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페이스북과 애플, 아마존 및 구글 등 미국의 4대 기술 기업 최고 경영자(CEO)들이 29일(현지 시각) 온라인으로 열린 미 하원 청문회에 나섰다. 반독점 혐의와 관련된 청문회에 미국은 물론 세계를 대표하는 기업 수장들이 총출동한 가운데, 미국판 사상검증이 벌어지며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 눈길을 끈다.
중국과 격렬하게 기술패권 경쟁을 벌이는 미국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자랑스러운 미국 기업”
미 실리콘밸리 ICT 기업의 시장 독과점 논란은 업계의 화두다.
한 때 민주당 대선경선에 뛰어들었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이 움직였다. 그는 지난해 SXSW에 참여해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시장 독과점을 비판하며 “시장은 경쟁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기업 해체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글로벌 ICT 기업들의 강력한 플랫폼 경쟁력이 여전한 상황에서 시장의 경쟁을 촉진시키기 위해 일부 기업을 강제로 ‘쪼개야 한다’는 뜻이다.
워런 의원은 또 “아마존과 구글 등은 우리의 경제와 사회, 문화에서 너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들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어 경쟁을 거부하며 우리의 개인정보로 돈을 벌고 있다”고 맹비난에 나서기도 했다. 심지어 플랫폼 독과점을 막기 위해 ‘판매자와 플랫폼의 분리’도 주장했다.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특정 플랫폼이 내부 플랫폼에서 판매자처럼 동일한 비즈니스를 한다면 공정경쟁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아마존이 광고비를 많이 집행한 셀러를 최상단에 위치시키는 것을 포함해, 플랫폼 사업자가 자체 생태계에서 비즈니스에 나서는 모든 현상을 부정하는 뉘앙스다. 애플의 경우 플랫폼과 유통망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워런 의원의 주장대로라면 애플은 앱스토어를 분리해야 한다.
물론 워런 의원의 주장은 당시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특히 ICT 기술의 발전을 위해 독립적이고 강력한 힘의 응축을 끌어내려면 강력한 플랫폼이 등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의 횡포가 너무 심각해지며 새로운 스타 플레이어가 등장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망 중립성 등의 논란을 거치며 시장 독과점 문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필요가 있었다.
이런 가운데 워런 의원의 엄포는 곧 현실이 됐다. 지난해 6월 미국의 양대 규제기관인 법무부와 연방거래위원회(FTC)가 실리콘밸리 기업인 구글과 페이스북, 아마존, 애플에 대해 시장 반독점 조사에 나섰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에서 구글 등이 관련된 논란으로 천문학적인 과징금을 받은 적은 있으나, 모국인 미국에서 시장 독과점의 그물에 걸렸던 사례는 없다. 그러나 지난해 6월 미국의 강력한 규제기관이 실리콘밸리 기업을 정조준하자 실리콘밸리의 긴장감은 크게 올라갔다. 미국은 한 때 석유시장의 90%를 장악했던 스탠다드오일을 무려 30개의 회사로 쪼갰던 역사도 가지고 있다. 워런 의원의 발언과 트럼프 대통령의 실리콘밸리에 대한 악감정, 미국에서 커지고 있는 실리콘밸리 기업의 시장 독과점 논란 등이 결합되면 예상하지 못한 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지난해 9월에는 미 민주당을 중심으로 미 하원이 글로벌 ICT 기업들에게 주요 CEO의 이메일 내역과 금융 정보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미 시장 독과점 청문회가 열리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가운데 하원이 법사위를 중심으로 시장 독과점 조사에 속도를 내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워런 의원이 미 민주당 대선 경선을 포기한 상황에서 열린 이번 청문회는 말 그대로 ‘알맹이가 없는 청문회’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막상 살펴보니...
