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휴가를 스무 번을 넘게 받았지만, 늘 불쌍한 놈이었다.

예전에 가수 비가 휴가를 많이 나왔다고 언론에서 떠들었던 적이 있었다. TV를 보던 나는 ‘나보다 적네!’하고 웃어 넘겼다. 최근에 또 군대 휴가 얘기가 도배되고 있다. ‘나의 휴가에 비하면 턱도 없네’가 내 소회다.

91군번의 4000번째 논산 입영자였으니, 무려 30년 전의 일이다. 자대 배치를 받고 보니 어마무시한 부대였다. 붉은색 장성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는데 별이 자그마치 4개짜리였다. 이름하여 3군 사령부. 내가 근무한 곳은 사령부 직할 통신여단의 직할대대라, 군 사령부 영내에 위치했다. 주특기는 대대 보급행정병으로 960이었다. 대한민국 성인남자들의 거의 대다수는 누구나 군대에서 부여 받은 주특기에 따른 세자리 숫자를 죽을 때까지 기억할 것이다. 제일 유명한 것이 ‘일빵빵’일테지만.

말 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최고 상급부대에서는 모든 것들이 원칙적으로 진행된다. 물론 개중에는 부모찬스를 써서 편한 보직을 맡고 있는 병사들도 많았다. 전입된 이튿날 고참들이 내게 혹시 그런 빽이나 연줄이 있는지 확인하고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일단 좀 맞자’며 가슴팍을 몇 차례 맞았다. 그 때문에 갈비뼈에 금이 갔는지, 몇 달은 가슴 부위에서 통증이 계속된 일도 있었다. 그렇다 애초에 빽이 있는 애들은 눈에 띄지 않는 특수보직으로 갔기에, 보이는 대부분은 그냥 병사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원칙적으로 적용될 수 밖에 없었다.

 

군대에서 휴가는 젤 많았지만, 가장 불쌍한 놈

수도권에 살던 병사에겐 매월 한차례 외박이 가능했고, 위수지역을 넘으면 분기에 3일의 특박이 주어졌다. 정기휴가는 일병 때 15일, 상병 때 15일, 말년 휴가 10일이라, 이 두 가지만 합쳐도 보통은 넘는다. 근데 내 보직은 좀 특수해서 대규모 군사훈련이나 거의 분기별로 실시되는 지휘검열을 끝내고 나면 고생했다고 3일의 위로휴가를 받았다. 그것도 자주. 대학 1학년때에 군사훈련을 받아서 동기들보다 45일을 먼저 제대했다. 28.5개월을 근무기간 중에 정기휴가, 분기특박에 위로휴가까지 스물하고도 두 세 번의 휴가를 갔다. 심지어 여단 체육대회 배구종목에서 우승해서 중대원 전체가 휴가를 받은 적도 있다. 사실 휴가가 너무 많아서, 횟수도 잘 모른다. 스물 다섯 번은 안되지만 스무 번은 넘는다.

이 정도 휴가를 갔다면, 누구나 내가 엄청난 특혜를 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근무했던 부대에서 가장 불쌍한 놈이었다. 대대군수 행정실에서 근무했기에 식사 때마다 누군가가 교대해 주지 않으면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물품만 잘 수령해서 나눠주면 끝이라 생각할 테지만, 업무 범위는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다. 부대 내 배차를 신청해야 한다. 부대 외부로 이동하는 모든 차량은 미리 신청해서 행정처리가 되어야 한다. 부대 내의 모든 물품을 관리한다. 우유 한 팩, 사과 반쪽, 간장 한 병 식자재부터 총과 탄약 그리고 차량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삽, 호미, 낫 같은 공구를 수령하기 위해서는 부러진 호미 날이나 망가진 삽 자루라도 반납을 해야 한다는 것은 일반 병들도 모를 것이다.

