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박민규 기자] 현대자동차가 SK와의 회동을 마지막으로, 'K-배터리 동맹'의 밑그림을 갈무리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 부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7일 오전 충남 서산 소재 SK이노베이션 배터리 공장을 찾아 미래 전기차용 배터리 및 신기술 분야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는 SK그룹의 배터리 사업을 초기 기획 단계부터 지원해 현재까지의 성장에 큰 몫을 한 것으로 평가 받는 최재원 SK그룹 수석 부회장도 참석, 양사 간 논의에 의견을 보탠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은 “미래 배터리, 신기술 개발 방향성을 공유하는 의미 있는 자리였다. 현대차그룹은 인간중심의 미래 모빌리티 시대를 열고 인류를 위한 혁신과 진보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고 말하고, “우리 임직원들은 고객 만족을 위해 보다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자세로 업무에 임할 것이며, 세계 최고 기술력을 보유한 기업들과 협업을 확대해 나갈 것이다”고 밝혔다.

최태원 회장은 “현대·기아차가 글로벌 시장에서 전기차 등 미래 모빌리티 분야의 선도적 입지를 구축하고 있는 만큼 이번 협력은 양 사의 성장을 물론 한국경제에도 새로운 힘이 될 것”이라면서 “코로나19가 가져올 경영환경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면서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높여 나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 출처=SK

K-배터리 동맹의 완성

정 수석부회장이 찾아간 SK이노베이션의 서산 공장은 SK 배터리 사업의 모태 격이자 배터리 생산 거점으로, 지난 2012년부터 연간 4.7기가와트시(GWh) 규모의 배터리를 양산해 왔다. 그 역사적인 현장에서 두 그룹의 총수가 만나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한 셈이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만나면서, 현대차는 국내 배터리 3사 모두와 만나는 '배터리 회동'을 마무리 지었다. 앞서 정의선 수석 부회장은 지난 5월 충남 천안에 있는 삼성SDI 공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만난 것을 시작으로, 6월에는 구광모 LG그룹 회장과 충북 청주에 위치한 LG화학 오창 공장을 방문했으며 7일 최태원 회장까지 접촉하면서 '드림팀' 구성을 위한 광폭 행보를 보인 바 있다. 

현대차의 이 같은 행보는 향후 전기차 시장의 급격한 성장에 따라 배터리를 확보하기 힘들어지는, 이른바 '배터리 대란'에 대비한 움직임으로 분석된다. 글로벌 배터리업계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국내 배터리 업체들과 협력을 도모해, 고성능·고효율 배터리의 안정적 공급망을 조성하기 위한 전략인 셈이다.

최근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공격적인 전기차 로드맵을 가동하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결국 유럽을 중심으로 친환경 규제가 강해지며 배터리 수급을 위한 전략적 충돌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현대차가 국내 배터리 3사와 협력을 타진해 안정적인 물량 확보에 나서고 있다는 평가다.

저력은 충분하다. 에너지 시장 조사 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국내 배터리 3사는 올해 1~5월 세계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 점유율 순위에서도 10위권 내 성적을 수성했다. LG화학이 24.2%로 1위, 삼성SDI가 6.4%로 4위, SK이노베이션이 4.1%로 7위를 차지했다.

현대차도 만만치 않게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전기차 전문 매체 EV세일즈에 따르면, 현대·기아차는 2020년 1분기 순수 전기차만 총 2만4116대를 판매하면서 8만8400대의 테슬라와 3만9355대의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3만3846대의 폭스바겐에 이어 세계 4위를 차지했다.

현대차는 2025년까지 전기차 판매량 56만대를 달성해 수소 전기차 포함 세계 3위권 내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아차는 세계 전기차 점유율을 지난해 2.1%에서 2025년 6.6%까지 끌어 올린다는 계획이다.

현대차가 삼성SDI와는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LG화학과는 장수명(long-life) 배터리와 리튬-황 배터리 등을 중심으로 차세대 배터리 관련 협력을 논했다면, SK이노베이션에는 배터리와 함께 신기술 면에서도 동행을 제시했다.