미 하원 법사위 의원들은 29일(현지시간) 온라인으로 열린 청문회에서 각 기업의 시장 독과점 문제를 질타했다. 아마존 창립 26년만에 제프 베조스 회장까지 등장한 만큼 업계의 관심은 뜨거웠다.
문제는 내실이 없다는 점이다. 시실린 위원장이 4대 IT 기업들이 "너무 많은 권력을 갖고 있다"며 비판한 것은 나쁘지 않았으나, 이후로는 소위 애국을 증명하는 사상검증의 시간만 이어졌다. 실제로 저커버그는 이날 청문회에서 "전 세계인들이 우리 제품을 쓰지만 페이스북은 자랑스러운 미국 기업"이라고 말했으며 "중국은 매우 다른 구상에 초점을 둔 자신들 버전의 인터넷을 구축해 이를 다른 나라에 수출하고 있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했다. 듣기에 따라 중국을 비판하는 분위기다.
피차이 구글 CEO는 "구글은 검색과 관련해 이 영역의 전문가인 여러 기업들과의 강한 경쟁을 마주하고 있다"며 자사의 어려움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나아가 제프 베조스 아마존 CEO는 청문회 서면증언을 통해 “아마존은 현재 100만명의 미국인을 고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심지어 그는 "아마존이 미국에서 창업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며 ‘넘치는’ 조국사랑을 보여주기도 했다.
쿡 애플 CEO는 서면 증언에서 "애플은 우리가 사업을 하는 어떤 시장에서도 독점적 점유율을 갖고 있지 않다"며 "아이폰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상품군에서도 그렇다"고 주장했다.
의원들의 질문도 주로 미국의 가치와 해당 기업들의 정체성에 주목됐다. 이 과정에서 제프 베조스 아마존 CEO는 자신의 불운한 유년시절을 장황하게 설명하며 ‘아름다운 미국’의 가치를 설파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도 했다.
결국은 외부와의 전쟁
각 기업들의 수장들이 청문회에서 미국의 가치를 강조한 것은, 본인들이 민주주의와 분권 및 견제를 대표하는 미국의 정신을 잊지않고 있다는 점을 알리기 위함으로 보인다. 시장 독과점 논란에 휘말려있으나 독재적인 힘의 집중을 꾀하지 않고 말 그대로 ‘자유롭고 독립적인 미국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논리다.
다만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미국의 가치에 집중, 사실상 청문회가 애국주의의 사상검증 무대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각 기업의 시장 독과점 문제는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한편 업계에서는 해당 청문회가 최근 글로벌 ICT 업계의 흐름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는 말도 나온다.
현재 미국은 글로벌 패권을 지키기 위해 중국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의 기술굴기를 차단하기 위해 화웨이 배제 등 초강수를 남발하고 있다. 나아가 유럽과도 디지털세 부과 문제로 정면충돌, 최소한 ICT 업계에서의 주도권을 지키려 노력하는 중이다.
여기에 초읽기에 들어간 미 대선 등 정치적인 상황들이 겹치며 미국은 시장 독과점 문제라는 진지한 논의를 외부(중국)와의 전투, 나아가 국내 정치적 포석을 위한 수단으로만 인식하는 기류가 읽힌다.
이 틈을 노려 페이스북 및 구글 등 기업들은 자사가 미국의 가치를 충실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영악한 전략을 들고 나왔다는 평가다. 이러한 전략은 최악의 경우 ‘플랫폼 쪼개기’에 나설 수 있는 당국의 칼날을 피하는 방편인 한편, 중국과 같은 외부의 강력한 ICT 경쟁력에 노출된 상황에서 미국 정부의 지원을 끌어낼 수 있는 방안이 될 전망이다.
이미 유럽과의 디지털세 논란에 있어 이미 미국 정부는 실리콘밸리 기업과 보폭을 맞추는 중이다. 결국 다양한 정치적 이해득실과 특수한 외부상황에 힘입어, ICT 업계의 중요한 화두인 시장 독과점 논의는 흐지부지되는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