지휘 검열이 나오면 부대 내의 모든 물품(창고에 있든 병들이 착용하고 있든)과 서류상의 숫자들이 일치해야 한다. 살아있는 병사들은 인사과에서 처리하지만, 사망 시에는 군수과에서 처리한다. 일명 군수행정의 지옥이라 불리는 연화장 보고서, 다행이 난 그 경험은 없다. 하지만 이등병 때 서무계로 시작하여 상병 때는 신설 대대 군수행정까지 하면서 다루지 않았던 군수 분야가 없다. 지휘검열이 일정이 잡히면 그 전 일주일 정도는 죽음이다. 불침번을 설 때도 서서 서류정리를 했고, 불침번이 끝나면 취침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일했다. 그렇게 고생해야 겨우 끝난다. 부대에서 위로해주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평소 훈련 보다는 참호 보수 같은 삽질하는 작업이 훨씬 좋다. 부대 밖에서 하는 대민 지원은 서로 가고 싶어 한다. 가끔 막걸리에 파전도 얻어 먹고, 호주머니 푼돈으로 과자도 사 먹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선 쉴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이등병 때부터 제대할 때까지 삽질 한번 해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고참 동기들이 반바지 차림에 냉수 주전자와 PX 간식거리를 들고 산으로 들로 작업 나가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폭설이 내렸던 어느 날은 지휘검열 준비로 사흘 꼬박 밤을 샜고, 중대에서는 제설작업으로 엉덩이 한번 붙일 새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 결국 그날 쓰러져 처음으로 입원실에서 수액을 달고 있었다. 하지만 겨우 반나절 입원 뒤엔 또 다시 사무실에서 일해야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난 또 위로 휴가를 나갔다. 전 부대원이 제설이야 뭐야 정신 없던 와중이었다. 나의 부대원 모두는 조금도 나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젊은 놈이 쓰러질 정도로 행정 일을 해야만 하는 불쌍한 시선뿐이었다. 그렇게 군대에서 가장 큰 소망인 휴가를 그렇게도 뻔질나게 나갔지만 불쌍한 놈일 뿐이었다.

미국 아니 전 세계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서 그 누구도 뛰어 넘을 수 없는 전설이었지만, 같은 팀원들에게조차 두려움 그 자체였고, 재수없는 놈이라 손가락질 받는 놈(사실 놈을 붙일 만한 사람은 아니고)이 있다. 마이클 조던이다. 내 생각에는 20세기 그리고 21세기를 다 보더라도 그에 필적할만한 스포츠맨은 없는 듯 하다. 그만큼 그는 삶은 승리와 성공으로 이어지며 레전드라 불린다. 농구인들도 팬들도 그리고 심지어 농구의 농자도 모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를 농구의 신으로 꼽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마이클 조던과 시카고 불스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영원히 잊히지 않는 레전드 중의 레전드다.

 

개처럼 일만 하다간 결국 개 취급 받게 돼

마이클 조던은 전 세계인의 우상이었지만, 사실 함께 일하던 동료들에게도 그의 존재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팀 동료들은 마이클 조던으로 인해 숨 막힐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고, 함께 있는 것이 괴로운 일이었으며, 재수없는 X자식으로 불렀다. 조던은 농구장 밖에서는 친근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었지만, 농구장에서는 철저한 악역 겸 터프가이를 맡아, 팀원들을 다그쳤다. 야생의 정글과도 같은 NBA라는 무대에서 이기기 위함이었다. 승리를 위한 대가였고 리더십에 대한 대가로 그는 항상 자신이 솔선수범하며 살인적인 강도의 훈련을 팀원들에게 요구했다. 자기가 생각하는 그 기준에 맞게 남들도 뛰어야 했고, 그 이하는 용납하지 않았다. 때문에 자기와 발 맞춰야 하는 팀원들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무섭게 몰아 부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영원한 레전드가 됐다.

