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박민규 기자] 내연 기관 자동차의 시대가 저물어 간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사상 최악의 변수까지 맞닥뜨리면서 정유 업계는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실제로 국내 정유 4사(SK이노베이션·GS칼텍스·에쓰오일·현대오일뱅크)는 코로나19 여파로 지난 상반기에만 5조원이 넘는 적자를 냈다. 다만 2분기 적자 폭은 1분기보다 큰 폭 감소해 하반기 업황 개선을 기대하는 분위기도 연출됐으나, 결론적으로 하반기에도 석유 수요 회복은 요원해 보인다.

코로나19 확산세가 지속되면서 정유 업체의 수익에 직결되는 정제 마진도 배럴당 1달러의 고지를 넘지 못하고 이달 첫째 주 다시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또한 지난 4월 유예됐던 약 1조4000억원 규모의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기한도 다가와, 국내 정유사들의 유동성 위기가 심화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정유 업계의 성수기로 꼽히는 '드라이빙 시즌'도 올해에는 없었다는 말이 나온다. 통상적으로 5월 말부터 9월까지를 드라이빙 시즌으로 보는데, 이 기간 여행이 늘어나 휘발유·등유 등 연료유 소비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장기화에 장마·태풍 등 자연 재해까지 겹치면서 이동 수요는 기대 이하의 저점에 머물렀고, 국제유가는 말 그대로 출렁이고 있다.

그렇다면 주유소들은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주유소들은 더 이상 기존 주력인 석유 사업에 사활을 걸지 않는다. 이들은 때로 정체성과 전혀 관계 없는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코로나19 위기를 타개하고 있기도 하다. 동시에 미래 유망 산업으로 꼽히는 이커머스와 모빌리티, 신·재생 에너지 등으로 활로를 개척해 지속 가능성을 타진하는 모습이다.

언택트 역이용…이커머스의 '물류 요충지'로

언택트(untact·비대면) 트렌드로 인한 이동 수요 감소를 역으로 이용한 전략이 눈에 띈다. 주유소는 이제 물류 거점으로도 역할하고 있다. 언택트 소비가 급증하면서 물류 수요도 견조히 이어지고 있는 데 착안한 것이다. 사실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이커머스 업체들의 부상을 눈여겨 보고 물류 사업에 가세한 정유사들도 있다.

▲ GS칼텍스는 지난 6월 21일 제주 무수천 주유소에서 드론 배송 시연 행사를 열었다. 출처=GS리테일

GS칼텍스는 지난 6월 제주 무수천 주유소에서 '드론 배송'을 시연한 바 있다. GS 편의점 앱을 통해 물품 주문이 들어오면, GS칼텍스 주유소가 인근에 있는 GS25의 상품을 드론에 실어 배달하는 서비스다. 배송 거리는 왕복 2km 안팎이며, 비행 시간은 5~6분 정도로 알려졌다.

당시 허세홍 GS칼텍스 사장은 "주유소는 물류 차량이 진입하기 용이하고 물품 적재 공간도 충분하다"며 "뿐만 아니라, 전국에 분포돼 있으니 물류 거점화에 매우 적합하다"고 강조했다.

SK네트웍스의 주유소 사업을 인수하며 국내 주유소 시장 2위로 올라선 현대오일뱅크는 지난해 10월 쿠팡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주유소를 로켓 배송의 거점으로 활용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쿠팡에 유휴 부지를 제공해 임대 수익을 얻는 방식이다.

로켓 배송 거점으로 사용되는 주유소는 초기 10개 가량이었으나, 최근 22개로 집계됐다. 현대오일뱅크는 내년 상반기까지 해당 사업을 적용하는 주유소를 50개로 확대할 예정이다. 더해 현대오일뱅크는 삼성카드와 함께 빅데이터를 수집해 주유소 이용자의 소비 패턴을 파악, 이를 향후 진출할 차량 관리 플랫폼 사업에 활용할 계획이다.

또 현대오일뱅크는 지난 2019년 상반기부터 서울 시내 5개 주유소에 여성 안심 택배함을 운영하고 있다.

SK에너지는 이미 2018년 주유소 기반 택배 서비스 '홈픽'을 개시했으며, 물품 반송과 수선까지 영역을 확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종합형 모빌리티 플랫폼'으로 진화

내연 기관 자동차를 위해 존재했던 주유소들이 이제는 모빌리티 배터리 충전 및 공유 서비스 등 사업 다각화에 나서고 있다. 정확히는 내연 기관 차를 위한 주유∙세차 등 일반 서비스만 고집할 수는 없게 됐다. 전기 자동차 등 친환경 에너지 기반의 운송 수단부터 전동 킥보드와 전기 자전거 등 마이크로 모빌리티까지 각양각색의 모빌리티들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 머핀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한 주유 프로세스. 출처=SK이노베이션

국내에서 가장 많은 주유소를 보유한 SK에너지는 e-모빌리티에 초점을 맞추는 모습이다. SK에너지는 지난 6월 통합 차량 관리 플랫폼을 개발하고 있으며, 이를 실행하기 위한 애플리케이션 '머핀'을 도입했다고 밝혔다. 소비자가 앱에 차량 번호·유종·주유량·금액 등을 등록한 후 주유소를 방문하면, 주유소는 차량 번호를 조회해 곧바로 주유 주문과 결제를 진행하는 시스템이다.

당시 SK에너지는 수도권 소재 20여개 주유소에서 시범적으로 해당 서비스를 제공했으나, 올해 연말까지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또한 세차·주차·발레파킹 등 서비스부터 자동차 정비와 보험까지 사업 영역을 점진적으로 넓혀가겠다는 설명이다.

