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남자들에게 요리란 ‘금기’였다. 심지어 부엌에 드나들면 남성의 심볼이 떨어진다는 무시무시한 저주까지 붙은 ‘금단’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요즘 남성들에게 ‘요리’란 더 이상 성역이 아니다. 소년에겐 꼭 실현하고 싶은 꿈이자 미래의 직업이 되기도 하고 열심히 직장을 다니며 스스로의 건강을 지켜야 하는 싱글남성들에겐 ‘생존 전략’이 된다. 가장에겐 가족의 신뢰와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 되고 기업인에겐 ‘경영전략’이 된다. 요리는 이제 남성들을 더욱 남자답게 하는 필수 자격조건이 되고 있다. ‘요리남(男)’ 현상을 집중 조명한다.

chapter 3 요리하는 남자
“제가 만든 음식을 남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면 보람이 느껴집니다. 어릴 때부터 집에서 어머니가 요리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배웠고 해보니 적성에도 맞는 것 같아요.”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영등포의 한 요리학원을 찾으니 건장한 남성 한 명이 앞치마를 두르고 뭔가를 열심히 그릇에 옮겨 담고 있었다. 제육구이실습을 막 끝내고 마무리를 짓는 중이었다. 이하실(40)씨는 한식조리사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최근 요리 학원에서 관련 수업을 듣고 있다. 전공은 체육과이지만 요리에 뜻이 있어 본격적으로 요리 배우기에 뛰어들었다. 그는 앞으로 한식세계화에 발맞춰 한식요리사가 되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

결혼 4개월 차인 직장인 천명현(33)씨는 오후 6시면 퇴근을 한다. 의료기기 전문업체에 다니는 그는 항상 아내보다 먼저 귀가하는데 그가 요즘 즐기는 일과 중 하나는 아내가 집에 돌아오기 전 저녁상을 차리는 일이다.

“요리를 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이것저것 식재료를 섞어서 맛을 내는 과정이 재밌기도 하구요. 제가 만든 음식을 아내가 먹고 ‘맛있다’고 하면 행복감이 느껴집니다. 요리를 하면 가족들이 좋아하니 집안 일중 요리만큼은 제가 하려고 합니다.”

우리 주변에 요리하는 남성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언제부턴가 요리학원이나 백화점 문화센터 요리강좌에서 요리를 배우는 남자들을 목격하는 일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일이 됐다.

요리학원·요리강좌 남성들로 북적
“최근 요리를 배우려고 찾아오는 남성들의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조리과 등에 진학을 하기 위해 요리를 배우려는 남학생수는 이미 여학생들의 숫자를 훌쩍 넘어선지 오래됐고 최근엔 ‘더 이상 라면만 먹을 순 없다’며 직장인 싱글남성들이 요리를 배웁니다. 결혼을 앞둔 예비신랑들은 물론 은퇴기를 맞은 중년 남성들까지 다양한 남성들이 요리를 배우기 위해 찾아옵니다.”

김동석 한국요리학원 부원장은 남성들이 요리를 배우는 것은 비단 최근의 일은 아니라고 말한다. “요리가 체력이 많이 요구되는 일이라 종사자들이 남성이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직업으로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건강을 위해 또는 가족을 위해 요리를 배우려는 남성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마스터 셰프 코리아에서 심사위원으로 활약중인 ‘강레오’ 셰프(왼쪽). LG전자 커플 쿠킹클래스 참가자들의 모습.


