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회동 순). 출처= 이코노믹리뷰 DB

[이코노믹리뷰=최동훈 기자]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이 4달 만에 전세계 굴지의 한국 전기차 배터리 업체인 LG화학, 삼성SDI, SK이노베이션 등 3사의 그룹 최고경영자(CEO)를 모두 만난다. 전기차 배터리를 공급받는 거래 건에 관한 의견을 조율하려는 취지다.

정 부회장은 그간 삼성그룹과의 협력 사례 ‘0’의 관행을 깨고 이재용 부회장과 회동하는 등 배터리 공급처를 적극 발굴하고 나섰다. 한편 일부 경쟁사와 달리 배터리 관련 합작법인을 설립하거나 공장을 직접 구축하는 등 자체 생산 역량을 마련하려는 행보는 보이지 않고 있다. 정 부회장이 실리를 최우선 가치로 이어온 경영 기조를 전기차 사업에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다.

이재용 부회장과 가장 먼저 ‘K-배터리 회동’ 현대차-삼성 협력 급물살

6일 자동차 업계에 따르면 정 부회장은 오는 7일 충남 서산 소재 SK이노베이션 전기차 배터리 사업장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만난다.

이번 만남은 현대차·기아차 양사와 SK이노베이션 등 전기차 관련 업체들을 중심으로 전기차 배터리 분야에 관한 사업 협력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그룹은 정 부회장 일정이나 사업 협력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을 삼가고 있다.

정의선 부회장은 지난 2016년 전기차 ‘아이오닉’을 출시함으로써 전기차 제품 시장에 본격 뛰어들 때부터 LG화학, SK이노베이션 등 두 업체로부터 배터리를 수급해왔다. LG화학, SK이노베이션의 전기차 배터리 공급 역량이 전세계 상위권 수준을 갖췄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작년 완성차 업체에 공급된 배터리의 총 용량을 기준으로 매겨진 배터리 업체별 순위는 LG화학 3위(12.3기가와트시·GWh), SK이노베이션 10위(1.9GWh) 등으로 나타났다. 1GWh는 순수 전기차 약 2만대에 탑재할 수 있는 수준의 용량이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차-LG화학, 기아차-SK이노베이션 등 업체별 파트너사와 주로 배터리 공급 계약을 유지해오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다만 그간 삼성SDI로부터 배터리를 공급받은 적 없다. 현대차·기아차 양사가 주머니(파우치) 형태의 배터리를 탑재하고 있어 삼성SDI의 원통형 배터리를 호환 장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업계 일각에서는 1998년 기아자동차가 매물로 나왔을 때 현대차와 삼성자동차(현 르노삼성자동차) 양사가 인수 후보자로서 경쟁하며 갈등을 빚은 탓에 그간 그룹 간 협력 사례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정의선 부회장이 이 같은 상황에서 배터리 3사 수장 가운데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가장 먼저 만난 건, 현대차 ‘배터리 공급처 다변화 전략’의 국면 전환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현대차그룹이 전기차 라인업을 지속 확장해나가는 가운데 기존 두 업체만으론 배터리를 안정적으로 수급하는데 제한점이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란 관측이다.

현대차·기아차 양사는 오는 2025년까지 순수전기차를 비롯한 친환경차를 총 44종 출시할 계획이다. 수소전기차를 제외한 대부분 친환경 모델에 전기차 배터리가 탑재되는 점을 고려할 때 향후 5년 내 전기차 배터리에 대한 양사 수요가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차·기아차는 현재 마일드 하이브리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순수전기차 등 형태의 전동형 차량 13종을 판매하고 있다.

또 글로벌 자동차시장 분석업체 워즈오토(Wards Auto) 등에 따르면 전세계 전기차 시장 규모가 올해 221만대에서 2025년 4배 가까이 늘어난 859만8000대로 급성장할 것으로 전망되는 점도 현대차의 선제적 대응을 유도하는 요인이다.

정의선 부회장은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일 전기차 시장에서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과거 선대 CEO 간 갈등구도를 초월한 실리 중심의 동맹관계를 구축하려는 것으로 분석된다. 삼성SDI는 BMW, 폭스바겐 등 유력 완성차 업체에 배터리를 공급하며 작년 기준 글로벌 5위(4.2GWh)를 점한 유력 전기차 배터리 업체다. 업계에서는 현대차 제네시스가 내년께 출시할 G80 전기차에 삼성SDI 배터리가 탑재될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현대차그룹은 제네시스 전기차의 부품 공급처에 관한 말을 아끼고 있다.

현대차그룹, 배터리 합작사·자체공장 無…“배터리 3사 외주로 충분”

정 부회장은 실리를 최우선 가치로 한 전기차 사업전략의 또 다른 일환으로, 배터리 생산을 위한 합작법인을 설립하지 않고 자체 배터리 공장을 구축하지도 않고 있다. 현대차·기아차의 전기차 생산 거점인 한국에 글로벌 배터리 업체 3사의 공장이 가동되고 있어 자체 양산 역량을 갖출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전기차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완성차와 배터리를 동시에 생산해온 테슬라나 르노·닛산 등 업체를 비롯해, 타 배터리 업체와 함께 합작사를 설립한 폭스바겐, 지엠, 토요타 등 기업과는 결 다른 전략이다.

다만 이들 해외 완성차 업체들은 각사별 본거지에 배터리를 원활히 공급할 수 있는 업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급하거나 자체 역량을 길러야 했다. 반면 현대차그룹은 작년 기준 전기차 배터리 시장 점유율의 15.8%를 차지하는 한국 배터리 3사와 한 영토에서 시너지를 도모해올 수 있었다. 현대차그룹이 타 완성차 업체에 비해 전기차 사업에 있어 경쟁 우위를 점하는 부분이다. 현대차그룹은 작년 LG화학, SK이노베이션 두 업체와의 협업만으로 전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그룹 단위 판매량 기준 7위(EV세일즈 자료)에 올랐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현대차·기아차는 세계 최고 수준의 한국 배터리 업체 3개사와 협력함으로써 배터리를 충분히 공급받을 수 있다”며 “전기차 배터리에 관한 공장 구축, 합작법인 설립 등 중장기 관점의 전략에 관해서는 현재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업계 일각에서는 다만 정 부회장이 지금보다 광폭적인 행보를 보여야 할 것이란 주장이 제기된다. 현대차그룹이 작년 10월 현대차 EV 전략 방향성 자료를 통해 밝힌 ‘전기차 전세계 2~3위업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협력 관계를 더욱 확장해야 한다는 관측이다. 또 전세계 시장 입지를 더욱 확장하기 위한 차원에서 배터리 자체 생산 역량을 장기적 관점에서 확충해야 할 것이란 목소리가 나온다.

박철완 서정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현대차그룹은 전기차 라인업을 확장하고 상품성을 강화하는 등 완성차 업체로서 본연 사업역량을 기르는데 여력이 없는 상황”이라면서도 “전기차 시장 경쟁 우위의 관건으로 높은 양적·질적 수준의 배터리를 수급하기 위해 생산역량 내재화, 다중 공급처(멀티 벤더) 확보 등을 실현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