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作品S.W-336, 철 135×140×50㎝, 1964-1965

1960년대에는 박석 원뿐 아니라 젊은 작가들이 용접조각을 적극적으로 제작했다. 서구에서는 용접조각이 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전반에 유행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에

용접조각이 유행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900년대 우리의 시대상황을 고려해 보면, 철(iron, 鐵)용접조각은 오히려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1900년대는 6.25전쟁이 끝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가난했고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석고가루가 거의 유일한 조각 재료였다.

그러나 석고는 표현에 한계가 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절에 등장한 것이 고철을 이용한 용접조각이고, 특히 당시에 현대적이라고 여겨지던 추상조각을 손쉽게 제작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워낙 물자가 부족하여 고철조차도 손쉽게 구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젊은 작가들은 철공소나 자동차 공장 같은 데서 철판 자투리를 얻거나주워 모아 용접조각을 제작했다. 박석원은 한인성 같은 작가들과 함께 당시 신촌에 있던 하동환 자동차 공장에서 철판 자투리를 얻어 용접조각을 제작했다고 한다.

또한 단단한 철과 이를 불꽃으로 녹이고 붙이는 용접기법 자체가 당시 젊은이의 감성과 잘맞 아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박석원은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욕구와 이상이 얽혀 있던 강렬한 시절에 철이 가진 표정, 철의세계, 철의 속성은 젊은이의 의식과 맞닥뜨려짐으로서 열광적으로 받아들여 철 용접조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딱딱하고 강력한 철이 열을 가하면 녹여지는 느낌은 강하고 시원하고, 뜨겁고, 강렬한 것이었기 때문에 젊은이의 기질, 강한 감성에 잘 맞았다. 이것을 통해서 당시 젊은이의 감정을 해소하고 승화시킬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이것이 바로 철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요컨대, 195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용접조각을 수용했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철 용접조각이 크게 유행했던 것은 단순히 서구미술을 따라간 것으로 간주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제적인 사정과 함께, 철이라는 단단한 재료를 불꽃으로 녹여 작품을 제작하는 기법은 전쟁을 경험하고 4.19와 5.16과 같은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겪은 젊은이의 감성에도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박석원은 1960년대에 거의 전적으로 용접조각에 전념하면서 작가로서 성장해 나갔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박석원의 초기용접조각은 1961년에 제작한 ‘U교수상’이다. 초상조각이라면 으레 소조 기법으로 주인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던 시절에, 철을 용집해서 표현적인 초상조각을 제작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특히 얼굴 부분만을 강조하고 있으며 용접의 흔적을 살려 얼굴을 거칠게 표현하고 있어, 마리노 마리니의 초상조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U교수상>은 구상적인 작품이라면, 1962년 국전에 출품했던 <작품8>은 추상적인 작품이다. 기본적으로 인체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수직과 수평의 구도 안에 둥근 덩어리가 있고 그것을 감싸는 형상과 그 형상을 꿰뚫고 솟아있는 날카로운 수직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석원(한국현대추상조각 선구자 박석원,A South Korea Sculptor PARK SUK WON,조각가 박석원,朴石元,PARK SUK WON,한국현대추상조각 선각자 박석원,박석원 작가)은 철 용접조각의 조형적 특성을 살려, 예리한 표현과 공간의 표현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이는 그의 이후의 용접조각을 예고하는 작품이다.

△글=김이순 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