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로이터 등 외신은 11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날 원격 내각회의를 통해 "세계에서 처음으로 코로나19 백신이 등록됐다"면서 "상당히 효율적으로 기능하며 지속적인 면역을 형성한다"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다.

미국의 모더나가 백신 개발에 가장 근접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나온 러시아의 깜짝발표다. 푸틴 대통령의 딸도 이미 접종을 마쳤으며, 해당 백신은 러시아 보건부 산하 ‘가말레야 국립 전염병·미생물학 센터’가 국방부 산하 제48중앙과학연구소와 공동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깜짝발표가 나온 가운데 세계는 일단 미온적인 반응 일색이다. 무엇보다 임상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효능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다만 러시아가 코로나19 백신을 발표하며 무엇을 노리는지, 또 추후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패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두고는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단서는 해당 백신의 이름, 스푸트니크 V에 있다.

▲ 폰 브라운. 출처=갈무리

V2, 그리고 폰 브라운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 나치는 Vergeltungswaffe 2(보복병기 2호), 통칭 V2로 불리는 비밀무기를 개발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군비 증강에 한계가 걸린 상황에서 전황을 획기적으로 바꿀 히든카드가 필요했고 그 대상 중 하나가 V2인 셈이다.

V2는 마하5의 속도로 하늘을 날았으며 당대 최고의 로켓 기술을 가진 영국의 최신기술들이 치밀하게 탑재됐다. 이런 가운데 영국 본토 항공전을 기점으로 독일이 사실상 연합군에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당하자, 독일은 천재 베르너 폰 브라운을 앞세워 V2 상용화에 더욱 속도를 내게 된다.

그러나 예상보다 일찍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잠수함 발사까지 고려했던 V2 기반 미사일 공격 플랜은 당연히 폐기됐다. 다만 연합군의 핵심인 미국은 물론 소련은 V2를 키워낸 폰 브라운을 강렬히 원했다. 남은 것은 폰 브라운의 결단. 고심 끝에 그는 직접 118명의 과학자를 대동하고 독일 친위대 진영에서 탈출해 미국에 투항했다.

미국은 반색했다. 폰 브라운에게 시민권을 주는 한편 나치 부역 경력을 말끔히 지웠다. 이후 소련과 미국의 냉전이 시작되자 폰 브라운은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로켓 개발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나치의 과학자에서 자유세계의 리더인 미국의 로켓 개발을 이끄는 과학자로 변신한 셈이다. 다만 폰 브라운이 처음부터 기회를 잡았던 것은 아니다. 그가 전면에 나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의 스푸트니쿠스 쇼크가 벌어진 이후다.

▲ 스푸트니크 1호. 출처=갈무리

스푸트니크 쇼크
사실 나치 독일의 V2 기술을 미국만 습득한 것은 아니다. 미국 정도는 아니지만 소련도 V2와 폰 브라운을 원했고, 소련은 폰 브라운이 미국으로 망명한 직후에도 폐허가 된 독일 전역을 뒤지며 V2와 관련된 정보를 필사적으로 모았다. 이후 스탈린 체제의 소련에서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V2에 기반한 로켓인 R1, R2를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여세를 몰아 소련은 중거리 탄도미사일 체제 구축에 속도를 내는 한편 인공위성 개발에도 집중하기 시작한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는 폰 브라운이 아닌, 미 공군을 중심으로 뱅가드 프로젝트가 가동되며 인공위성 발사 플랜이 차곡차곡 수립되고 있었다. 당시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벌어지며 두 나라의 자존심을 건 대립이 극에 달하던 때다.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라는 금자탑을 쌓아올리기 위해 미국의 뱅가드 프로젝트를 압도할 수 있는 퍼포먼스를 원했다.

1957년 러시아 모스코바 시간 기준 10월 4일 오후 10시 28분.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가 날아올랐다. 5분 후 최초로 인류가 만든 인공위성이 우주에서 지구로 보내는 신호음이 생생하게 들렸다. 

희비가 엇갈렸다. 당시 미국 워싱턴 DC에서는 양국 과학자들이 모여 친선을 위한 파티를 즐기는 중이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 스푸트니크 발사 소식이 알려지자 러시아 과학자들은 괴성을 지르며 자축했다. 반면 자국의 수도에서, 러시아가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올렸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의 과학자들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지구 주위를 회전한 스푸트니크 1호는 약 98분만에 지구를 한 바퀴 돌았으며 발사 3개월만에 대기권으로 들어와 사라졌다. 냉전이 이어지며 미국은 자유세계의 리더로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나라'로 군림했으나, 스푸트니크 쇼크는 미국의 자존심을 처참하게 파괴한 가장 극적인 사례로 역사에 남았다.

▲ 유리 가가린 흉상. 출처=갈무리

미국의 반격, 그리고 지금
스푸트니크 쇼크가 세계를 강타한 가운데, 미국은 부랴부랴 뱅가드 프로젝트를 가동했다. 조금 늦어도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려는 발악이다. 결국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된 후 2개월이 지난 1957년 12월 6일 미국은 전국에 생중계를 하며 뱅가드 발사에 도전했다. 그러나 뱅가드는 이륙 2초 만에 허공에서 산산조각나며 미국의 자존심은 더욱 처참하게 구겨졌다.

