟁’이 커다란 화두임을 짐작하게 했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그룹들(자산규모순)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포스코, 롯데, 현대중공업, GS, 금호아시아나, 한진, 두산, 한화, STX, 대우조선해양, LS, CJ, 동부, 신세계, 대림, 효성

이형구 기자 lhg0544@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