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재편이 이뤄지고 있다. 태풍의 진원지는 미국이다.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자국 중심 공급망 구축에 속도를 내는 한편 TSMC의 미국 공장 건설 유치를 끌어내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고 있다. 화웨이에 대한 압박으로 대표되는 중국 반도체 굴기에 대한 공격도 매섭게 벌어지는 한편 추가 제재 가능성까지 시사하는 중이다. 그 연장선에서 엔비디아는 영국의 암을 품었다.

업계에서는 미국 중심의 반도체 시장 재편이 이뤄지고 있다는 분석이 중론이다. 다만 모든 게임의 법칙이 미국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나온다. 무엇보다 중국이 앉아서 당할 분위기가 아니다.

미국의 뿌리찾기?
반도체 시장의 뿌리를 가진 미국은 최근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태풍으로 부상하고 있다. 물론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패권은 삼성전자 등 한국 업체에 빼앗기고, 무엇보다 중국의 공세가 상당하다. 그러나 미국의 반도체 업계 총공격은 최근 상당히 날카롭게 전개되는 중이다.

미국이 화웨이 등 중국 반도체 업계와 오랫동안 긴밀하게 협업한 대만 TSMC의 손을 잡은 대목이 극적이다. TSMC는 지난 미중 무역전쟁 당시에도 끈질기게 화웨이와의 동맹전선을 유지했으나 코로나19와 홍콩 국가보안법 사태를 겪으며 미중 갈등이 커지자 미국 공장 건설을 매개로 완전히 미국의 편으로 돌아섰다. 

화웨이와 신규 거래를 차단하는 대신 미국 팹리스 업체들과의 연결고리를 강화하고 나섰다.

화웨이에 대해서는 꼼꼼하고 광범위한 압박 전술이 눈길을 끈다. 기본적인 반도체 수급을 막아버리는 선에서 벗어나 미국의 소프트웨어 기술 등이 들어간 모든 반도체 공급을 원천차단했다. 화웨이는 대만의 미디어텍을 통한 우회경로까지 타진했으나 모든 활로가 막히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미국은 한 발 더 나아가 화웨이에 이어 중국 파운드리 업체인 SMIC에 대한 제재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 

중국 바이트댄스의 틱톡에 대한 압박에 따른 분할매각에 이어, 실리콘밸리의 엔비디아가 영국의 암을 인수하는 수준에도 이르렀다. 일본 소프트뱅크는 14일 최대 400억달러(약 47조4000억원)에 암을 매각한다고 발표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엔비디아는 시가총액만 3000억달러에 달하는, 글로벌 빅3 반도체 기업이 됐다.

▲ 출처=갈무리

젠슨 황(Jensen Huang) 엔비디아 창립자 겸 CEO는 “AI는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기술력으로 컴퓨팅의 새 바람을 일으켰다”면서 “미래에는 인공지능을 움직이는 수많은 컴퓨터가 오늘날의 인간인터넷(IoP)보다 수천 배는 큰 사물인터넷(IoT)을 새롭게 창조할 것이다. 엔비디아와 암의 결합으로 이러한 AI 시대에 높은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탄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반격
미국의 반도체 전략은 국가적 차원에서 중국에 대한 강력한 압박을 추구, 이를 바탕으로 자국 기업의 보폭을 넓혀주는 쪽으로 가동되는 중이다.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직접적인 야욕은 아직 보이지 않으나 중국의 메모리 반도체 체력을 꺾는 쪽에 집중하며 시스템 반도체 전반에 대한 로드맵을 힘있게 끌어가는 중이다.

중국 반도체 업계 입장에서는 최악의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21일 세계무역기구(WTO) 국제무역센터(ITC)의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이 전세계에서 수입한 반도체는 약 3059억9783만달러(약 355조원)에 이른다. 전년 3127억달러에 비하면 2.2% 소폭 감소했으나 여전히 막대한 반도체를 빨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글로벌 반도체 수요 시장의 30%다.

