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고 박완서님의 수필집을 선물 받은 것은 필자가 중학교 때였다. 수필이라고는 교과서에 나오는 고 피천득님의 인연밖에 몰랐던 그 시절, 내게 수필집을 선물해준 분은 E여대를 갓 졸업한 음악선생님이었다. 아름답지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여신이었던 그 선생님 나이가, 지금 생각해보니 스물 세 살이었다. 그 선생님의 눈에 들어 애제자가 되는데 성공한 어린 필자가 수필집을 선물 받은 곳은 E여대 앞의 레스토랑 <실버스푼>이었다. 필자와 일곱, 여덟살 차이였으니, 프랑스의 대통령 내외를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없지도 않았을 터다. 그러나 때는 1980년대였으며, 프랑스가 아니었다.

박완서의 수필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며, 마음속 깊숙이 손뼉 치고 소리 지르고 싶은, 잠재한 환호에의 갈망을 느끼던 화자(話者)는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버스 안내양에게 떼를 써 버스에서 내린 후 마라톤 결승점을 구경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1등 주자는 결승점에 들어온 후였고 맥 빠진 화자는 (수필 속 표현대로) 비참한 꼴찌의 얼굴을 마주할 일에 실망한다.

 “나는 그런 표정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꼈다. 여지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그렇게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가슴이 뭉클하더니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는 20등, 30등을 초월해서 위대해 보였다. (중략) 나는 그를 위해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중략) 그는 지금 그가 괴롭고 고독하지만 위대하다는 걸 알아야 했다. 나는 용감하게 인도에서 차도로 뛰어내리며 그를 향해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환성을 질렀다. (중략) 꼴찌 주자까지를 그렇게 열렬하게 성원하고 나니 손바닥이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환호하고 싶었던 수필가는 아이러니하게도 1등 주자가 아닌 마라토너, 즉, 삶이라는 긴 마라톤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고독하고 평범한 사람들에게 격려와 환호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환호하고 신나는 일이 참 많이 줄어든 세상이다. 무엇인가에 도전해보리라 마음먹고 가슴 두근거려본 것이 언제인가 싶은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   *   *

필자를 멀리 제주에서 찾아온 그 환자는 키 185cm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작지 않은 키에 단단한 몸집인데도, 달리기가 늘 꼴찌였다고 한다. 특히 단거리는 출발을 빨리 하지 못할뿐더러, 빨리 뛰려고 하면 넘어지기 일쑤였다. 체육 선생님은 그가 일부러 게으름을 피우며, 대충, 슬렁슬렁 뛰는 것이라 판단하고 그를 매섭게 혼냈다. 고등학교 내신 성적에 들어가는 달리기 수행평가에서, 고도 비만의 동기생보다도 달리기가 더 느렸다. 그의 학창 시절, 전교에서 달리기는 맡아 놓고 꼴찌였다.

그가 희귀병인 톰슨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군 신체검사에서 경증의 뇌성마비를 의심하게 되면서, 재검을 통해 비로소 밝혀지게 되었다. 톰슨 병은 선천성 근육 긴장증의 한 종류로서, 상염색체 우성으로 유전되는 병이다. 톰슨 병은 1876년 덴마크 의사 톰슨(Thomsen J)에 의해 처음으로 설명되었는데, 그는 이 질환을 가지고 있었고 같은 질병을 가진 연속적인 7세대 가족의 구성원이었다고 한다. 

톰슨 병의 증상은 걷거나 뛰기의 시작이 어려운 것이 특징이다. 주로 팔, 다리 근육의 수축과 이완에 어려움을 보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주먹을 쥔 후 손을 완전히 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또한, 누워 있다가 일어나거나, 앉았다 일어나서 걷거나, 계단을 오르거나, 단거리 스타트 자세에서 뛰기 시작할 때까지 근육 강직이 풀리지 않아 어려움을 겪게 되는 병이다. 환자의 달리기가 늘 꼴찌였던 것은 이런 이유였지만, 선생님도, 친구도, 주위의 그 누구도, 환자 본인도 이해하지 못하고 살아왔던 것은 참 가슴 아픈 일이다. 다행히 현재 일상생활에 문제가 될 정도의 불편은 없다고 한다.

필자가 중, 상급의 돌출입과 무턱을 가진 이 환자에게 돌출입수술을 하는 데에는 단 하나의 난관이 있었다. 바로 전신마취였다.

마취과학에 의하면, 근육긴장증을 가진 환자에서 전신마취 중 치명적인 악성고열증이 유발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대학병원의 신경과 담당교수도 전신마취 수술은 가능하지만 악성고열증에 대비하라는 소견서를 보내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취 중 악성고열증이 발견되는 즉시 투약하면 치명상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약제가 네덜란드에서 개발되었고, 한국 희귀필수의약품 센터라는 곳에서 수입하여 배급하고 있다. 필자와 마취과 전문의 선생은 병원에 미리 (쓸 필요가 없어야만 하는) 그 고가의 약제를 충분히 준비해 두었다. 여담이지만, 마취 환자의 모든 활력징후는 물론이고 체온까지도 체크되는 전신마취용 모니터 기기도 상상 이상으로 고가이다.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환자는 돌출입수술과 턱끝수술을 필자에게 받았다. 다행히 수술 중에도, 수술 후에도 고열도 근육 강직도 발생하지 않았다. 만약 수술 후 열이 났다면, 이 COVID-19 시국에 여러 가지로 긴장했을 것이다.