일찍이 모빌리티 사업에 대한 야심을 드러내 온 GS칼텍스는 지난해 전동 킥보드 공유 업체인 라임과 파트너십을 체결, 전국 주유소에서 전동 킥보드 충전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한 바 있다.

올해에는 카카오모빌리티와 전기 자전거 사업에서 협력한다는 설명이다. GS칼텍스는 지난달부터 서울 송파구·인천·전주·울산 지역에 있는 총 5개 주유소에 전기 자전거 '카카오 T 바이크'의 배터리를 충전할 수 있는 시설을 설치·운영 해왔다. GS칼텍스의 자회사인 GS엠비즈도 해당 사업에 참여해 전기 자전거 정비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했다.

또 GS칼텍스는 차량 공유 업체 그린카와의 제휴로 주유소 130여곳에 공유 차량을 배치해 주차 및 차량 관리 서비스를 제공 중이다.

▲ 에쓰오일은 공유 전기자전거 서비스 업체인 일레클과 제휴해 주유소를 거점으로 하는 공유 플랫폼 서비스를 개시한다고 지난 8월 18일 밝혔다. 출처=에쓰오일

에쓰오일 또한 공유 전기 자전거 서비스 업체인 일레클과 제휴해 주유소 거점의 공유 플랫폼 서비스를 시작했다. 주유소 유휴 공간에 전기 자전거를 주차·대여·반납 할 수 있는 '일레클 존'을 운영하고, 자전거 배터리 충전·정비 등 관련 사업도 점차 확대한다는 설명이다. 일레클 존은 지난달 중순부터 서울 서대문구 소재 주유소에서 시범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에쓰오일은 세종·부천·김포 등으로 해당 서비스를 늘릴 계획이다.

또 에쓰오일의 경우 유류 판매와의 연계성이 높은 편의 서비스를 강화해 경쟁력을 높이려는 모습으로, 최근 언택트 트렌드에 맞춰 비대면 셀프 세차 등을 도입하고 있다. 에쓰오일은 지난해 세븐일레븐과 제휴해 국내 최초 주유소 무인 편의점을 서울 강서구 소재 주유소에 개소했으며, 이베이와 손잡고 무인 택배 서비스 및 세탁 박스 시스템을 도입하기도 했다.

탈(脫)정유 가속화하나…정유사가 내놓은 '친환경' 에너지 솔루션

조경목 SK에너지 사장은 지난 7월 31일 "석유 사업 중심의 포트폴리오를 친환경 사업과 플랫폼 사업 두 축을 중심으로 빠르게 전환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정유사가 전통적으로 주력해 온 석유 사업을 뒤로하겠다는 것은 이제 석유 사업의 사업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처럼 들리기도 한다.

화석 연료 시대에서 오래도록 황금기를 누렸던 정유사들이 이제는 전기·수소 자동차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친환경 업체로 역설적 변신을 꾀하는 모습이다.

SK에너지는 주유소에 연료 전지나 태양광 발전 설비를 도입해 전기와 수소를 공급할 계획이다. SK에너지는 현재 주유소 포함 10여개 사업장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 전력을 생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기적으로는 지역 전력을 공급하는 마이크로그리드(소규모 독립형 전력망) 사업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설명이다. 

SK에너지는 오는 2023년까지 전국 190개 주유소에 전기차 충전 시설을 구비할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현대오일뱅크도 전기차 충전 시설을 확충하고 있다. 전기차 충전이 가능한 주유소는 지난해 4개에서 현재 19개로 5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내년 상반기까지 50개 이상으로 확대될 것으로 현대오일뱅크는 보고 있다.

지난해 전기차 충전 사업에 뛰어든 GS칼텍스는 현재 전국 44개 주유소∙충전소에 100킬로와트(kW)급 전기차 충전기를 설치∙운영 중이며, 이를 2022년까지 100kW 이상 초급속 충전기 160개 수준으로 늘릴 계획이다. 또 올해 5월에는 현대자동차와 협업해 서울 강동구 소재 주유소·LPG 충전소 부지에 수소 충전소를 설치했다는 설명이다.

▲ 전기자동차용 배터리 안전 진단 서비스의 시스템. 출처=LG화학

한편 GS칼텍스는 국내 배터리 1위 업체인 LG화학 등 다수 업체들과 함께 '전기차용 배터리 특화 서비스'도 개발하고 있다.

우선 배터리 안전 진단 서비스를 개발 중이라는 설명이다. 그린카와 케이에스티모빌리티의 전기차가 GS칼텍스의 전기차 충전소에서 충전되는 동안 차량의 주행·충전 데이터가 클라우드에 저장되고, 이를 LG화학의 빅데이터 분석 및 배터리 서비스 알고리즘이 분석해 배터리의 상태와 위험성을 진단, 시그넷이브이의 충전기로 정보를 즉각 전달하는 시스템이다. 운전자 역시 휴대폰을 통해 소프트베리의 전기차 플랫폼으로 해당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서비스는 내년까지 실증 사업이 완료된 후 먼저 국내에서 론칭될 예정이며, 해외 시장 진출은 오는 2022년으로 계획됐다.

이를 기반으로 배터리 수명을 개선할 수 있는 스마트 충전 및 잔존 수명 예측 등 서비스도 발굴할 방침이다. 전기차가 GS칼텍스 충전소에서 충전되는 동안 배터리 안전 진단과 퇴화 방지 알고리즘이 적용된 스마트 충전, 잔존 수명 예측 등 여러 서비스들이 한번에 적용 가능하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