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의족을 달고 암벽을 등반한 MIT 미디어랩 휴 헤르 교수가 지난 11일 열린 ‘융·복합 국제컨퍼런스 2012’에서 강연을 했다. 주제는 바이오닉스(생체공학). ‘신경-디지털 인터페이스에 기반한 인체와 기계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 이를 통해 향후 인간의 장애가 모두 사라질 뿐만 아니라 감정까지 읽는 로봇이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복잡한 기계장치로 된 의족을 착용하고 양복 바지를 걷어 올린 채 등장한 중년의 한 남자. 휴 헤르(49) ‘MIT 미디어랩(MIT Media Lab)’ 교수를 지난 11일 만났다. MIT 미디어랩은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의 세계적인 미디어융합 기술 연구소다.

컴퓨터, 기계, 로봇, 통신, 생물학, 건축, 디자인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기발하고 창의적인 신기술로 주목받아 왔다. 연구 프로젝트가 350여개에 달하며 개발된 기술로 상업화된 제품은 20여개 이상이다. 수십여개 글로벌 기업·기관이 3500만달러(약 400억원)를 후원하고 연구 결과를 활용하고 있다.

헤르 교수는 생체공학 분야 연구 전문가다. 등반용 의족을 비롯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위한 첨단 보행 도구를 개발 중이다. 융·복합 산업이 미래 먹을거리 창출의 최대 보고(寶庫)가 되고 있는 이 시대에, ‘사이보그(생물과 기계장치 결합)’의 세계적 권위자가 어떤 조언을 해 줄지 궁금했다.

그는 경기 고양시 킨텍스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융·복합 국제컨퍼런스 2012’ 기조강연에서 ‘신경-디지털 인터페이스에 기반한 인체와 기계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해 주목을 받았다. 두 다리를 잃고 얻은 장애 때문에 더욱 심도있게 연구할 수 있었던 그의 인생 배경을 살펴본다면 그의 진단과 조언은 의미심장했다.

암벽등반하다 사고로 두 다리 절단…의족 연구 계기
암벽등반가로 활동하던 헤르 교수는 17살 때 미국 뉴햄프셔 워싱턴산 등산 도중 눈보라를 만나 조난당했다. 간신히 구조됐지만 동상이 심하게 걸려 결국 두 무릎 이하를 절단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장애를 힘들어하기보다, 인생의 큰 기쁨이었던 암벽을 다시 타고 재활에 전념하면서 고통을 극복했다. 이후 자신과 같은 장애인을 위한 의족을 만들기 위해 MIT대학에서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끝이 날렵해서 좁은 바위 돌출부 위를 딛고 올라설 수 있는 의족, 톱처럼 생겨 따로 스파이크 없이 빙벽 등반을 쉽게 할 수 있는 의족, 길이를 자유자재로 늘였다 줄였다하는 의족 등… 의족 연구를 계속하다 보니 이젠 의족의 기계적 특성 뿐 아니라 그것이 사람의 몸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도 알아야 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하버드대에서 생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MIT 미디어랩에서 의(醫)공학(bionics)을 연구하는 교수가 됐다.

연구가 진행될수록, 그는 의족이 장애인 외에 비장애인을 위해서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현재 헤르 교수는 MIT 미디어랩 바이오메카트로닉스(생체공학) 그룹 디렉터를 맡아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위한 첨단 보행 도구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그의 연구는 팔다리 보조 기기뿐 아니라 노인들의 건강을 보호하고 모니터할 수 있는 로봇까지 다양한 영역을 아우른다. 지난 8월에는 자신이 제작한 첨단 의족으로 71m에 이르는 암벽을 등반해 화제를 모았다.

우울증·자폐증 개선은 물론 사람 감정 읽는 로봇 등장할 것
“기계가 인간의 신체 확장을 이뤄주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신체와 기계의 결합은 장애인의 삶의 질을 증진시킬 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도 인지적·감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향상된 능력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날 열린 ‘융·복합 국제컨퍼런스 2012’에 기조 발제자로 나선 헤르 교수는 바이오닉스(bionics, 생체공학)를 주제로 ‘신경-디지털 인터페이스에 기반한 인체와 기계 융합’을 제시했다.

그는 “사고로 두 다리를 잘라내고 의족을 하게 됐지만 티타늄과 마이크로세서가 부착된 이러한 인공 보철을 통해 다시 설 수 있게 됐다”며 “인공 보철이 몸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인체와 상호작용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의족을 착용한 다리를 모으고 폴짝 뛰어보였다.

“제 스스로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산악, 테니스 등 인공 다리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어요. 애석하게도 몸과 마음이 불편한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러한 기술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재활의료, 유전학 등을 통해서 앞으로 바이오닉스가 여러 가지 인간의 장애를 없애 줄 것 입니다.”

