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슬로 플레이어로 꼽히는 케빈 나 선수(왼쪽). 지난주 막을 내린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예선 탈락한 디펜딩 챔피언 최경주 선수.(오른쪽)


지난주 막을 내린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에서 TV를 통해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최경주 선수가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시는 것을 봤다. 그리고 첫날과 이틀째까지 성적이 좋아 우승을 예감했던 두 선수가 있었는데 한 선수는 케빈 나(Kevin Na) 선수, 다른 한 선수는 찰리 위 (Charlie Wi) 선수였다.

이 두 선수는 공을 멀리 때려내는 장타 선수들이 아니다. 아이언샷이 일품이고 정교하며 특히 퍼팅을 잘하는 선수로 유명한 선수들이다. 이번 시합이 펼쳐진 곳은 미국 플로리다주의 TPC 소그래스골프장이다. 다른 시합 장소에 비해 거리가 짧아 스코어가 낮을 것 같았지만 반대로 정교한 샷을 뽑아내지 못하면 80대를 칠 수 있는 코스라 쉽지 않은 난감한 골프장이다.

시합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케빈 나 선수가 시합 내내 얼마나 특이한 행동을 했는지 봤을 것이다. 특히 티박스에 올라서서 티샷을 쳐내기까지 지루하고 민망할 정도로 시간을 끌었다. 어떤 때는 웨글(클럽 헤드를 좌우로 흔들며 긴장을 푸는 행동)만 8~9번을 했는데 그나마 스윙을 하지도 못하고 처음 루틴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뭐야’라고 생각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정말 늦게 치는군, 짜증나겠다’고 동감하는 골퍼도 있을 것이다.

실제 나 선수는 인터뷰 중에도 같이 치는 동료들에게 정말 미안하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양해를 구했다. 모든 시합에서 플레이가 늦는 선수들에게는 페널티를 준다. 실제 필자도 슬로우 플레이로 2페널티를 안고 예선을 1타차로 떨어진 경험이 있어 슬로 플레이(slow play)에 대한 협회의 입장을 잘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마지막 날 우승조에서 플레이를 하고 있던 선수에게도 늑장플레이라면서 2페널티를 던져 선수의 화를 돋게 했던 사건이 있었음을 기억하는데 나 선수에게는 슬로 플레이에 대한 페널티를 주지 않았다. 왜일까? 도대체 누구는 페널티로 예선을 떨어지고 누구는 우승에서 멀어지는데 이처럼 그냥 넘어가는 경우는 뭘까?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먼저 나 선수의 솔직한 인터뷰 덕이 크다. 그리고 샷을 하는 시간은 늦었을지 모르지만 앞 팀과의 간격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걸었다는 것이다. 골퍼라면 겪어 봤을 스윙에 대한 불안함, 이를 알고 느껴 봤다면 나 선수의 행동이 어쩌면 이해가 갈 것이다. 나 선수는 지독한 컨디션 저하로 오래 동안 힘들어 하다가 드디어 리드하는 시합을 하고 있었는데 머리 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 본인 스스로도 힘들고 괴롭다는 솔직한 인터뷰를 했었다.

게다가 너무나 미안하다고 고백하는 인간적인 모습에 나 선수의 슬로 플레이가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실제로 슬로 플레이로 협회에 보고가 들어오면 경기위원들은 초시계를 들고 코스로 들어와 선수들의 경기 속도를 잰다. 몇 홀을 그렇게 따라 다니면서 누가 늑장을 부리는지 찾아내 벌타를 주는데 대부분의 선수들은 자신의 슬로 플레이를 인정하지 않거나 심지어는 코스 안에서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필자가 미국에서 시합할 때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늑장 플레이로 벌타를 받은 선수가 자신은 아니라면서 눈물을 흘리며 고발하겠다는 이야기로 골프장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 어찌 됐건 이렇게 늑장을 부리며 플레이 하는 선수들을 투어에서는 보고만 있지 않는 게 일반적인데 나 선수의 경우처럼 그냥 넘어갔다는 것이 놀랍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나 선수는 생각이 너무 많아 스스로도 짜증난다며 코스에서 자신에게 소리를 치는 장면도 TV방송을 탔다. 필자가 투어를 할 때 선수가 부상을 당하면 재기가 가능한 선수. 그리고 안 되는 선수 이렇게 나뉘었다. 선수가 어디에 부상을 입었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졌는데 뼈에 금이 가도 다시 붙으면 컴백(come back)이 된다. 허리 목 디스크 환자도 컴백을 한다. 하지만 내가 본 다음의 두 종류의 부상을 입은 선수는 컴백이 힘들었다. 첫 번째는 손가락 관절이 붓는 선수들. 두 번째, 절대 컴백이 안 되는 부상은 다름 아닌 머리였다. 머리 다친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많은 선수들은 컴백이 안됐다는 얘기다.

필자와 같은 골프장에서 연습을 했던 켈리 부트(Kelly Boothe)라는 꽤 알려진 선수가 있었다. 루키(신인 선수) 해부터 성적이 매우 좋아 관심을 많이 받던 켈리 선수는 해가 갈수록 몸무게가 늘더니 어느 순간 걱정이 될 정도로 변해있었다. 뿐만 아니라 성적도 추락에 추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그녀를 골프장에서 만나 함께 연습을 하고 식사를 한 적이 있다.

필자는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었다. 매일 밤 악몽을 꾸는데 시합 때 늦게 일어나 늦는 꿈. 또 티업(경기 시작을 위해 핀 위에 공을 올리는 것)을 하려고 하는데 티박스가 불뚝 솟아 올라와 공을 칠 수가 없어 뒷 땅을 치는 꿈. 게다가 공을 쳤는데 공을 못 찾아 날이 새도록 공을 찾는 꿈을 꾼다고 털어 놓았다. 이 얼마나 황당한 꿈인가? 골퍼라면 현실에서도, 꿈에서라도 절대 생기지 않아야 하는 일들이다.

이런 이야기를 스포츠 심리학자인 필자의 삼리학 코치 데이비드 라이트에게 이야기 하자, 그는 아마도 그 선수가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하지 못 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불행하게도 그 말은 현실이 됐고 그 다음해부터 필자는 그녀를 더 이상 골프장에서 볼 수 없었다. 골프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이 되면 ‘멘털’, 즉 정신력이 더 중요하다. 어느 단계에 가면 그게 다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 어쩌면 모든 선수가 이 부분을 가볍게 앓고 이겨내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마치 홍역을 앓는 아이가 가볍게 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위험한 경우가 생기는 것처럼 골프도 그렇다.

멘털이 바로 그런 홍역 같은 존재다. 바로 그 시작이 나 선수에게 찾아올지 몰라 팬들은 그를 응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훌륭한 선수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생각이 단순할수록 골프는 잘 된다고 한다. 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가. 그래서 골프를 잘 치기 위해 도를 닦아야 한다고들 하는 것 같다. 그렇게 골퍼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그게 바로 골프라는 게임의 진정한 매력일지도 모른다.

여민선 프로 minnywear@gmail.com
LPGA멤버, KLPGA정회원, 라이프스포츠클럽 골프 제너럴 매니저, 방송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