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월정 정주상=유어예(遊於藝),54×134㎝<개인소장> (오른쪽)여초 김응현=전적벽부(前 赤壁賦),135×330㎝,1999<개인소장> <사진=권동철>

‘한국근대서예명가전-붓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서예가 23인’전시가 서울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2~3층 전시실에서 총120여 점의 작품으로 열리고 있다. 지난 6월20일 오픈하여 8월16일까지 성황리 전시 중인 현장을 찾았다.

◇대한민국서예1세대 23명 서예가

시서화 삼절(三絶)의 대구출신 석재 서병오(1862~1935)는 평생 퇴계 이황과 추사 김정희를 존경했다. 조선문인화를 이어받은 선비서예가 서울출신 영운 김용진(1878~1968)은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때부터 서예부 사군자를 포함해 심사위원을 5번이나 역임하였다. 전북고창출신 석전 황욱(1898~1993)은 1960년경부터 오른손 수전증으로 붓을 잡기 어렵게 되자 왼손바닥으로 붓을 잡고 엄지로 붓 꼭지를 눌러 운필하는 악필법(握筆法)을 개발하였다.

또 고결한 예술인의 정신 대구출신 죽농 서동균(1902~1978)은 오로지 작가로서의 삶에 전념하였다. 그의 장례가 대한민국문화예술인장으로 거행된 것은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서 그의 위상을 알려준다. 소전체(素筌體)의 전남진도출신 소전 손재형(1903~1981)은 1954년과 1960년에 각각 초대 및 제2대 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 근현대 시기의 고서화 수장가로서 그리고 문화재지킴이로서 남다른 안목을 지녔던 소전이 국보 제180호인 추사 작품 ‘세한도’를 일본에서 되찾아온 일화는 유명하다.

한국전각(篆刻)을 개척한 충남예산출신 석봉 고봉주(1906~1993)는 1965년 서울국립중앙공보관에서 ‘제1회 고석봉 전각서예전’을 개최하였다. 고전에 대한 쉼 없는 천착을 한 제주도서귀포출신 소암 현중화(1907~1997)는 1997년 광주광역시 주관, 의재 허백련 미술상을 수상했다. 2008년 서귀포에 ‘소암기념관’이 개관됐다. ‘뭉툭 글씨’ 원곡체(原谷體)의 충남부여출신 원곡 김기승(1909~2000)은 1979년 고희를 맞아 원곡서예상을 제정했다.

▲ 검여 유희강=무량청정(無量淸淨),64×43㎝,1965<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예술의전당 제공>

이와 함께 불굴의 예술혼 인천출신의 검여 유희강(1911~1976)은 1968년 뇌출혈로 왼손 글씨 수련을 시작하였다. 1976년 작고할 때까지 네 차례 왼손 글씨 개인전을 열었다. 전북김제출신 강암 송성용(1913~1999)은 일민미술관 ‘강암은 역사다’회고전으로 유명하다. 전주시는 1995년 강암서예관, 강암서예학술재단을 세웠다.

황해도개성출신 갈물 이철경(1914~1989)은 한글궁체의 필법을 체계화시키는 데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초서(草書)로 일가(一家)를 이룬 황해도신천출신 어천 최중길(1914~1979)은 ‘어천묵림회’를 열어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도 열성이었다. 전서서풍(篆書書風)의 경남김해출신 시암 배길기(1917~1999)는 전서와 예서가 주를 이루며 행서와 해서에도 능했다.

또한 전각과 서예에 정진한 서울출신 철농 이기우(1921~1993)는 1959, 1962년 제2~3회 철농 이기우 서예전각전을 통해 탁본기법, 판각 등 전통과 시대미의 융합을 시도한 독창적인 세계를 의욕적으로 펼쳐보였다. 한글서예의 근대화 일중체(一中體)의 서울출신 일중 김충현(1921~2006)은 1948년 28세에 최연소 문교부예술위원과 서울시문화위원이 되어 소전 손재형 및 죽농 서동균과 함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창립준비과정에서 서예부문을 포함시키고 한글서예부문을 공식화했다.

▲ (왼쪽)어천 최중길=왕우군(王右軍),135×35㎝,1970<개인소장> (중앙)여초 김응현=귀거래사(歸去來辭),43.5×165㎝,1962<개인소장> (오른쪽)효남 박병규=어부사(漁父辭),136×35㎝×10<성균관대학교박물관 소장> <사진=권동철>

경기강화출신 동정 박세림(1924~1975)의 서예술 성취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행초서다. 첩학(帖學)과 비학(碑學)에 능통했던 경북 선산출신 동강 조수호(1924~2016)는 2009년도 북경비엔날레에서 중국서법연맹회장, 한국서가협회 공동회장, 한국예술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8년 원광대학교 서예과 창설에 기여한 전북임실출신 남정 최정균(1924~2001)은 강암 송성용, 여산 권갑석 등과 함께 1960년대 이후 전라북도 서예를 중앙무대에 우뚝 세우는데 가교역할을 하였다.

아울러 서예와 음악에 심취한 경북달성출신 효남 박병규(1925~1994)는 1970년 46살에 ‘청진서회’를 창립하고 종로구 견지동에 서실을 개원하여 후진을 양성하기 시작하고 이 해에 ‘신동엽 시비’를 썼다. 1994년 효남은 생전의 유언대로 롯시니의 ‘월리엄 텔 서곡’을 들으며 영면에 들었다. 경남함양출신 월정 정주상(1925~2012)은 한글서예는 물론 독학으로 행초서를 자득한 예외적 성취를 보여주었다. 국제난정필회를 통한 서예문화교류를 주도했다.

조형예술로서의 서예를 추구한 충남홍성출신 학남 정환섭(1926~2010)은 1977년 국전 서예부문에서 두 번째로 국전 초대작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정통서법의 서울출신 여초 김응현(1927~2007)은 1956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예연구기관인 ‘동방연서회’를 창립하였다. 서예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한 전남함평출신 평보 서희환(1934~1995)은 1970년대 중기 이후에는 고전의 예스러운 풍격을 바탕으로 솔직한 힘과 진정성을 불어넣는 독특한 필법으로 질박하면서도 굳센 필치를 이루었다.

한편 초정 권창륜(艸丁 權昌倫) (사)한국서예단체총연합회 회장은 “서예는 천문(天文)과 인문(人文)의 결합체로서 정신문화의 뿌리이며 핵심”이라며 “여러 여건상 스물 세분만 모시게 되어 아쉬움이 남는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