누가 시킨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기기 위해, 농구는 팀 스포츠이기에 스스로를 단련하고 팀원들을 다그쳤다. 관중석에서 보면 그는 착한 에이스이자 히어로였지만, 함께 뛰는 사람들에게는 “착한 사람은 무슨, 폭군이면 몰라도”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든 완전한 것에 대해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묻지 않는다. 대신 그것이 마법에 의해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현재의 사실만을 즐긴다.” 사람들은 성공한 자들의 화려한 모습만 부러워 할 뿐 정작 그 사람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들 부모님들은 “앞도 말고 뒤도 말고 중간만 가라”고 하셨다. 군대 가기 전에 ‘니가 먼저 뭘 하겠다고 자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다치지나 말라고 하셨고, 대학교에서도 데모 모임 같은 데는 얼씬도 하지 말고, 앞에 있지 말라는 것이 당부의 처음과 끝이다시피 했다.

조던은 땀 흘리지 않았을까? 조던에게는 쉬웠을까? 인터넷에 떠 도는 유명한 말들이 많다. 그 중에 기억 남는 몇 가지가 있다. ‘개처럼 일하면 개 취급 받는다.’ ‘아무도 못하는 일 해주면, 아무도 몰라준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묵묵히 일하다 보면, 결국 남 좋은 일만 하게 된다.’ 어쩌다 한번이면 몰라도, 개처럼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조직 내에서 그 누구도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을 나서서 하는 사람, 그 일이 만만하고 쉬워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도 등허리에 식은 땀 흘려가며 겨우 해결하는 것이다.

탐스럽게 열린 사과를 따 먹는 것은 좋아하지만, 거름 주고 김 매고 가지치고 벌레 잡는 수고로움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밭 매고 거름 주는 일에 참여 시키는 것에는 낯을 붉히겠지만, 사과 따먹는 것에 제외시키는 것에 흥분하게 되는 것이 사람이다. 하지만 모름지기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인 조직이라면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더위를 피해 아이스커피나 한잔씩 하자고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아무리 더워도 이겨내고 성공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해 모인 조직이라면 말이다. 그럴 때 인위적인 조직문화가 필요하다.

일본의 미라이공업이라는 곳에 ‘상장 과장’이라는 말이 있었다. 야마다 아키오 회장은 독특한 경영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미라이공업에서 직위라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고, 서로 별명이나 ‘~~씨’로 편하게 불렀다. 근데 이 미라이공업이 주식 상장을 하게 되면서 상장기업의 규정상 일정 수 이상의 과장이 필요했다. 이때 과장들을 뽑기 위해 야마다 회장은 선풍기를 이용했다. 각자의 프로필이 담긴 서류들을 선풍기 앞에서 날려서 멀리 날아간 서류의 주인공들을 과장으로 올렸다.

“과장이 될만한 그릇이 아니면 어쩌려고 합니까?” “합당한 그릇인지 시켜보지도 않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라는 주위의 만류에 야마다 회장은 “입사자 모두가 고졸 이상이니, 직함을 먼저 주고 이들의 의욕을 100 퍼센트 끌어내면 됩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직원들이 실패를 하면 보상을 하고, 연말, 5월 황금연휴, 여름 휴가 등등 일본에서 가장 많은 휴가를 주었고, 직원들이 성의를 보여 준 것에 대한 보상도 확실하게 했다. ‘직원들이 최선을 다해주는 것이 곧 회사가 성장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실천했고, 그 덕분에 기업 매출은 우상향으로 가파르게 성장했고, 창업 이후 40년 이상을 적자라는 것을 모르고 지냈다.

야마다 회장 같은 경영철학은 아주 아주 드물다. 하지만 어느 조직이나 조직구성원들의 열정은 필요로 하고, 알아주지 않아도 고생을 사서하고 남들보다 많은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에이스 같은 사람들이 제 멋에 겨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해야 한다면 자기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에이스처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함께 한다는 마음, 그리고 그런 마음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조직이 성장하는 조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