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5일은 27번째 맞는 스승의 날이다.

공자는 ‘삼인행 필유아사언(三人行必有我師焉)’이라 하여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심지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부정적인 것에서조차 ‘반면교사(反面敎師)’로 가르침을 얻는다.

이렇게 보면 인류 모두가 스승이고 가르침에 등급을 매길 수는 없는 일인 것처럼 보인다. 다만 우리가 기억하고 존경하는 스승의 공통점은 모범적이고 실천적이며 자기희생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스승상은 단순히 지식을 전하는 기능인의 역할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스승이란 말도 듣기 어려워졌고 교사나 선생이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된다.

스승의 날도 스승에 대한 참뜻을 되새기고 그 고마움을 생각하기보다 선물, 행사 등 의례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로 인해 스승의 날에 휴업을 하고, 스승의 날을 옮기자는 주장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스승은 항상 위대하다. 비록 역사가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스승은 위대한 존재다.

스승의 날을 맞아 CEO들로부터 큰 가르침을 받은 스승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고현숙 한국리더십센터 사장과 이연옥 선생님
거짓말 일기를 잠재력으로 인정해 준 선생님

초등학교 때 나는 가끔 거짓 일기를 쓰곤 했다. 일상은 너무 평이해서 일기에 쓸 만한 ‘사건’이 안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꾸며대곤 했는데, 어느 날 그 거짓말이 딱 걸렸다.

언니 생일날 내가 일찍 일어나서 밥을 지었다고 꾸며 썼는데 담임선생님께서 가정 방문을 와서 기특하다며 그 얘기를 하신 것이다.

당사자인 우리 언니가 “예? 쟤가 밥을 했대요?” 하고 황당한 표정을 짓자 선생님도 얼른 알아차렸다. 순간 나를 흘겨보긴 하였으나, “얼마나 그럴듯하게 썼는지, 진짠 줄 알았네요” 라며 웃으셨을 뿐, 혼내진 않으셨다.

선생님은 나중에 나를 부르셔서 글을 더 잘 쓰려면 ‘다독, 다작, 다상량’의 삼다, 즉 ‘많이 읽고 많이 써보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를 해주셨다.

얼마나 멋진 말인지,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글 쓰는 일에 관한 최초의 각인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한 후 내가 연필로 눌러쓴 짧은 편지를 보내면 선생님은 아름다운 글씨에 유려한 문장으로 쓴 긴 답장을 보내주셨다.

초등 5학년 때 담임이셨던 이연옥 선생님. 책 읽기를 좋아하고 글을 써보는 나의 습관은 그때 확실히 형성되었다. 선생님이 나의 잠재력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선생님은 학생이 숙제로 낸 동시에 상투적인 표현이 있다고 해서, “너, 이 시 어디서 베꼈냐? 사실대로 말해!” 라고 호되게 추궁하더란다.

그때 억울한 질책을 당했던 어린 학생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다시는 글을 쓰지 않으리라’, ‘나는 글을 쓸 자질이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억울해한다.

선생님들은 아셨을까? 자신의 말이 그렇게나 크게 제자의 인생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사실을.

기업조직에서 작은 판단 차이가 나중에 말단의 실행에서는 엄청 큰 차이를 가져오는 현상을 가리켜, 경영학에서는 채찍 효과라고 부른다. 손목을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채찍은 크게 휘둘러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역할이 이와 같지 않을까? 제자에게는 선생님의 농담조차 각인되어 따라다니는 법, 그래서 선생님이 된다는 것은 큰 보람임과 동시에 두려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박병덕 네오팜 사장과 이윤식 교수
F학점으로 터닝포인트를 만들어준 교수님

대학을 졸업한 지 20여년이 지났다. 1980년대는 공부에 대한 문제보다 사회의 문제점에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게 했던 시절이었다. 난 여느 대학생과 마찬가지로 도서관에서 보다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어느 순간 그의 삶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를 접하게 된다. 어느 희극 배우의 말처럼 비극이 희극이 되기도 한다.

대학 2학년 때였던가. 난 유기화학 과목에서 F학점을 받았다. 그 과목 교수님은 대학원 때 나의 지도교수님이 되시는 이윤식 교수님이셨다.

친구들과 대낮에도 관악산 등산로 막걸리집에서 막걸리에 취하고, 5월 대동제에 미치다보니, 퀴즈 다섯 번과 시험 다섯 번을 치는 유기화학 과목의 낙제를 피할 수가 없었다.

낙제를 받은 것을 계기로 나는 학업에 대한 오기가 생겨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다. 특히 4학년 때는 F학점을 받은 그 과목을 재수강하면서 유기화학의 깊은 재미를 깨닫게 되었고 그 후 대학원에 진학해 유기화학을 전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에게 F를 주셨던 그 교수님의 수제자가 된 것이었다.

연구를 통해 나름대로 이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캠퍼스를 떠난 친구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실험실 생활을 하였다. 그 결과 당시에 대체로 5년을 하는 박사 과정을 3년 반만에 마칠 수 있었다.