실제로 정 수석 부회장과 최 회장 등 양사 경영진은 SK이노베이션이 주력하고 있는 고에너지밀도·급속 충전·리튬-메탈 배터리 등 차세대 배터리 기술부터 전력 반도체와 경량 신소재, 배터리 대여·교환 서비스 플랫폼(BaaS) 등 미래 신기술 개발 방향성을 공유하고, 협력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또, SK 주유소와 충전소의 공간을 활용해 전기·수소 자동차 충전 인프라를 확충하는 방안에 대한 이야기도 오간 것으로 전해졌다.

SK이노베이션이 개발에 집중하고 있는 '리튬-메탈 배터리'는 현재 전기차용 배터리로 주로 쓰이는 리튬 이온 전지의 음극재인 흑연·실리콘 등을 리튬 메탈로 대체해, 에너지 밀도를 1000와트시리터(Wh/L) 이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차세대 배터리로, 주행 거리 확대 및 차량 경량화에 따라 에너지 절감이 가능하다.

현재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는 현대·기아차가 생산하고 있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카(PHEV)와 기아차의 니로·쏘울 EV 등에 탑재되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내년 초 양산 예정인 현대·기아차의 전용 플랫폼 'E-GMP(Electric-Global Modular Platform)' 기반 전기차의 1차 배터리 공급사로 선정된 상태다. 

SK이노베이션이 현대차에 5년 동안 납품할 해당 물량은 10조원 상당으로 추산된다. 이에 더해, 현대차가 이르면 올해 하반기 발주할 것으로 추정되는 3차 물량의 수주까지 유력하다는 관측도 나온다. 2차 물량은 LG화학이 선점한 가운데, 두 배터리 업체가 최대 고객사인 현대차를 유치하기 위해 3차 물량을 두고 치열한 입찰전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가 전날인 6일 세계 최초로 양산해 스위스로 수출했다고 밝힌 '엑시언트 수소 전기 트럭' 10대에도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가 적용됐다. 수소 전기차의 경우 수소 연료 전지를 동력으로 하는 가운데, 차의 전자 장비 구동에 필요한 보조 전력원으로 쓰기 위해 탑재된 것이다. 현대차가 트럭 부문에도 수소 전기차 공급을 본격화함에 따라, 여기에 탑재될 배터리 수요도 급증할 것으로 전망된다.

▲ 현대차의 전기차 플랫폼. 출처=현대차

모빌리티 전반의 꿈

한편 정 부회장과 최 회장은 전기차 외에도 현대차가 미래 신사업으로 추진 중인 개인용 비행체(PAV)와 목적 기반 모빌리티(PBV)에 들어갈 배터리에 대해서도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 관계자는 "SK와는 미래 친환경 운송 수단으로 꼽히는 PAV와 PBV에 적용되는 배터리 뿐 아니라 첨단 소재와 반도체, 데이터 기반의 정보통신기술(ICT) 등과 관련해 총체적으로 협업할 여지가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재계 1~4위를 나란히 차지하는 쟁쟁한 그룹들의 회동을 계기로 'K-배터리 드림팀'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애초 전기차 등 미래 모빌리티 산업은 정부가 주도해 육성을 꾀했던 분야지만, 국내 배터리 업체들이 글로벌 시장에 집중하면서 'K-모빌리티' 생태계 쉽사리 조성되지 않았다. 이번 릴레이 회동을 통해 현대차를 중심으로 배터리팀이 꾸려진다면 국내 유럽과 중국 등 전기차 시장의 강자들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온다.

현대차는 전기차와 수소차, 도심항공이라는 3가지 축을 통해 다양성을 타진하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배터리를 중심으로 하는 국내 생태계를 발전시켜 친환경 에너지를 비롯해 플랫폼 전반의 체력을 키우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국내 '배터리 동맹'의 긴밀한 협력은 어려울 것이라는 일각의 비관론도 있다. 배터리 업체의 경우 테슬라와 폭스바겐 등 현대차의 경쟁 상대인 고객사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고, 현실적으로 배터리 3사의 기술과 플랫폼 등이 모두 다르다는 점에서 또한 간극이 크다. 기술 노출 리스크 앞에서 서로를 견제하는 가운데 '깊은' 협력은 힘들 것이라는 시각이 나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