이 요리학원만 해도 올해 들어 남성들이 요리를 배우러 오는 숫자는 30~40대 기준 전년도 대비 약 2배 이상 증가했다. 백화점 문화센터의 경우 현대백화점의 최근 요리강좌 남성수강생 비율은 2009년 21%, 2010년 22%, 2011년 23%, 2012년 24.5%로 조금씩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샘표식품이 ‘맛을 아는 동산’이라는 의미로 운영 중인 요리교실 ‘지미원’의 경우 당초 여성들을 대상으로 요리교실을 운영해오다가 요리를 하려는 남성 참여자들이 많아지면서 2010년 3월부터 월 2회 남성들을 위한 요리 교실을 신설해 운영하고 있다. 매월 둘째 넷째주 화요일 저녁 7시 무렵 수업이 진행되며 이달에도 5일, 19일 중구 필동에 위치한 샘표식품 10층 지미원에서 강좌가 열릴 예정이다.

남성들은 왜 이렇게 요리를 배우려는 것일까. 김 부원장은 “최근엔 매스컴의 영향으로 요리하는 남성들이 많이 부각됐고 에드워드 권, 강레오 등 ‘스타셰프’도 등장하면서 요리가 여성들만 하는 일이 아니고 남자들도 한다는 인식이 높아진 것과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가정에서 남성들도 요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이유를 설명했다. 요리를 하는 남성들이 늘면서 나타나는 특징으로는 세대별로 남성들이 요리를 하는 목적이나 양상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

세대별 요리 배우는 목적과 특성 뚜렷
10대의 경우는 주로 조리학과 등에 진학을 하기 위한 입시목적으로 요리를 배운다. 반면 20~30대는 싱글남성들의 경우 불규칙한 식생활을 개선하고 건강을 위해서 요리를 배우고 애인이 있거나 결혼을 한 기혼자의 경우엔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에게 요리를 선사하거나 가사 일을 분담하기 위해 요리를 배우는 경우가 많다.

LG전자는 지난달 예비신랑·신부를 위한 ‘커플 쿠킹클래스’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요리 실력이 완벽한 신랑이 갖춰야할 자격조건으로 각광받는 최근의 트렌드가 반영됐다. 40~50대 이상 중년 남성들, 특히 은퇴를 앞두거나 은퇴한 남성들의 경우엔 아내들이 직장에 나가면 밥을 차려줄 사람이 없고 집에서 눈치를 보기 싫어 요리를 배운다. 기러기 아빠들이 요리를 배우는 이유도 비슷하다.

한편 요리는 요즘 ‘잘나가는 남자’들의 필수조건이자 하나의 상징이 되고 있다. TV를 틀어보면 각종 요리프로그램의 MC는 대부분 남성들이다. MBC <찾아라 맛있는 TV>에서는 이현우, 권오중, 쥴리엔 강 등 남성 3인방이 MC로 출연하며 요리대결을 펼쳐 여성 시청자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EBS <최고의 요리비결>은 최근 박수홍에 이어 윤형빈이 진행을 맡고 있다.

각종 드라마와 영화에서 나오는 ‘훈남’ 주인공들도 대부분 ‘한 요리’하는 근육질의 잘생긴 남자이여야 한다는 공식이 성립됐을 정도다. 남성들이 사랑하는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면 으레 앞치마를 매고 요리를 하는 모습은 이제 그다지 이색적인 풍경도 아니다.

요리는 잘나가는 남성들의 상징이기도
최근엔 요리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스타셰프들이 탄생하고 멋진 외모의 요리사지망생들이 대거 출연하면서 여심을 흔들고 있다. 얼마 전부터 요리전용 채널로 변모한 올리브채널에서는 요리서바이벌 프로그램인 <마스터셰프코리아>가 방영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으로 나오는 강레오 셰프는 화려한 스펙과 호감형 인상으로 인기가 급상승 중이다.

특히 요리전문가로서의 날카로운 분석력과 카리스마를 보여줌과 동시에 합기도 유단자로서 남성미도 물씬 풍기면서 여성 팬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그밖에도 이 프로그램에서는 강 셰프를 비롯해 180cm의 훤칠한 키에 귀티 나는 외모로 인기를 끌고 있는 박성호, 요리계의 송승헌이라 불리는 귀여운 외모의 서문기, 영국 배우 휴 그랜트를 닮아 화제가 되고 있는 외국인 도전자 달라스 브래넌 등 남성 지원자들이 ‘마셰프 F4’로 불리며 주목을 받고 있다.