그 후 5년의 회사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수행한 연구 결과를 가지고, 사내 벤처 창업을 제안하여 벤처로 독립을 하게 되었다. 가끔 그때 우리 교수님이 나에게 F학점을 주지 않았다면, 현재의 나의 모습은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과 어머니
돈의 개념 심어준 어머니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자신의 인생 스승은 어머니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부터 돈에 대한 올바른 관념을 심어주어 돈을 관리하는 법에 대한 철학을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 회장의 어머니는 그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동안 1년에 한 번만 생활비를 보내와 돈을 계획적으로 쓰고 관리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학생 때부터 자신이 거주할 집의 부동산 계약도 직접 하도록 했다고.
박 회장은 “어린 시절 어머니는 성적보다는 독서의 중요성을, 인생의 성공보다는 성실함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고 기억했다.

한번은 박 회장이 초임 지점장 시절 영업실적이 좋지 않은 점포를 맡아 돈이 부족해 어머니께 1년간 생활비를 빌려쓴 적이 있었는데 당시 원금에 대한 이자를 꼬박꼬박 어머니께 드렸다. 이를 연단위로 환산하면 17% 정도의 고금리였다.

당시 어머니께서 “나도 남에게 빌려서 주는 것이니 꼭 갚으라”는 말과 함께 빌려준 돈의 출처는 알고 보니 어머니 자신이었다고. 자식에게 남의 돈 쓰는 것에 대한 무서움을 알게 하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박 회장은 이 일을 계기로 ‘돈의 코스트(Cost)’에 대한 개념을 확실히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박 회장은 “어머니는 쌀을 시장에 내다 팔아 내일 들어올 돈이 있어도 내일 들어올 돈이 100만원 있다고 절대 말하지 않고 돈을 손에 쥐고 나서야 ‘돈이 들어왔다’라는 말씀을 하셨다”며 “손안에 들어온 돈만이 내 돈이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이 후에 고객의 돈을 관리할 때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방패막이 역할을 해줬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박 회장에게 어린 시절부터 돈의 개념과 인생살이의 철학을 몸에 익히도록 가르쳐 투자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준 것이다.

심갑보 삼익THK 부회장과 진우석 명예회장
CEO의 길로 이끌어준 ‘경영의 스승’

내가 CEO로 성장하기까지에는 큰 스승을 한 분 모시고 있다. 삼익THK의 창업자이시며 필자의 장인이신 오당(午堂) 진우석(陳禹碩) 명예회장이시다.

장인어른은 1970년 임원으로 입사하여 처음으로 대하는 정부상대 특관세 환급 소원(訴願)업무를 비롯하여 경쟁업체의 모함과 특허 관련 사건 등 당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기업이 도산할 수도 있는 대형 민·형사 사건들도 필자에게 맡김으로써 처음으로 나를 경영의 길로 이끌어주셨다.

장인어른은 또 제조업의 문외한으로 경영에 참여한 내게 기업경영의 실무에 필요한 이론을 배우도록 고대 경영대학원에 입학을 시켰다. 외부 교육기관을 통한 경영자 양성의 일환이었다.

그 뒤로도 영업, 회계, 생산관리 등 회사경영에 필요한 지식을 외부연수기관을 통해 익히도록 함으로써 나를 경영자의 길로 이끌어주셨다.

덕분에 나는 외부 교육훈련을 통해 얻은 노하우를 바탕으로 영업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1970년대 초에 수출의 길을 열고 당시 중소기업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회계 전산화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명예회장님은 1978년도에는 해외에 한 번도 나가본 일이 없고 어학실력도 변변찮은 필자와 당시 공장장이 유럽 7개국의 ‘줄(File)’제조업체에 가서 선진 줄제조기법을 배워오도록 하셨다.

덕분에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기술집약적 산업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경영상의 문제들이 만만치 않았지만 난제가 주어질 때마다 도약의 기회로 삼고 그 방법을 찾아 해결하면서 경영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사실 CEO로서 처음 부딪히거나 난해한 문제로 벼랑 끝에 설 때마다 여쭈어볼 수 있는 스승이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 일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시고 해법을 찾도록 외부교육기관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해주신 장인어른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게 되었음을 항상 감사하고 있다.

박병덕 사장의 스승인 서울대 화학과 이윤식 교수와 제자들.

윤은기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총장과 김동호 장군
군생활 보람 있게 한 상관이자 스승

‘존경받고 사는 것도 행복하지만 존경할 대상이 있는 것이 더 행복하다.’
내가 이러한 가치관을 터득한 것은 젊은 시절 공군 장교 생활을 하면서 모셨던 김동호 장군님 덕분이다.

나는 고려대학교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했는데 임관 1년쯤 되던 시기에 비행단장으로 부임한 김 장군의 부관이 되었다.

처음에는 자유롭던 생활을 접고 24시간 근접근무를 해야 하는 고충이 있었지만 점차 김 장군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김 장군은 유능한 전투기 조종사이면서 영어, 일어에 능통하였고 검도와 유도의 유단자였다. 게다가 영국 무관을 3년간 하면서 닦은 세련된 매너까지 갖추고 있었다. 한마디로 지덕체를 겸비한 분이었다.

