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요 언택트 관련 화학 제품의 지역별 생산 비중. 출처=하나금융투자

[이코노믹리뷰=박민규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원유 수요가 저점에 머무르고 있는 가운데, 의외로 석유화학 제품은 호조를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의료용 위생 장갑과 손 소독제, 보호구 등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이른바 '코로나 특수'를 누리는 업체들이 등장했다. 우리나라에서는 NB라텍스에 주력하는 금호석유화학, 안면 보호대와 방역창에 쓰이는 스카이그린(PETG)을 생산하는 SK케미칼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하지만 고부가 합성 수지인 아크릴로부타디엔스티렌(ABS)의 호황은 일견 의아하게 여겨진다. 최근 ABS 가격 및 마진은 10년래 최고치를 거듭 경신하는 등 기록적인 강세를 보이고 있다.

답은 '언택트(untact·비대면)' 트렌드에 있다. 사람들이 코로나19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가전용 소재로 사용되는 ABS의 수요도 급증한 것이다.

이와 관련, 윤재성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글로벌 석유화학 제품 수요는 (코로나19에 따른) 우려보다 강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언택트 소비가 지속되면서, 이제 석유화학의 패권은 미국에서 아시아로 이동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윤재성 연구원은 8일 "언택트 트렌드가 석유화학 패권의 이동에 촉매로 작용할 것"이라 분석했다.

8일 윤 연구원에 따르면 저유가·저금리·경기 부양책 등으로 인한 가처분 소득(개인이 소비·저축 등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소득) 증가가 언택트 트렌드와 맞물리면서, 이동에 의한 연료유 수요가 석유화학 수요로 이전하거나 통합되고 있다.

실제로 코로나19 발병 이후 해외 여행을 가는 대신 가전 제품을 사거나 집을 리모델링 하고, 주로 온라인 쇼핑을 하는 등의 '홈코노미'가 주류 소비 행태로 부상하는 모습이다.

세계적인 신·재생 에너지 흐름에 따라 전기 자동차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으며, 여행객이 증가해 연료 수요의 성수기로 꼽히는 '드라이빙 시즌'이 최근 끝난 점도 휘발유 등 연료유 수요 감소에 일조하고 있다.

이 같은 연료유 수요 위축은 구조적으로 유가 약세를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낮은 유가는 필연적으로 ECC 업체들에게 위기로 작용한다. ECC는 합성 수지·고무·섬유 등 폭넓은 석유화학 제품에 기초 원료로 쓰여 '석유화학의 쌀'로 불리는 에틸렌을 생산하는 설비로, 유가가 오를수록 수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공정 방식이기 때문이다.

특히 북미 지역 ECC 업체들에 대한 우려가 높은 분위기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 석유화학 업체들이 원유에서 나온 나프타를 분해해 에틸렌을 제조하는 NCC 공정을 주로 이용하는 반면, 셰일가스 활용도가 높은 북미 지역의 석유화학 업체들은 ECC로 에틸렌을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저유가로 인한 천연가스의 강세도 ECC를 위협하는 요인이다. 윤 연구원은 "유가 하락으로 미국에서는 천연가스 생산이 줄어들고, 발전원으로의 사용은 늘어났다"며 "지난 10년 동안 관측돼 온 유가에 대한 천연가스의 상대 가격이 바뀌면서, 북미 ECC 업체들의 경쟁력은 쇠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조적으로 아시아 석유화학 업체들에 대한 전망은 밝다.

우선 석유화학 업계는 지난해 예견된 바와 달리 코로나19라는 변수에 의해 우상향 곡선을 그리는 양상이다. 앞서 석유화학 업황은 지난 2019년 세계적인 공급 과잉과 미국-중국 무역 분쟁으로 다운 사이클에 진입했다는 평가가 나온 바 있다.

지난달 26일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최근 석유화학 제품은 아시아에서 압도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ABS는 아시아 지역에서 전 세계의 약 81%가 생산되는 한편, 북미 내 생산량이 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손 세정제의 원료인 아세톤 경우 53%가 아시아에서 만들어지고, 미국산은 18%에 그쳤다. 언택트 관련 화학 제품들의 생산 비중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북미는 대부분 10%대를 차지하는 반면, 아시아는 거의 모든 제품에서 50%를 넘어선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언택트 관련 제품들의 생산 비중이 높은 아시아권 업체들은 코로나19 상황과 관계 없이 시장 팽창을 지속하고 있는 전기차 산업의 수혜 또한 입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윤 연구원은 "전기차 제조에 쓰이는 ABS·폴리카보네이트(PC)·합성 고무·페트(PET)·타이어코드 등의 수요 증가에 따른 이익은 아시아 업체들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에틸렌에 공급 체인이 국한된 북미 ECC들은 아시아 석유화학 업체들과 비교해 사업의 다양성 면에서 불리할 공산이 크다.

윤 연구원은 "이 같은 경쟁력 변화는 올해 2분기 석유화학 업체들의 실적에서 이미 암시됐다"며 "서구권의 거대 화학 기업인 다우와 라이온델바젤(LYB)의 영업 이익률은 로우싱글(2~3%)에 불과했으나, 한국 화학사들의 영업 이익률은 10%를 넘었다"고 지적했다.

언택트 트렌드로 원가 우위의 변화 및 사업 다각화의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이제 단순히 NCC가 좋은지 ECC가 좋은지 따위의 지엽적인 논쟁은 무의미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윤 연구원은 "나프타를 통해 다양한 다운스트림을 보유할 수 있는 아시아 업체가 좋을지, 에틸렌 체인에 국한된 북미 업체가 좋을지에 대한 문제"라면서 "글로벌 석유화학 투자자들이 지난 10년 동안 북미를 선택했다면, 앞으로는 아시아를 주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날 윤 연구원은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 가운데 금호석유화학·롯데케미칼·대한유화·LG화학 등을 톱픽으로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