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잘 사주는데 예쁘기까지!!

금상첨화다. 한 때 꽤 유명했던 드라마였나 본데 한번도 보지는 못했다. 손예진이라는 예쁜 여배우와 당시로서는 풋풋한 신인이었던 정해인이 인기가도를 달리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킨 드라마였다. 타인과 가까워지는 데는 함께 뭘 먹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 직장생활 25년여 동안 경험이다. 아니 군대와 대학생 시절까지 포함하면 30년이 훌쩍 넘는 오랜 기간 동안의 결론이다. 사실 그 보다 훨씬 이전부터다 학교에 도시락 싸 가서 마음 맞은 친구들끼리 둘러 앉아 먹었으니, 실로 엄청나다.

군수행정병으로 28개월 반을 복무했었는데, 부대 내의 모든 물자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는 것은 웬만한 간부도 상상할 수 없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상병 휴가를 복귀한 뒤에 원래 근무하던 대대에서 바로 인근에, 사실상 하나의 영내에서, 창설되던 새로운 부대 창설요원으로 차출되었다. 덕분에 병장 달고부터는 본의 아니게 2개 대대에서 짬밥 젤 많은 선임병 노릇을 했다.

제2군수지원사령부, 우리는 이를 줄여서 군지사라 불렀다, 거기서 받아오는 모든 물품들은 부대 내 모든 병력에게 지급하기 위해서다. 식자재에서부터 빤스, 군복, 휘발유, 목재, 농기구, 총기까지 그야말로 방대한 종류의 모든 것을 받아온다. 수류탄 같은 폭약이나 탄약과 같이 일정 수량을 치장해야 하는 물품들의 경우 선입선출로 먼저 받아온 것들을 먼저 소모하고 다시 일정량을 채워 넣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기는 했다.

단, 창고 천장까지 닿을락 말락 쌓여 있는, 거기다 탄약이 꽉꽉 들어있는 나무 박스 수백 개를 옮기는 작업은 지옥이다. 병력 지원은 받지만 그들은 오너십이 없기에 결국 끝까지 남아서 작업 완수하는 사람들은 몇 안 되는 군수과 인원이었다. 내가 일병이었을 때, 딱 6월 말 요맘때 2.5톤 트럭에 한 가득 싣고 온 시멘트를 두 명이서 전부 날라본 적이 있다. 나중에는 팔다리가 덜덜 떨리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직접 요청하고 받아온 장본인들이라 기어이 끝을 본다. 그렇게 군수행정병은 모든 물품을 내 것처럼 다룬다.

 

원시시대에서도 패자는 음식으로 미녀의 환심을 샀다

각 중대에서 수시로 와서 물품을 지급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는데, 이때도 요청하는 사람들 (타 부대 중대장이나 선임하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손에 커피 한잔의 힘이 컸다. 사무실 인원이 적어서 식사도 교대해 가면서 바쁘게 일하는 도중에, 500미터는 족히 떨어져 있는 창고로 가서 물건을 내어주는 그 자체가 중노동이나 매 한가지였다. 창고 열쇠를 아무에게나 쥐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하나를 꺼내 주더라도 직접 가서 문 열고, 물건 전달하고, 현황판에 물품 수량까지 기재해야 마무리되는 번거로움이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계절에도 부탁하러 온 사람 손에 눈깔 사탕이나 껌이라도 하나 있다면 얘기가 달랐다. 딱히 배가 고프거나 먹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실 군수행정병은 식자재창고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먹거리 측면에서도 뭣하나 부족한 것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군대라는 삭막한 곳도 사람들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기에 작은 성의 표시나 잘 해보자고 다가서는 것에는 의미가 컸다.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라는 다소 민망한 제목의 책이 있다.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는 과학기술전문 언론인 피터 노왁이 쓴 것인데, 요지는 결국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섹스와 음식을 둘러싸고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도 패리스 힐튼의 방탕한 사생활을 촬영한 동영상 때문이었다. 촬영장비로 사용된 야간 투시경은 군사용이 아닌가. 그건 그렇고 원시인들은 (현대인들이라 하더라도) 싸움에서 승리한 자가 미녀를 독차지했다. 하지만 싸움에 졌더라도 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는 결국 음식을 들고 가는 것이 방법이었다. 그러면서 인류는 직립보행을 하게 됐고, 그 연장선상에서 지금도 인류의 역사는 그렇게 흐르고 있다고 말한다.

피터 노왁이 말한 세 가지 모두가 인류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지만, 개인 측면에서는 포르노산업이나 전쟁보다는 먹을 거리가 영향이 가장 클 것 같다. 과거에는 약한 자가 강한 자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는 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먹을 거리가 필요했다면 현대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는 서로의 관계를 개선시켜 나가는 쪽으로 활용되고 있다.

사람 몸에서 긍정을 유발하는 호르몬의 종류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옥시토신’이라는 것이 있다. 들쥐실험에서 짝짓기 동안에 뇌로 분비되어 결속력을 돈독히 하는 호르몬으로 알려져 있는데, 수컷은 좀 다른지 바소프레신이 그 역할을 한다고 한다. 아무튼,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즐거운 식사에서는 이런 옥시토신 같은 호르몬이 나와서 정신적 만족감을 고취시킨다고 한다. 특히 걱정과 불안감을 줄이며 관대해지고 상대방의 마음을 잘 읽게 만들어, 사회적 결속력의 증진 효과를 가져온다고 하니 사람과 사람간에 이만큼 귀한 것도 없는 듯 하다. 단, 친분관계가 있는 사람들 간에는 긍정 효과를 보이지만, 그런 관계가 없다면 배타성으로 표출 된다고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협상론의 대가 스튜어트 다이아몬드는 저서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에서 ‘먼저 사람관계부터 해결해야 한다. 절대 일방적으로 논의를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 합의를 이끌어낼 수 없고, 설령 이끌어 낸다 하더라도 결코 오래 유지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가 가장 강조한 것이 사람관계다. 드라마 내용은 모르겠지만 손예진과 정해인 이 둘의 관계는 연장자인 손예진이 밥을 사주면서 서로 끌리고 가까워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둘 간의 관계와 밥이 중요한 포인트다.