이 분의 진정한 매력은 전체를 보는 힘, 그리고 구성원에 대한 따뜻한 배려였다. 당시는 권위주의적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계급을 떠나 인간적 관심과 배려로 부대를 통솔하여 큰 성과를 이끌어내었다.

‘장군의 아들도 사병이 되고 하사관의 아들도 장군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진정한 리더십이다.’

지휘관 참모회의에서는 늘 이런 말을 강조하였다. 본인이 전투기 조종사임에도 일부러 수송기 기종 전환훈련 과정을 거쳐 수송기 조종간을 잡기도 하였다.
수송기 조종사들과 공감대를 만들기 위한 깊은 배려였다.

운이 좋게도 나는 이런 분을 모시면서 ‘자기 수양’의 모델을 찾아낸 것이다.
흔히 군대는 때우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나는 군대 덕분에 인생관이 재정립되었다.

나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고 좋아서 열심히 일했고 보람을 느꼈다.
제대 후에도 김동호 장군을 마음속의 스승으로 생각하면서 자기계발 노력을 해왔다. 나는 내 인생의 스승을 공군에서 만났고 지금도 내 마음속에는 공군과 김동호 장군의 DNA가 새겨져 있다.

삼익THK의 상무로 재직 중이던 1971년 직지사로 야유회를 떠난 심 부회장과 직원들.

이효복 와바 사장과 일본 ‘아레후’ 쇼지 아키오 사장
친환경 경영의 ‘롤모델’

중요한 인연일수록 나중에 돌아보면 그렇듯이 쇼지 아키오 사장과의 만남도 우연처럼 시작됐다.

2007년 모 국립대학교 명예박사로 초청되어 한국에 오게 된 쇼지 사장과 평소 친분이 있었던 대학 총장님과의 저녁식사 자리에 초대받게 되었고, 식사 후 간단하게 맥주 한잔을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편한 분위기 속에서 쇼지 사장과 서로의 기업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이야기 중 쇼지 사장으로부터 일본으로의 개인적인 초청을 받게 되었다.

그 초청에 응하게 된 것이 내 인생에 있어 큰 변화가 생길 터닝포인트가 될 줄은 그때까지 몰랐다.

그동안 앞만 바라보고 달려오던 내게 있어 2007년은 경영이 어느 정도 안정화된 단계에 있었고, 이제부터는 환경과 건강을 생각하는 기업으로서 경영의 목표를 한 단계 높여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다.

이효복 사장의 롤모델인 일본의 프랜차이즈 식당 ‘아레후’의 홈페이지와 아키오 사장.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을 오래 전부터 내가 생각해 온 이러한 기업 비전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경영을 해온 아레후를 직접 방문해 배우고 싶어 2008년 3박4일 일정으로 일본 홋카이도로 떠나게 되었다.

소비자들이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에서 쇼지 사장은 소비자보다 더 까다로운 공급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가 이룩해놓은 그룹의 규모는 생각보다 상당했고, 그 규모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경영되고 있었다.

최대한의 이윤을 내야 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게다가 많은 가맹점을 관리하기가 쉽지 않은 프랜차이즈 기업에서 이 정도로 환경을 생각하는 경영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아레후가 친환경 경영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쇼지 사장의 고집스러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는 전 세계적으로 친환경 녹색 경영을 외치고 있지만 발전만을 강조하던 1980년대부터 이러한 친환경적인 경영을 해온 아레후 같은 기업은 극히 드물다.

올바른 선견지명을 가지고 스스로의 신념으로 삼고, 그것을 그대로 진행할 수 있는 뚝심. 쇼지 사장에게서 내가 배우고 싶은 가장 큰 부분이기도 하다.

그동안 생각해 왔던 친환경 경영이라 하면 지열, 태양열 사용쯤으로 생각했던 나는 아레후의 디테일한 경영 방법에 또 한 번 놀랐다. 아레후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프랜차이즈 브랜드 매장에는 집유기가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폐식용유를 가져오는 고객에게는 그만큼의 양에 해당하는 맥주나 음료수를 제공하고 있었다.

모아진 폐식용유는 자체 정제 시스템을 통해 물류이동에 필요한 기름으로 쓰인다.
그리고 대나무로 만들어진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모두 수거해 죽초액을 뽑아 아레후가 소유하고 있는 화원의 화초에 영양액으로 사용한다.

여기서 더 감동적인 것은 그 수 많은 화초 하나하나에 나무젓가락이 수거된 매장의 이름들이 적혀 있어 아름답게 자란 화초가 그 매장의 디스플레이를 위해 다시 쓰여진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진심으로 환경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많은 화원을 가꾸기 위한 인력과 시간을 모두 감당하면서도 자연을 지키려는 쇼지 사장의 노력에 그 자리에서 큰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업적인 이익을 위한 행동과 실천이 아닌 소비자의 건강과 나아가 세계의 환경까지 생각하는 그 모습을 보며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고, 기업가의 사명과 비전을 수정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