그밖에 요리는 기업인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경영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다. 국내에서 평소 요리를 즐겨하는 경영자로는 박세준 한국암에이 대표와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박 대표는 최근 생일을 맞은 직원들을 위해 잡채와 케이크 등 직접 요리를 해 화제가 됐다. 박 대표는 올해 초 요리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직원들에게 직접 음식을 만들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아이디어를 내고 실천한 것이다.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은 ‘요리는 가장 창조적인 예술행위’라는 지론으로 요리를 취미로 하고 있다. 그에게 요리는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전하는 매개체다. 그는 주말엔 가족들을 위해 요리를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여기고 있으며 지인들을 불러 요리를 대접하길 즐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은퇴 후엔 요리사 자격증을 따는 걸 목표로 삼고 있다는 후문도 들린다.

미니인터뷰 | 최영록 순창군 건강장수과 과장
“건강지키고 삶의 질 향상 은퇴 시니어 요리 교육 강추”

최근 전라도 순창군 건강장수연구소는 은퇴를 준비하거나 은퇴한 남성 시니어를 대상으로 올바른 영양 교육과 건강요리를 실습하는 프로그램 ‘순창 골드-쿡’을 진행해 눈길을 끌었다. 이 프로그램을 담당하고 있는 최영록 순창군 건강장수과 과장으로부터 ‘순창 골드-쿡’프로그램의 기획 취지와 현황, 남성 시니어들에게 요리교육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들어봤다.

순창 건강장수연구소는 어떤 곳인가.
“순창은 이미 2001년도부터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생산인구가 줄고 있는데 이런 약점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장수산업을 전략사업으로 선정해 건강장수과학특구를 조성해 운영하고 있다. 연구소는 지난해 완공돼 고령화 사회 전문가 집단인 서울대 노화고령사회연구소가 위탁운영을 하고 있는데 은퇴 후 인생을 보람되고 가치있게 살아가기 위한 노후설계 교육을 실시하고 지역농산물의 건강기능성 입증 등을 위한 연구 활동을 진행할 예정이다.”

노후설계 교육에 시니어 남성들을 위한 ‘골드-쿡’ 과정이 포함 된 건가.
“그렇다. 골드-쿡 과정은 초기 가장 우려했던 강좌 중 하나였다. 40~60대 남성들을 대상으로 올바른 영향의 이해, 건강식단 구성 등의 이론강좌와 건강요리실습 및 체험으로 이뤄진 강좌다.”

골드쿡 프로그램을 기획한 배경은 무엇인가.
“요즘 젊은이들은 맞벌이를 하고 가사도 분담하지만 50대 이상 남성들은 혼자서 라면도 못끓이는 분들이 수두룩하다. 이런 분들은 은퇴 후 가정에서 설자리가 좁아지게 되고 특히 배우자가 사망하거나, 이혼을 하게 되면 혼자서 식사를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엥겔지수가 너무 높아져 다른 여가 활동이 힘들거나 사회적으로는 건강한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 의료비가 과다 지출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마련했다.”

반응은 어떠한가. 앞으로 계획은.
“2011년 보건복지부 사업으로 노후설계교육을 진행했는데 만족도 설문조사에서 98% 이상 만족한 것으로 결과가 나타났다. 특히 이 수업의 경우엔 수료 후에 교육자의 배우자들로부터 ‘고맙다’는 전화가 많이 걸려온다. 남편이 이렇게 변할 줄 몰랐다는 반응들이다. 그럴 때면 노년부부를 위한 부부클리닉 원장이 된 기분도 든다. 앞으로도 바쁜 도시 시니어를 위한 미니노후설계 과정을 개설하고 교육자들 가치관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들로 더욱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김은경 기자 keki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