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픽=이코노믹리뷰 DB

[이코노믹리뷰=박민규 기자]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 기술을 두고 서로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소한 가운데, LG화학이 지난해 4월 제기한 영업 비밀 침해 소송에 대한 미 ITC의 최종 결정이 보류돼 이목이 쏠린다.

양 사는 당초 예정된 ITC 최종 결정 날짜가 약 1주일 앞으로 다가온 시점까지 반박을 주고 받으며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이다. 현재까지 상황은 LG화학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나, 궁지에 몰린 SK이노베이션이 활로를 찾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 ITC는 LG화학의 영업 비밀 침해소에 대한 최종 결정을 다음 달 5일에서 26일로 3주 연기한다고 지난 25일(현지 시간) 고지한 상황이다. 이에 대한 이유는 따로 공지되지 않았으나, 최근 미국에서 관측되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세에 따른 결정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앞서 진행되고 있던 판결들이 줄줄이 미뤄지면서, 해당 소송에 대한 건도 자연스럽게 유보됐다는 것이다.

앞서 ITC는 지난 2월 SK이노베이션에 '조기 패소' 예비 결정을 내린 바 있으나, 이에 대한 SK이노베이션의 이의 신청 또한 받아들이면서 현재 해당 사안에 대한 재검토를 진행하고 있다.

ITC가 최종 결정에서 예비 결정을 뒤집은 전례가 없고 외국 기업 간 분쟁을 자국 사례만큼 성실히 검토할지 또한 의문스러워, 이미 LG화학 쪽으로 기운 형세가 반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하지만 ITC가 만장일치로 예비 결정에 대한 재검토를 의결하고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양 쪽 모두에 소송의 본질에 대한 답변서를 요청하는 등의 행보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최종 결정 연기가 기존 결정에 대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ITC는 오는 10월 26일 전까지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에 대해 제기한 영업 비밀 침해 및 증거 인멸 혐의는 물론, 최종 결정이 미국에 미칠 영향까지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더불어 SK이노베이션이 따로 제소한 LG화학 특허 침해 건 또한 해당 판결과의 상호 작용이 이뤄질 전망이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SK이노베이션에게 희망적인 시나리오는 4가지다.

최선은 ITC가 예비 결정에 대한 '수정'을 결론으로 내려 해당 소송을 새로 검토하는 것이다. SK이노베이션은 실제로 이 같은 가능성에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여태 LG화학에 유리하게 돌아가던 판도가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양사의 분위기도 반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현실적인 시나리오는 ITC가 SK이노베이션 패소를 최종 결정으로 고수하더라도 미국 내 일자리 이슈 등을 감안해 공청회를 개최, SK이노베이션의 현지 공장 운영 여부를 추가로 따질 수 있다는 점이다. 

앞서 SK이노베이션이 해당 소송에서 최종적으로 패소할 경우,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관련 부품·소재 등의 미국 내 수입이 전면 금지돼 미국 배터리 사업을 영위하기 어려워질 것으로 관측됐다.

하지만 만약 ITC가 공청회가 열고, 그 결과 SK이노베이션의 미국 배터리 사업이 미국 이익에 부합한다는 의견이 우세할 시 SK이노베이션의 미국 배터리 공장 가동은 가능해질 것으로 점쳐진다.

SK이노베이션은 현재 미 조지아주에 총 25억달러(약 2조9700억원)를 들여 21.5기가와트시(GWh)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건설하고 있으며, 해당 공장은 일자리 2000개 이상을 만들 것으로 예상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SK이노베이션의 고객사인 미국 포드·폭스바겐 등 자동차 업체들과 조지아주 당국은 올해 7월 SK이노베이션의 현지 생산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문을 ITC에 제출하기도 했다.

여기에 최태원 SK 회장이 SK이노베이션의 미국 배터리 사업에 최대 50억달러(약 5조8700억원)까지 투자할 수 있다고 거론한 바 역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유례 없는 고용 위기를 맞은 미국에게 매력적일 요소다.

또 SK이노베이션은 지난달 미국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에 한국인을 불법으로 고용했다는 의혹에 휩싸이기도 했으나, 최근 내년 말까지 1000명 이상의 현지 인력을 채용할 계획을 밝히면서 논란 수습에 나선 모습이다. 

SK이노베이션이 일자리 창출이라는, 미국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ITC의 최종 결정에 대해 비토(거부권)를 행사할 가능성도 언급해 볼 수 있다.

앞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19년 12월 "트럼프 행정부는 현지 배터리 공장 수를 늘리고 싶어 한다"며 "트럼프 대통령은 ITC가 SK이노베이션에 관대한 결정을 내리길 원할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ITC가 SK이노베이션에 미국 내 수입 금지를 판결하더라도, 무역대표부(USTR) 선에서 거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2013년 삼성-애플 특허권 침해 소송 당시 ITC의 애플 패소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한 전례가 있다. 그러나 이는 자국 기업 보호 차원에서 이례적으로 이루어진 조치로, 해외 기업 간 분쟁에는 적용되기 힘들 것이라는 의견이 중론이다. 영업 비밀과 지적 재산권 등의 가치를 엄격히 수호해 온 국가가 해외 기업 때문에 그 가치를 쉽게 저버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LG화학도 미국에서 현지 완성차 업체인 제너럴모터스(GM)와 합작 법인을 설립하고 있어, 미국 정부가 고용 효과를 노리고 SK이노베이션을 비호하더라도 형평성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는 전망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현재 교착 상태에 빠진 LG화학-SK이노베이션 합의가 그룹 총수 간 '담판'이나 우리 정부의 개입으로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희박하게나마 조명되나,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측은 모두 고개를 젓는 모습이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최태원 회장이 총수로서 (SK이노베이션의 미국 배터리 사업에 대한) 투자 계획을 밝힌 것과 현재 벌어지고 있는 소송전에 입김을 행사하는 것은 결이 다른 문제"라며 "오히려 최 회장의 (소송전) 개입은 이례적일 것"이라며 총수 회동 가능성을 일축했다.

LG화학 측은 외부의 개입으로 소송전의 본질이 흐려질 것을 경계하는 분위기다. LG화학 관계자는 "총수나 정부 개입으로 피해·가해 사실이 유야무야 흐려지고 화해만 부각된다면, 이는 나쁜 선례를 남기는 꼴"이라며 "현재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 소송전은 나중에 중국 CATL과 한국 배터리 업체 간 법적 분쟁의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영업 비밀 등에 대한 의식이 낮아져 시장의 발전 가능성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피해나 보상 금액에 대한 명확한 합의 없이 'K-배터리'의 명분만 강조되는 것을 꺼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한편, 국내 배터리 업계는 전반적으로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간 합의를 최선으로 꼽고 있다. ITC의 결정이 어떻든 한 쪽이 불복하는 상황이 거듭돼 항소와 항소가 꼬리를 물면서 양 사의 소송전이 3~4년 이상 장기화될 경우, 현재 세계 무대에서 부상하고 있는 'K-배터리'가 약화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시간적·금전적 손실이 상당히 클 뿐만 아니라, 급변하는 전기 자동차 및 배터리 시장에서 한국 배터리 업체들을 맹추격 중인 중국·일본 업체들에게 주도권을 뺏길 수도 있다는 진단이다.

ITC 최종 결정 연기에 LG화학 측은 흔들림 없이 승리를 확신하는 모습이고, SK이노베이션은 소송을 뒤집을 변수를 기대하는 눈치다. 양 사 모두 합의 진전이나 항소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일절 꺼내지 않으나, 패소할 경우 LG화학은 항소하고 SK이노베이션은 합의에 주력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