 

어려운 고객 접대는 잘 하지만, 내부 고객은?

관계가 먼저인가 접대가 먼저인가는 고차원적인 문제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사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것처럼 어렵다. 관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차라도 대접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만큼 접대와 관계는 거의 동시적인 것이라 생각된다. 나는 식사를 함께 하기 전에는 제대로 인사를 나눈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새로운 담당이 오거나 하면 처음 만남을 식사 자리로 만들고 기왕이면 서로 유쾌한 얘기로 돈독한 사이가 될 수 있게 노력했다.

그렇게 맺어진 관계가 십 년을 넘어 십오 년 이상 지속이 된 사람들이 꽤 있는데, 어느덧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관계가 된 것 같기도 하다. 업무상 만나는 사이였지만 개인적인 속사정까지 알게 되는 그런 사이로 발전해왔다. 때로는 저녁자리에서 가벼운 반주로 시작한 것이 몇 차례 자리를 이동하면서 술꾼들이나 찾는 그런 곳을 찾기도 한다. 경우마다 달라서 노래를 겸한 질펀한 자리도 있었지만, 때로는 포장마차나 시장통 모퉁이의 숨겨놓은 구멍가게일 때도 많았다.

어려운 고객에게 잘 접대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기본이다. 예전에 있었던 회사들이 한창씩 잘 나가다가 재무적으로 어려움들을 겪었는데, 그럴 때마다 은행사람들과 접대자리에 간간이 지원을 나갔던 적이 있었다. 농담 삼아 ‘네가 오늘 마신 폭탄주 한잔이 나중에 회사에 몇 억 원으로 돌아올 것이다’며 그 독한 양주와 폭탄주를 수도 없이 들이키기도 했다. 그때야 3말 4초였기에 지금보다는 술에 견디는 힘이 있었다.

어려운 은행 사람들을 거의 다 취하게 만들어 보낸 뒤, 그 자리를 주도했던 CFO가 의기양양하게 ‘적군을 물리쳤으니 승전주를 마시자!’며 그 밤에 또 다른 자리에서 아군들끼리 정리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접대는 거의 이런 범주에 속한다. 그래서 아재들은 그런 자리에서 마시던 술버릇이 남아서 내부 사람들과 마실 때도 발동이 걸려서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달라졌지만 말이다.

예전에 힘들었을 때 프리랜서도 살짝 겸했던 적이 있었다. 이천시 프로젝트 때였는데, 한번은 기자들을 초청해서 이천으로 팸투어를 진행했다. 그 날의 마지막 자리는 이천의 맛집 순서로 공무원들도 참석한 저녁식사였다. 새벽부터 기자단을 이끌고 발이 부르트고 목이 갈라지도록 이곳 저곳 다녀야 했다. 하지만 현지 사람들의 센스가 부족해서였는지 신경을 쓰기 싫어서였는지 식당 섭외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내가 직접 식당 사장에게 사정을 하고 난 뒤에야 자리가 만들어졌다. 식사를 하면서도 어색한 분위기를 어찌해 볼 요량에, 말수도 적은 내가 온갖 엄한 말들을 해가면서 대화가 끊어지지 않도록 진땀을 흘려야 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이천은 도자기로 유명한데, 그때가 상도라는 드라마가 유명했던 터라 기념품으로 ‘계영배’를 준비했었다. 나 역시도 상도라면 책부터 드라마까지 섭렵했기에 은근히 기대를 잔뜩 하고 있었는데, 선물 꾸러미를 보니 숫자가 하나가 모자랐다. 당연히 내 몫은 없었다. 기자들이랑 똑 같이 서울에서 왔다고 하더라도 주최측에 속했으니 당연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내심 힘 빠졌다.

요즘이야 덜 하지만, 예전에는 내부 직원들은 중요한 접대자리에 불려가는 것을 은근히 바랬다. 그런 자리에 가야 한우나 한정식을 구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들과의 얘기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눈 앞의 고기에만 신경 쓸 수 밖에 없었다. 그 말로 눈치만 보고 술과 음식만 축낼 뿐이었다. 가끔은 옆에 앉았던 선배들로부터 눈총을 받기도 하고 옆구리를 쿡쿡 찔리기도 했다. 또 때로는 평소에는 함께 식사를 못하니 그런 자리에서나마 맛있는 거나 실컷 먹으라는 선배의 조언이 씁쓸했다. 그런 식사 자리도 없으면 선배들과 대화도 전혀 없었다. 그런 것이 직장이려니 했다. 모래알들일 뿐이었다.

조직이든 직장이든 구성원들을 그냥 밥이나 축내는 비용이라 여기는 시절은 지났다. 고객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닿는 내부고객이라는 용어를 쓰는 시절이지만, 그렇게 조직원이자 소중한 고객으로 대우 받는다는 것은 잘 나가는 남 얘기들이다. 어려운 고객을 대하듯 직원들을 대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고, 거부감 생기는 흥청망청 회식도 아니다. 옥시토신 분비되어 소속감이 생기게 만드는 자리, 코 밑에 하는 진상이 제일이라는 말처럼 내부 사람들에 대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