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積7536,나무 45×220×40㎝, 1975

<절(切)> 작업에 있어 돌을 쓰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 중반 경부터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시기의 작업은 역시 그 자신의 말대로 재료의 재질의 특성을 외면하고 목조에 있어서처럼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기도 하고 형태를 가꾸어 내는’ 그러한 작업이었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 말 경에 이르면서 ‘돌을 돌 자체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인식과 함께 일체의 인위적 가공이 배제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인식은 요컨대 석조에 있어 돌의 원래의 본성을 그대로 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돌이라고 하는 물체의 삶에다 그것을 다루는 스스로를 동화시킨다는 것. 다시 말해서 물체와 더불어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스스로를 자연에 동화내지는 통합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만일 돌이라고 하는 물체가 그 어떤 변용을 일으킨다고 했을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생성적 변용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만일에 조각장업의 기본 행위가 단순히 돌이라고 하는 자연의 산물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 또는 자연의 변용의 상태로서의 제시 그것으로 머무는 것이라고 했을 때 ‘작품’ 그 자체의 실체는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 積7539, 나무 55×50×15㎝, 1975

이와 관련하여 나는 1980년 9월 일본 도쿄의 무라마츠 화랑에서 가진 박석원(A South Korea Sculptor PARK SUK WON,조각가 박석원,朴石元,PARK SUK WON,한국현대추상조각 선각자 박석원,박석원 작가)개인전 서문에서 일찍이 다음과 같이 쓴 바가 있다.

“근 2~3년 동안에 있어서의 박석원의 조각적 기본 테마는 ‘절단’이라는 데 있다. 하나의 물체 또는 덩어리를 절단함으로써 물체는 변용하고 허상 또는 실상으로서의 독자적인 스스로의 공간을 점유하기에 이른다.

‘절단’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두 말할 계도 없이 물리적 현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박석원의 경우 이 물리적 현상은 이를테면 단순한 균열과 같은 자연발생적인 현상이 아닐 뿐만 아니라 면밀하게 계산된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며 바로 여기에서 물리적인 것과 개념적인 하나의 덩어리 속에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글=이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