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는 소프트뱅크가 영국의 반도체 칩 설계전문업체 암(ARM)을 매각할 수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반도체 업계가 요동치고 있다. 암이 설계한 반도체가 곧 시장의 질서가 되는 상황에서, 만약 소프트뱅크가 암을 매각한다면 그 주인이 누가 될 것인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정중동 소프트뱅크
투자의 귀재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는 지난해 4월부터 올해 3월까지 11조엔(16조원)의 적자를 기록할 정도로 위기속에서 표류하고 있다. 근간이 흔들릴 정도의 요란함을 떨 필요는 없으나, 최근 연이은 투자 실패로 큰 어려움에 직면한 것은 사실이다.

손 회장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오일머니가 의기투합한 비전펀드의 실패, 특히 위워크 투자 실패가 결정타를 날렸다. 위워크는 한 때 공유 오피스의 신기원을 세우며 자사를 공유경제 기업으로 포장, 막대한 투자금을 빨아들였으나 창업자 애덤 뉴먼의 방만한 경영에 온디맨드 비즈니스의 약점을 고스란히 노출하며 침몰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알리바바의 지분까지 매각하며 14조원을 간신히 조달하고 티모바일의 최대주주인 도이치텔레콤에 지분을 전부 매각하는 등 실탄 대비에 집중하는 분위기다.

논란이 커지는 상황에서 월스트리트저널이 13일(현지시간) 소프트뱅크가 암을 매각할 수 있다는 보도를 하자 글로벌 반도체 업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아직 소프트뱅크의 공식적인 입장은 나오지 았으나, 만약 암을 매각한다면 그 자체로 시장의 판세가 크게 출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프트뱅크는 4년 전 암을 243억파운드(약 35조원)을 주고 인수한 바 있다.

암은 반도체 칩 설계회사로 활동하면서 사물인터넷 시장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실제로 암은 저전력 반도체 설계도와 명령어셋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모바일 혁명을 발판으로 삼아 크게 몸집을 불린 상태에서, 사물인터넷 시대의 초연결 생태계 인프라 구축에 가장 근접한 기업으로 평가됐다. 소프트뱅크는 이에 착안해 전격적으로 암을 품은 셈이다.

문제는 사물인터넷 시장의 추이다. 글로벌 사물인터넷 시장이 생각보다 더딘 성장을 보이면서 인공지능 등 슈퍼 인텔리전스 패러다임을 내세운 암의 예봉이 다소 꺾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소프트뱅크가 각 파트너사에 설계도면과 명령어셋을 제공하는 평탄한 비즈니스 구조를 가진 암을 대상으로 매출 압박을 강하게 지속하자 스텝은 완전히 꼬이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암의 중국 지사 지분율이 현지 정부에 절반 이상 넘어가며 매출 구조 자체가 휘청이는 수준에 이르렀다.

소프트뱅크는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최근 암의 사물인터넷 사업 부분을 분리시켜 흡수했다. 생각보다 성장하지 못하는 사물인터넷 시장에 대비하기 위해 자사가 인수 당시 가장 매력을 느꼈던 암의 사물인터넷 부문을 떼어내며 유연한 대비에 나선 셈이다. 그러나 소프트뱅크 전체의 자금난이 심해지며 결국 암 매각 카드를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프트뱅크는 총 410억달러(약 49조4000억원) 규모 자산을 매각해 부채를 줄이려 노력하는 중이다.

매각이 될까? 주인은 애플?
소프트뱅크가 암을 매각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온 후 반도체 업계는 실제 매각이 진행될 것인지, 그리고 누가 암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인지 여부에 집중하고 있다.

우선 실제 매각 가능성은 업계의 표현대로 '정확히 반반'이다. 업계 관계자는 "소프트뱅크는 암을 인수한 후 강력한 매출 압박을 했고, 최근에는 사정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에 매각전에 돌입할 경우 높은 가격을 받으려 할 것"이라며 "이 금액을 맞춰줄 수 있는 사업자는 그리 많지 않다"고 말했다. 현실적인 인수 대상자가 나타나기 쉽지 않다는 뜻이다.