환자가 수술 후 두 달 정도인 오늘 병원을 다녀갔다. 훤칠한 키에, 선한 미소를 가진 그는 늘 긍정적이다. 유전병을 전해준 부모에게도, 자신을 오해했던 체육 선생에게도 일말의 분노나 원망이 없는 밝은 심성을 읽을 수 있었다. 진료실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걸어 나가는 속도가 늦다는 느낌도 그닥 없었다. 이제 그는 아름다운 입매까지 장착한 훈남이 되어 있다. 덕담을 했다.

-부러운 큰 키에, 성격도 좋은데, 얼굴까지 훈남이 되었으니, 이제 좋은 사람 만나게 되겠군요.

스물아홉 살, 정말 연애하기 딱 좋은 나이다. 평생 반려자를 만나고 싶을 나이다. 그런데, 자신의 병을 발견했을 당시 부모님도 검사를 해보니, 어머니가 같은 톰슨 병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더 증상이 약해서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환자가 톰슨 병에 대해 안타까운 말을 해주었다.

-톰슨 병이라는 유전병이 대를 거듭할수록 더 증상이 심해진다고 해요.

어려운 질문을 했다.

-나중에 그럼...혹시 2세는...?

-네, 지금 생각으로는 안 낳는 게 맞지 않나 싶어요.

자신의 2세가 증상이 심해 더 큰 불편과 고통을 겪는다면, 최선을 다해 달려도 늘 꼴찌를 할 운명이라면, 차라리 2세가 없는 것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일지 모른다. 그래도 요즘은 아이를 낳지 않는 부모들도 꽤 있고 딩크(DINK)족도 있으니 좀 덜 서글프다고 해야 하나...

이런 희귀병은 완치할 수 있는 치료약이 대부분 없다. 워낙 희귀한 병이다 보니, 치료에 대한 임상경험도 적고, 집중적인 연구나 원인규명도 잘 안되어 있다. 희귀병 한 가지를 정복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연구비를 들이기도 어렵다. 그렇게 만든 약제로 혜택을 보는 환자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아주 흔한 질환인 고혈압 약을 만드는 회사와 약제가 수백 가지인 것과 대비된다. 인류는 질병을 다 정복하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물인 바이러스에게도 쩔쩔매고 있지 않은가?

정말이지, 유전의 힘은 무서울 정도다. 체형, 얼굴 모양, 성격까지 부모를 안 닮으면 누구를 닮겠는가? 부모님에게서 유전자로 물려받은 돌출입이나 광대뼈, 사각턱은 필자가 정복해드릴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전병인 톰슨 병을 비롯한 여러 희귀병들은 유전을 막지도 정복되지도 못하고 있다.

달리기 만년 꼴찌였던 꼬마가 이제 반듯하고 번듯한 청년이 되어 있다.

인생에 한 번만 있어야 할, 전신마취와 얼굴뼈 수술이라는 중요한 도전에도 성공했다. 이제 앞으로 좋은 배필을 만나고, 아버지가 되어 건강한 아들, 딸과 행복하게 사는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싶다. 필자는 비록 얼굴뼈를 아름답게 만드는 일만 정복했지만, 필자보다 더 석학(碩學)인 약학, 유전학, 의학 전공자들이 우리 인류의 희귀병, 유전병, 전염병들을 정복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환자는 면허증은 있지만 혹시라도 위험할까봐 운전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버스를 탈 때 늘 제일 뒤에서 탄다고 한다. 줄의 제일 앞에 있다가 버스 계단을 오르려고 하면 근육강직 때문에 빨리 탈 수가 없어 오해를 사고 불편을 끼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일 뒤에 있으면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시간을 벌어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그의 달리기는 꼴찌였지만 위대했다. 근육이 말을 안 들어 넘어져도 다시 달렸다. 평범해 보이는 달리기가 그에게는 굳은 의지였고 병과의 싸움이었다. 그는 울지 않았고 굴복하지 않았다. 의지와 배려심이 남다른, 이 착하고 긍정적인 그리고 잘생긴 청년의 앞날에, 필자의 손바닥이 붉게 부풀어 오를 만큼의 갈채를 보내주고 싶다.

푸른 제주에 가면, 꼭 그 환자와 가족이 하는 식당에 가보려고 한다. 나를 믿고 멀리서 찾아와준, 희귀 유전병을 앓는 환자가 필자에게 받은 돌출입 수술이 작게나마 그의 삶에 활력을 주고, 그의 마라톤에 푹신한 깔창이 되어 주었는지 지켜보고 싶다.

한때 주치의였다고 공짜 식사를 대접받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뛰는 마라토너다. 그가 필자의 수술을 신뢰해 준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그의 요리를 존중할 차례다. 식대는 꼭 치르고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