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바일 기반 전자 작업 허가 시스템(e-Permit)'이 사용되고 있는 SK인천석유화학 사업장. 출처= SK인천석유화학

[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의류용 섬유, 직물 등을 만들었던 기업 ‘선경(현 SK그룹의 전신)’을 단숨에 재계순위 상위 기업으로 만든 것은 주력사업을 바꾼 경영진의 과감한 결단이었다. 동시에 이 결단은 SK그룹이 ‘무려’ 2개 분야의 국가 기간산업을 운영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다. 정유·에너지는 현재 SK그룹의 입지를 만든 SK의 ‘필살기’와 같은 사업 분야다.   

지금의 SK를 만든 단단한 ‘반석’ 

1953년 최종건 창업주가 창립한 선경직물에서 SK그룹 정유·에너지 사업의 역사는 시작된다. 기업명에서 알 수 있듯 선경직물은 섬유를 기반으로 한 의류 제조와 유통업을 주력으로 삼은 회사였다. 1960년대 일본 기업과의 합작으로 합성화학섬유까지 사업 범위가 확장됐고 이를 통해 선경은 국내를 대표하는 섬유·의류 기업으로 성장해 나간다. 

이 때 창업주의 타계 후 선경의 경영을 이어받은 창업주의 동생 최종헌 회장은 합성섬유의 원료인 석유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석유를 활용한 여러 가지 가능성에 눈을 뜬 최종헌 회장은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하면서 선경의 주력 업종은 섬유·직물에서 정유·에너지 분야로 일시에 전환된다. 선경의 대한석유공사 인수배경에는 당시의 군사정권과 선경의 경영진 사이에 이어진 모종의 연결 관계가 작용했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은 선경이 정유·에너지 사업 진출을 위해 정치권과도 연을 대는 등으로 부단한 노력을 했다는 것이다.

과감한 업종전환이 이뤄진 이후 선경은 ‘SK’로 사명을 바꾸고 주력사업인 정유·에너지의 경쟁력을 기반으로 사업영역 확장에 나선다. 정유·에너지와 인접한 사업으로는 화학, 배터리, 특수소재 부문, 인접하지 않은 사업으로는 이동통신 사업(현재의 SK텔레콤), 그리고 반도체 사업(SK하이닉스)까지 SK는 영역을 넓힌다. 이 때의 사업 확장은 현재 SK가 정유·에너지, 통신, 그리고 반도체를 자사의 3대 업종으로 내세울 수 있는 기반이 된다. 

특히 가장 최근 수 년 동안 SK의 효자 종목이 되고 있는 반도체의 경우 지난 2011년 SK 최태원 회장이 정유·에너지와 통신으로 그간 SK가 쌓아 온 ‘모든 것을 걸고’ 얻어낸 사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유·에너지는 통신사업의 밑거름이 됐고 이 두 사업은 반도체 사업의 밑거름이 됐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SK를 만든 기반은 곧 정유·에너지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 SK이노베이션 정유사업 구조도. 출처: SK이노베이션

기름 안 나는 나라의 석유 ‘수출기업’ 

SK그룹의 석유화학사업부문 통합 계열사 ‘SK이노베이션’의 사업은 크게 석유개발, 석유제조·판매 및 수출, 화학, 윤활유, 그리고 배터리 등으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석유 수출’이다. 상식적으로 접근하면, 기름(原油) 한 방울도 추출되지 않는 국내 정유 기업이라면 해외에서 원유를 수입해서 이를 정제해 대부분을 내수용으로 판매하는 것이 기본적인 수익구조다. 그러나 SK이노베이션은 해외 석유 수출로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기업이다. 1980년 이후 약 4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꾸준하게 누적된 SK이노베이션의 정유 기술을 통해 생산된 휘발유와 경유는 일종의 2차 가공품이다. 이것이 글로벌 시장으로 수출되고 있다. 

석유 외에도 정유 기술을 기반으로 생산되는 SK이노베이션의 다양한 품목은 전 세계 약 112개 국가로 수출되고 있다. 1997년 3조원에 불과했던 SK이노베이션의 수출액은 그로부터 14년 후인 2011년 약 47조원(47조5616억원)으로 약 16배 늘어났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6년 동안 누적된 SK이노베이션의 해외 수출액은 약 150조원으로 이는 삼성전자 다음으로 많은 수출액이다. 아울러 현재까지도 SK이노베이션의 매출 중 약 70%는 해외에서 발생하고 있다.  

▲ SK이노베이션 주요 석유개발 사업 광구 현황. 출처= SK이노베이션

코로나19 위기, 그리고 ‘배터리’ 

SK이노베이션은 올해 1분기 1조7750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이 중에서 정유사업 부문의 적자가 1조6360억원으로 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여기에는 코로나19로 인한 악재가 한껏 반영됐다.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소비 감소, 그로 인한 석유 가공품 수요 감소, 그로 인한 석유 수요 감소 등 악순환의 연쇄 반응이 악재로 작용한 것이다. 철저한 외부 요인으로 인한 수요 변동이 원인이었기에 SK이노베이션 입장에서 정유사업의 실적 부진은 ‘불가항력(不可抗力)’이었다. 그래서 SK이노베이션은 장기적 관점에서 외부 요인에 민감한 정유 보다는 다른 분야에서 위기의 돌파구 마련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바로 지난 7일 이뤄진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수석부회장과 최태원 회장의 ‘배터리 회동’이다. 현대차그룹의 경영진들은 SK이노베이션 배터리 생산 공장을 방문해 SK경영진들과 차세대 배터리 기술을 근간으로 한 협력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과거에 섬유에서 석유사업으로 주력업종을 전환했을 때처럼 친환경 전기 연료가 각광받을 미래를 내다보고 SK는 ‘에너지’ 측면에서 미리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