소프트뱅크가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으나 알리바바 및 스프린트 지분 매각에 이어 암까지 매각하면 타격이 크다는 말도 나온다. 정의철 ICT인프라연구소 부소장은 "소프트뱅크의 어려움이 커지고 있으나 슈퍼 인텔리전스를 바탕으로 하는 기본적인 전략은 변하지 않는다"면서 "소프트뱅크의 최근 어려움은 온디맨드 플랫폼 등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의 역풍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기술 플랫폼 자체에 대한 최후의 보루인 암은 남겨둘 수 있다"고 말했다.

소프트뱅크는 현재 암의 매각과 관련해 뚜렷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한편 암 매각 가능성을 두고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는 가운데 만약 소프트뱅크가 암을 매각할 경우 유력한 후보군으로는 AMD, , 인텔, 애플, 그리고 컨소시엄이 나설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다만 AMD와 인텔은 현 상황에서 암을 품을 가능성이 낮다. AMD는 현금 보유액이 너무 적고 인텔은 시장 독과점 규제에 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유력한 곳은 애플이다.

애플은 최근 온라인으로 진행된 WWDC 2020에서 새로운 iOS 버전을 공개하는 한편 인텔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퀄컴과의 특허분쟁 당시까지 인텔과 5G 동맹을 맺는 등 공격적인 행보를 보였으나 이후 완전한 인텔과의 독립을 선언한 셈이다. 

실제로 애플은 지난 2006년부터 맥 컴퓨터에 인텔의 칩을 탑재했으며 2007년부터는 모든 물량에 인텔칩을 넣었다. 다만 애플은 인텔과의 협력을 통해 맥 컴퓨터 존재감을 키웠으나, 2012년부터는 모든 맥에 자체 생산된 칩을 탑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칼라마타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시작한 바 있다.

인텔과 결별한 애플은 자사 소프트웨어에 최적화된 하드웨어를 자사의 입맛에 맞게 제작한다는 수직계열화 로드맵을 강하게 추진하는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인텔과 결별하고 암의 IP를 활용한 CPU, 즉 애플실리콘을 개발한다고 선언했다. 물론 애플이 공식적으로 암을 상용하겠다고 밝힌 것은 아니지만, 업계에서는 애플이 인텔과 결별하고 홀로서기를 시도하면서 암과의 관계를 더욱 밀접하게 꾸려나갈 것이라 본다.

x86 컨퓨팅 분야에서 AMD의 입김이 커지고 있으나 암이 새로운 가능성을 적극 보여주며 슈퍼 컴퓨팅 전략까지 가동하는 모양새다. 성공적인 수직 계열화를 추구하려는 애플 입장에서는 암을 품는 것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심지어 애플은 암이 설립될 당시 초기 투자에 나서기도 했다. 서로의 철학을 잘 이해하는 만큼 두 기업의 결합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 암의 반도체 이미지. 출처=갈무리

저항군 등장할까?
만약 애플이 소프트뱅크의 암을 인수하면 전체 반도체 시장 플레이어들의 계산은 더욱 복잡해진다. 애플이 암을 인수해 각 제조사들에 로열티를 받는 구조가 된다면, 지금까지 지식재산권 제공을 통해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던 방식은 더이상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도체 회사들의 두뇌며 근원지인 암이 칩을 설계하려는 애플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암을 통해 가동되던 기존 질서는 붕괴되고 만다. 암에 칩을 의존하고 있는 삼성전자 및 퀄컴 등이 컨소시엄을 꾸려 암 인수전에 나설 수 있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가 100%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해소된 상태에서 공격적인 인수합병을 통한 다양한 가능성 타진이 이뤄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삼성전자는 이 부회장이 국정농단 사건으로 법정구속되기 직전까지 하만을 비롯한 다수의 기업들을 인수합병했으나, 이 부회장이 사법 리스크에 묶이는 순간 그 행보를 멈춘 바 있다. 한 때 글로벌 파운드리 인수 가능성도 있었으나 최종 불발됐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막대한 기업 유보금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이 부회장은 16일 삼성전기 MLCC 제조 현상 방문까지 총 7번의 현장경영에 나서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하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컨소시엄에 참여해 중국 기업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미국의 제재를 절묘하게 피하는 쪽으로 암 인수를 사실상 주도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