문제는 미국의 압박으로 화웨이가 손발이 묶이는 등, 중국의 반도체 수입이 크게 줄어들 조짐을 보이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통신장비 및 스마트폰 등 중국의 전자제품 경쟁력이 크게 하락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반도체부터 시작된 위기가 중국 ICT 전자 시장 전반의 위협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다만 미국의 압박에 따라 중국으로 흘러가는 반도체 물량이 막히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중국이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미국의 반도체는 물론 미국 반도체 업계와 긴밀하게 협력하는 대만 등 외국 기업과의 거래가 차단되면 당장의 고통은 크겠으나, 장기적 관점에서는 반도체 자급률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초적인 발판을 이미 마련됐다. 

중국 정부는 13차 5개년(2016~2020년) 계획에 따라 후 10년간 약 170조원을 반도체 산업에 투자할 방침이다. 이후 중국 반도체 굴기는 비록 미국의 제재에 푸젠진화가 D램 생산을 포기하는 등 부침을 겪었으나 꾸준히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지원은 지금도 공격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이 한창이던 지난해 10월 27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이 34조원의 반도체 펀드를 조성해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한다고 보도했다. 중국 국영 담배회사 및 개발은행이 참여한 본 반도체 펀드는 액수 기준으로 메모리 반도체 2개 라인을 건설할 수 있는 비용이다. WSJ는 이를 두고 “중국의 반도체 군자금”이라고 표현했다.

그 연장선에서 반도체 자급율을 올리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실제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5월 중앙정치국(中央政治局) 회의에서 "경제 자력갱생"을 기치로 내 걸었다. 코로나19로 초유의 고립경제 가능성이 타진되는 가운데 홍콩 국가보안법 사태를 기점으로 미국 등 서방과의 대립이 격렬해지자 '홀로 살아남을 수 있는 전략'에도 시선을 돌린 셈이다. YMTC는 나아가 SSD 'Zhitai 실물까지 판매에 돌입했다. 

미국의 반도체 압박이 중국으로 흘러가는 메모리 반도체 물량 고사작전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당연히 중국 전자 업계에 타격을 줄 전망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기점으로 오히려 메모리 반도체 자급률을 올리는 한편 관련 투자에 속도를 내는 분위기다. 미국의 압박이 반도체 수급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중국이 단기적 손실을 감수하며 오히려 자강전략을 추진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출처=갈무리

영국 암의 중국 지사인 암차이나가 최근 중국 정부의 손에 떨어진 일도 있었다. 지난 6월 영국의 암 본사는 중국법인의 CEO인 앨런 우를 해고하려고 했으나, 앨런 우는 이에 불복해 현재 독자적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중국인이 대부분인 현지법인 직원들도 앨런 우를 ‘옹립’한 것으로 확인됐다. 51%의 지분을 가진 중국 정부의 비호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반도체 기업에 대한 법인세 면세 정책도 추진된다. 홍콩 SCMP에 따르면 15년 이상 사업을 해온 중국 반도체 제조기업이 28나노 이상의 미세공정을 가질 경우 10년간 법인세를 면제받을 수 있을 전망이다. 그 외 공정에는 5년간 면제, 이후 5년간 세율을 조절하는 방식이다.

미국 반도체 업계도 걱정하고 있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는 미국 정부의 화웨이 압박에 대해 "미국 정부가 자국 기업에 미치는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국가 안보를 달성하려는 기존의 부분적인 제한 입장에서 갑자기 선회한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고 당황스럽다"면서 "중국에 민감하지 않은 상용 반도체를 판매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의 반도체 연구와 혁신을 촉진하고, 이것이 미국의 경제력과 국가 안보에 핵심이라는 견해를 다시 한번 강조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물론 중국 반도체 굴기가 모든 면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미국의 압박에 기민한 대응을 보이는 것은 분명하다. 한중 테크인사이더 연구소의 박명환 수석연구원은 "미국의 중국에 대한 압박과 자국 중심의 반도체 전략에 이어 최근 거둔 연이은 성과는 분명 고무적"이라면서도 "이러한 사실만 가지고 미국의 패권을 확답하기는 어려운 구석이 많은 것도 사실"이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