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산

[이코노믹리뷰=김덕호 기자] 1990~2000년대 초반 용산은 10대 청소년, 20대 젊은층이 새로운 문화(미국, 일본)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디지털 게임기, 카세트테이프, 워크맨, 마이마이, CD플레이어 등 1020세대와 2030세대의 취향을 저격한 첨단 제품들이 모여 ‘핫플(핫플레이스)’을 형성했다.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용산은 전혀 다른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용산역에는 대형 복합쇼핑몰이 생겼고, 면세점과 멀티플렉스 영화관, 대형마트, 백화점이 함께 들어선다. 그리고 전자상가는 보다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생활속 놀이공간으로 변모했다. 

2020년의 용산은 상전벽해(桑田碧海)를 느낄 수 있는 서울의 대표 공간이 됐다. 

활기 잃은 전자 상가… 콘텐츠 줄고, 고객 유입 급감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 그리고 온라인 거래가 늘어나면서 용산전자상가를 찾는 발걸음이 급격히 줄었다. 전자기기 가격과 스펙 정보가 오픈되고, 용산에서만 구할 수 있던 콘텐츠들(수입영화, 애니메이션)을 온라인을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면서다. 시대의 변화, 그리고 새로운 콘텐츠를 찾지 못한 용산의 현실이다.

상권이 쇠퇴하면서 악덕 상인 ‘용팔이’들은 하나 둘 용산을 떠났다. 그리고 시대가 변하며 매장(선인상가, 원효상가)을 찾는 사람들의 다양성도 함께 줄고 있다. 전성기였던 1990~2000년대 초반, 10대부터 50대까지의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20대의 방문도 눈에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 나진상가10동(일명 두꺼비상가)의 모습. 영업시간이지만 다소 한가한 모습을 보인다. 사진=이코노믹리뷰

전자상가의 변화를 가장 확실히 대변하는 곳은 용산의 ‘마지막 게임 전문상가’로 불리는 나진상가(두꺼비 상가)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곳의 주말은 새로운 게임을 찾는 이들로 발 디딜 틈 없었지만, 게임 유통방식이 온라인 다운로드로 변하면서 찾는 사람들이 줄었다. 소비자들이 콘텐츠(게임)는 다운로드, 콘솔기기는 온라인 최저가로 구매하는 패턴으로 돌아섰다.

이에 매대를 채운 주력 품목들이 변했다. 최신 PC게임과 콘솔 게임들을 진열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구형 게임기, 구형 콘솔 게임이 매장 전면에 세팅돼 있다.

▲ 두꺼비상가 내 입점한 게임매장. 1990년대 열광하던 슈퍼패미컴과 메가드라이브 게임이 저렴하게 판매되고 있다. 사진=이코노믹리뷰

가장 많이 보이는 상품은 4세대 게임(1987~1999년 출시)인 ‘슈퍼패미컴(슈퍼컴보이)’과 게임팩, 그리고 5세대 게임(1993년~2006년 출시)인 플레이스테이션1~3과 세가세턴 콘텐츠들이다. ‘동물의 숲’과 같은 최신 게임을 찾는 이들도 종종 있지만 많지는 않다.

대부분이 중고 거래인 만큼 매장을 찾는 이들은 1020세대가 아닌 마니아층 3040세대가 대부분이다. 게임 수집이 목적인 콜렉터들도 상당수 찾는다.

나진상가 1층 휴대폰 매장에는 낮선 피부색을 점원들이 늘었다. 대부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계 판매원들이다. 내방하는 한국인이 줄면서 중고 휴대폰, 선불폰 매장이 증가했다.

▲ 한신전자타운 지하 입구. 사진=이코노믹리뷰

컴퓨터용품 및 혼수용품 복합매장을 목표로 개장했던 한신전자타운도 전자상가 침체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1994년 연면적 7000평, 컴퓨터 매장 200여개와 가전 및 혼수용품 매장 100여개가 들어섰던 곳이지만 지금은 혼수용품 매장을 찾아볼 수 없다.

적지 않은 매장들이 자리를 비웠고 정리되지 않은 통로, 다소 어두운 분위기에서 일부 PC제조업체들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매장을 찾는 소비자는 거의 없고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주문을 받고 이를 조립해 납품하는 곳들이다. 

그나마 활발한 모습을 보이는 곳은 선인상가다. 복도 양쪽을 가득 메운 상가들은 노트북, 조립PC에 가격표를 세웠고 일부 매장에서는 가격 흥정도 이뤄진다. 대부분의 상인들이 온라인으로 매출을 올리는터라 바쁘게 드나드는 택배상자들을 볼 수 있다.

▲ 전성기 시절이던 2000년대 초반의 용산전자상가. 사진=서울시

연 매출 10조원 ‘황금상권’… 무엇이 그들을 바꿨나 

지금은 다나와, 쿠팡, 네이버쇼핑 등 이커머스를 통해 제품을 구매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개인PC, 콘솔 게임기, 워크맨, CD플레이어, 전자사전을 한눈에 둘러볼 수 있는 장소가 용산전자상가, 테크노마트, 국제전자상가 정도로 한정됐다.

그 중 단연 앞선 곳이 용산이다. 터미널상가·나진상가·선인상가·원효상가·전자타운·전자랜드로 이어지는 상권은 거대한 전자 마켓을 형성했고 언제나 사람이 몰렸다. 혼수 가전을 사려는 신혼부부, IT기기를 구하려는 10~30대, 그리고 새로운 문화(특히 애니메이션)에 열광하는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용산의 전성기는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된다. 개인용컴퓨터(PC)의 대중화가 시작됐고, 이는 초고속 인터넷망(ADSL)이 보급되면서 가속화됐다. 콘솔 게임 시장 성장과 개인용 휴대전화 대중화가 맞물리며 용산은 연매출 10조원을 올리는 거대한 메가상권으로 거듭났다.

▲ 용산전자상가의 현재. 사진=이코노믹리뷰. 자료=상가정보연구소

하지만 G마켓, 옥션, 11번가 등 온라인몰이 성장하며 상권은 급격한 침체에 빠졌고, 스마트폰의 일상화로 이같은 움직임은 가속화된다. 온라인 마켓이 내건 ‘투명한 상거래’ ‘경쟁적인 가격정책’은 기존 용산 상인들의 방식(비 정찰제)보다 선호됐고 ‘용팔이’라 불린 악덕상인들이 미디어를 타며 전자상가의 연매출은 전성기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변화는 또 있다. 용산역 역사는 복합쇼핑공간 ‘아이파크몰’로 재탄생했고, 터미널전자상가가 자리잡았던 부지에는 고급호텔(서울드래곤시티)이 들어섰다. 성매매 집결지가 있던 곳은 공터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