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김진욱 편집국장]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던 청와대가 ‘상소문’ 하나로 곤경에 처했다.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시무(時務) 7조를 주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니…’라는 글 때문이다.

30대 후반의 평범한 직장인이라고 밝힌 조은산(필명)씨가 작성한 이 글은, 지난달 12일 청와대 국민청원에 접수된 후 비공개 상태로 있다가 15일 뒤인 27일에야 공개 전환됐다. 이후 하루 만에 청와대 답변기준인 20만 명 이상의 동의를 거뜬히 채웠다. 이달 2일 기준으로도 40만 명을 훌쩍 넘었다.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풍자한 이 글이 폭발적 관심을 끈 것은 문재인 정부의 실정을 비판한 내용이 주를 이룬 탓이다. 대통령을 ‘폐하’라고 지칭하면서도 부동산 정책과 인사정책, 정부·여당의 특정인사에 대한 냉소적인 평가가 글 곳곳에 담겼다. 이와 관련해 처음 게시글이 비공개 처리된 것을 놓고도 뒷말이 많았다.

조은산의 상소문은 곧장 ‘후속타’를 불러왔다. 림태주 시인이 자신의 블로그에 ‘백성 1조에 답한다’는 글을 올려 시무 7조에 반박논리를 편 이후 조씨와 설전을 벌여 이슈의 중심에 섰고, 1880년대 유생들의 상소인 ‘영남만인소’를 표방한 또 다른 정부비판 글이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와 상소문 열기를 더 데웠다.

코로나 위기로 가뜩이나 힘겨운데 느닷없이 조선시대나 나올 법한 상소문 얘기가 웬일일까. 지금의 ‘21세기 상소문’ 신드롬은 그만큼 현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과 염원이 동시에 표출된 결과로 봐야한다.

실제 우리의 역사 속에서 상소문은 나라가 위기상황일 때 주로 등장했다. 조은산의 ‘시무 7조’는 통일신라시대 학자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시무 10조)’를 모티브로 삼은 듯하다. 당시 최치원은 신라의 뿌리인 골품제도가 갖가지 사회갈등을 초래한다며 지방호족과 중앙귀족들의 부정부패 척결을 외쳤다.

최치원의 상소는 고려시대로 넘어가면서 그의 증손인 최승로가 계승했다. 신라가 망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새 나라를 열었지만 왕조의 기틀이 튼튼하지 않았고 지방세력 비대, 중국과의 외교, 허약한 군대 조직 등 난제가 쌓였다. 이에 성종은 982년, 관료들에게 국가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고 당시 인사, 행정을 담당하던 최승로가 ‘시무 28조’를 올렸다. ‘나라를 다스리는 정책 28가지’를 담은 상소문이었다.

조선시대엔 율곡 이이의 ‘만언봉사(萬言封事)’가 대표적인 상소문이다. 이이는 우리 역사 통틀어 가장 많은 상소를 올린 인물로, 1574년 승정원 우부승지로 일하던 당시 선조에게 만언봉사를 올렸다. 만언은 ‘장문의 소리’를, 봉사는 남이 보지 못하도록 ‘밀봉한 상소’라는 뜻이다. 당시 상소 글자만 1만2000자가 넘었다. 이이는 만언봉사를 통해 ‘세상의 잘못된 점 7가지’를 꼬집었다. 당시 조선은 여러 번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조정의 기강이 흔들렸고 서리의 부패, 백성들의 고초가 심각했다. 이후에도 이이는 1583년 그 유명한 ‘십만양병설’의 정신이 담긴 ‘시무 6조’를 선조 앞에 올렸다.

역사적 산물인 ‘상소’가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당대에 그 호소문이 얼마나 현실정책으로 반영됐는지가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우리 임금들은 신하의 상소를 수용하기도 했고 등한시 여기기도 했다.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성종이 흔쾌히 받아들여 고려초기 제도를 정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기존 불교에서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중앙집권적 유교국가의 기틀도 잡았다. 하지만 최치원과 이이가 올린 상소는 그 시대 환영받지 못했고 그 둘은 이후 정치의 중심에서 사라졌다.

진성여왕은 처음 최치원의 개혁을 수용했지만 중앙귀족들의 끈질긴 반발로 ‘시무 10조’를 버렸고, 선조는 이이의 두 상소를 귀담아듣지 않고 당파싸움에 흔들리다가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수모를 겪은 임금이 됐다.

조은산 씨는 본인이 밝혔듯, 과거 ‘신하’에 해당하는 정부관료나 핵심 정치인이 아니다. 백성에 해당하는 ‘민초’에 가깝다. 그리고 그가 올린 상소는 어찌 보면 주관적인 생각과 한쪽에 치우친 호소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와대는 민초의 상소문인 ‘시무 7조’에 분명한 입장을 내놔야 한다. 지난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을 맞아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국정철학을 반영하겠다는 취지로 만든 게 국민청원 게시판이다.

국민이 물었다. 이제 대통령이 답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