그 일환으로 MIT 미디어랩에서 진행 중인 몇 가지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하나는 우울증과 같은 뇌의 증상을 약제가 아니라 기계에 의한 자극 기제를 활용해 치료하는 방법에 대한 연구다. 항우울증제로는 개선되지 않는 심각한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의 뇌 특정 부분에 자극을 줬더니 비정상적 활동을 보였던 세포 등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며 우울증이 없어지는 결과를 얻었다고 했다. 매우 복잡하고 수많은 세포로 구성된 뇌 기능들을 어떻게 리엔지니어링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우울증 등의 여러 증상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게 헤르 교수의 설명이다.

또 다른 연구는 기계학습 플랫폼으로 사람의 정서를 알아내는 것이다. 비디오카메라를 이용해 얼굴의 여러 점 요소들을 스캔하고 그 사람의 표정이나 미소에 담긴 감정을 읽어내는 원리다.

손, 팔의 움직임까지 합쳐지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파악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자폐증이 있는 사람은 원활치 않은 커뮤니케이션으로 문제를 겪을 때가 많다. 이럴 때 기계학습 플랫폼을 활용하면 상대방의 표정을 읽어 전달해줌으로써 정상적인 소통이 가능케 할 수 있다는 거다.

“기술이 사람의 정서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컴퓨터가 유기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이것이 사회로봇공학이죠. MIT에서는 사회로봇공학도 연구 중입니다.”

그가 착용한 의족과 같이 첨단 의족에 대한 연구도 있다. 단순히 쇠와 플라스틱으로 이뤄진 의족을 만드는 게 아니라 지능을 로봇 구조에 포함시킨 모델이라는 것.
“의족에 부착된 마이크로세서가 걸으면서 생기는 정보를 전해주고 받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다리 근육 장애가 있는 부위에 로봇이 압력을 가해 제대로 걸을 수 있도록 보조하므로 좌우 균형을 맞춰 빠르게 걸을 수 있습니다. 뇌졸중 환자 등 보행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겁니다.”

헤르 교수는 유압 장치와 배터리, 컴퓨터, 모터를 장착해 장애인 뿐 아니라 비장애인도 좀 더 빠르고 편하게 걷는 장비들을 만들고 있다. 이런 것들을 통틀어 외골격(exo-skeleton) 구조라고 하는데, 이를 활용한다면 다리에 가는 부담은 물론 에너지 사용도 줄일 수 있어 손쉽게 언덕을 올라갈 수 있다.

여기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 바로 신경. 기계가 접촉한 감촉에 대한 부분까지도 인간이 직접 느끼는 것처럼 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를 테면 의족을 한 채 모래사장을 걸어도 모래의 감촉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헤르 교수는 “신경망과 디지털 기기를 연결해 정상인과 장애인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며 “21세기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장애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강력한 팔다리, 아주 먼 곳까지 볼 수 있는 인공 눈과 미세한 소리도 감지할 수 있는 인공 귀 등을 개발하는 연구도 병행 중이다. 공상과학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6백만불의 사나이’가 진짜 등장하는 그 날이 머지않았다.

휴 헤르 교수의 ‘인체·기계 융합’ 산업 개요

글로벌 연구 현황과 시장 규모
미국을 비롯해 이탈리아,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연구가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인체·기계 융합 기술은 그 활용도가 매우 높아 그만큼 중요한 분야다. 시장 규모도 거대하다. 정확한 수치를 추산하긴 어렵지만, 전 세계 인구의 반 정도가 장애를 앓고 있다고 하니 이것만으로도 시장 잠재력은 어마어마하다고 볼 수 있다.

대량생산까지 걸리는 시간과 대중적 가격 책정 시기
대략 400개의 보철 기계를 판매했다는 게 희소식이다. 앞으로 수천, 수백만개로 증가할 것이다. 현재의 가격은 매우 비싸다. 그럼에도 바이오닉 기기를 사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개인의 의료비용을 전 인생에 걸쳐 생각해 봤을 때 많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가격은 규모의 경제 원칙에 따라서 내려갈 것이다.

첨단 의족 개발 기간과 투자 비용
의족 등을 개발하는 데 4300만 달러(한화 약 490억원)가 투입됐다. 최근 일하다가 다리를 잃은 오하이오주의 한 젊은이를 알게 됐다. 그가 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도록 오하이오주에서는 의료비를 지원했다. 하지만 큰 장애를 입었기 때문에 기존 기술로는 정상적 생활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우리가 개발한 의족을 사용했고 덕분에 삶의 질이 크게 좋아졌다. 오하이오주 정부 측면에서 600만 달러가 절약이 된 셈이다. 대단한 편익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기술 개발로 더 많은 사람의 삶을 개선시키고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생명윤리 논란의 우려
앞으로 인간의 신체와 윤리에 대해선 우리에게 더 많은 책임감이 요구될 것이다. 비윤리적 논란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장애를 가진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혜택이 더 엄청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점점 더 강력한 기술들이 등장하고 있다. 기술 혁신과 더불어 이런 기술을 활용하는 사람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적절한 정책 및 제도가 뒷받침돼야 할 것이다.

전희진 기자 hsm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