결국 미국은 최종병기 폰 브라운 카드를 꺼냈다. 즉시 폰 브라운은 1958년 1월 31일 익스플로러 1호를 성공적으로 쏘아올리며 바닥에 떨어진 미국의 마지막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살려낸다. 그러나 이것으로 부족하다. 미국은 빠르게 다음 플랜으로 돌입했다. 미 항공우주국(NSAS)를 창설하며 소련과의 경쟁을 반드시 이겨낸다는 각오를 보였다. 폰 브라운은 그 중심에서 우주를 향한 강렬한 불꽃을 태워낼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소련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에 오른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를 유영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다시 충격에 빠졌지만, 폰 브라운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1960년대가 지나기 전 인류를 우주로 보낸 후 다시 귀환시키는 담대한 상상력을 실천에 옮기려 노력한다. 발사체 개발인 새턴 로켓, 비행 기술의 제미니 플랜을 동시에 가동하며 1963년 F-1 로켓 엔진을 성공적으로 테스트하기에 이른다. 이후 등장한 아폴로 플랜. 1968년 폰 브라운의 NASA는 기어이 아폴로 8로 플랜을 성공시킨다. 인류를 지구궤도 너머로 보내 달 주변을 돌아보도록 하는 것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후 1969년 아폴로 11호 플랜이 성공하며 닐 암스트롱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달에 발자욱을 새긴다.

여기까지가 냉전 시대의 우주개발 역사의 종착지다. 이후 베트남 전쟁이 터지고 미국 경제가 하강하는 한편 소련이 해체되자 우주를 향한 열정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폰 브라운은 1972년 NASA를 떠나 민간 군수업체서 근무하다 1977년 향년 65세로 사망한다.

이후 인류의 우주개발도전은 몇 차례 변곡점을 넘은 후, 미국에서는 민간 중심의 도전이 이어지고 있다.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스페이스X가 선봉이다. 최근 스페이스X는 팰컨9에 탑재된 크루 드래곤을 통해 두 명의 베테랑 우주 비행사를 탑승시킨 상태에서 엔진 분리, 2단계 엔진 점화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우주정거장(ISS)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 팰컨 로켓이 발사되고 있다. 출처=갈무리

팰컨9과 크루 드래곤에 대한 관심도 높다. 팰컨9은 높이가 약 70미터며 무게만 59만Kg에 이른다. 22010년 6월 처음 발사된 후 몇 차례 실패를 거듭했으나 이제는 안정적인 로켓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까지 총 83회의 발사횟수를 자랑한다. 크루 드래곤은 수송선인 드래곤을 커스터마이징했으며 높이는 약 8미터, 운송 용량만 약 6000Kg에 이른다. 최대 승무원 7명이 탑승할 수 있다. 방열실드에 태양열 패널로 무장했고 상공 400Km 상공의 우주 정거장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는 안정성도 확보했다.

크루 드래곤의 성공적인 발사는 민간 우주여행 시대의 발판이라는 점에서 특히 눈길을 끈다. 1957년 10월 4일 인류 최초로 소련이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며 열린 국가 주도의 우주개발시대가 아닌, 순수 민간이 주도하는 새로운 우주개발시대가 새롭게 열리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은 스페이스X에 대해 NASA 차원의 지원에 나서는 수준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에 이르러 우주군 창설에 나서기도 했다. 다만 아직은 명확한 윤곽이 나오지 않았고, 미국 우주개발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 수준은 아니다.

▲ 크루 드래곤. 출처=스페이스엑스

스푸트니크V, 그리고 쇼크의 재연
냉전시대 미국과 소련의 패권경쟁은 ICT 전자과학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결국 두 나라의 경쟁은 자존심 대결이기도 했지만, 기술 발전을 위한 마중물을 끌어내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인 셈이다.

이런 가운데 소련의 뒤를 이은 러시아가 코로나19 백신의 이름을 스푸트니크V로 명명한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과거 소련이 스푸트니크를 쏘아올리며 미국을 압도했던 찬란했던 역사를, 깜짝발표와 같은 당시와 동일한 방식으로 이룩하겠다는 의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러시아의 행보는 냉전 시대 패권승부가 ICT 전자에 매몰됐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패권을 결정하는 것이 백신, 즉 바이오 산업이라는 점도 증명한다. 코로나19 이후 인류는 불확실성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으며, 특히 바이러스와 같은 질환에 어떤 대응력을 보여주느냐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연장선에서 러시아가 바이오 시장에서 스푸트니크의 추억을 소환했다는 점은 결국 미래 패권의 중요한 선택지 중 하나가, 바로 인류의 삶과 기본적인 안전을 담보하는 '바이오'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비록 러시아의 백신에 대한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으나, 러시아의 추억 소환이 가지는 함의만큼은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