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법을 어기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습니다.편법에 기대거나 윤리적으로 지탄받는 일도 하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회사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만 집중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한 차원 더 높게 비약하는 새로운 삼성을 꿈꾸고 있습니다"

지난 5월 6일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가 대국민 사과를 통해 한 말이다. 당시 이 부회장은 자녀 승계는 없을 것이며, 법과 윤리를 엄격히 지키는 한편 무노조 경영을 타파하고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라 강조했다.

이 부회장의 이러한 선언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로 코너에 몰렸으나 최근 극적으로 기사회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법조계와 학계, 언론계, 시민단체, 문화·예술계 등 각 분야에서 선정된 15명의 현안위원들로 구성된 검찰수사심의위원회는 2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해 불기소해야 한다고 의결했다.

문제는 다음이다. 이 부회장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의 수위는 크게 낮아졌으나 아직 여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이 부회장과 삼성은 갈림길에 섰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전면에 나선 이재용 부회장
이건희 회장이 2014년 병을 얻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가운데, 이재용 부회장이 전면에 등장했다.

이 부회장은 빠르게 움직였다. 동요하는 조직을 빠르게 추스리는 한편 뉴 삼성(New Samsung)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며 각 사업부 점검에 나서는 한편,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결정 행보에 돌입했다. 실사구시 전략에 맞춘 새로운 경영기법을 빠르게 체화해 발전시켰으며 강력한 인수합병 로드맵도 가동했다. 

당장 2014년 8월 스마트싱스, 콰이어드사이드를 비롯해 11월에는 서버용 SSD 소프트업체인 프록시멀데이터를 인수했으며 2015년 11월에는 브라질 문서 출력관리 기업인 심프레스도 전격 인수했다. 2015년 2월에는 삼성페이의 모체가 된 루프페이를 인수했고 3월에는 사업용 디스플레이 시장 전통의 강자인 예스코일렉트로닉스도 손에 넣었다.

2016년 6월에는 클라우드 업체 조이언트, 스마트TV의 애드기어도 연이어 인수했고 8월에는 캐나다를 포함한 북미 주택 및 부동산 관련 시장에서 럭셔리 가전 브랜드로 명성이 높은 데이코를, 이후에는 하만 인수합병도 진두지휘했다.

그러나 국정농단 사건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이 부회장은 법정 구속됐으며 서울고등법원 형사13부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할 때까지 약 1년간 삼성은 초유의 총수 부재 사태와 직면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출소 직후 북미와 유럽, 중국과 일본 등을 돌며 글로벌 경영에 시동을 걸었다. 신남방 정책을 추진하는 정부와 보폭을 맞추며 인도 노이다 공장 준공식 현장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만나기도 했고, 지난해에는 삼성 반도체 비전 2030 선언을 통해 야심찬 시스템 반도체 전략을 선언하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최근까지 현장경영에 집중했다. 코로나19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중국 시안 반도체 라인 공장을 다녀왔고, 시스텐 반도체 전략도 차근차근 쌓아올렸다. EUV 및 낸드플래시 중심 투자도 빨라졌고 탈 LCD 기반의 QD 디스플레이 로드맵도 가동되고 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 수석부회장과 만나 K-배터리 동맹의 일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최근에는 반도체 및 IM부문, 가전 사업 전반을 점검하며 강한 경영 드라이브를 걸었다.

문제는 사법 리스크다. 검찰은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과정 중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정황이 많고,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가능성을 정조준했다. 

검찰은 결국 이 부회장을 비롯해 최지성 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 실장, 김종중 전 미전실 전략팀장 등 3명에 대해 자본시장법 위반(부정거래 및 시세조종 행위)과 주식회사 등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적용하며 4일 구속영장을 요청했다.

2일 이재용 부회장 변호인측에서 기소 타당성을 검찰수사심의위원회에서 판단해달라며 수사심의위원회 소집을 요청했으나 사실상 묵살된 순간이다. 50여차례의 압수수색과 430여차례의 임직원 소환조사가 진행된 후다.

그러나 법원은 99일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법원은 “피의자들을 구속할 필요성에 대한 관해 소명이 부족하다”라면서 “피의자들의 책임은 이후에 있을 재판을 통한 공방을 거쳐 결정하는 게 타당하다”고 구속영장 기각의 근거를 설명했다. 검찰의 수사 예봉이 꺾이는 순간이다. 이어 수사심의위는 26일 검찰에 이 부회장에 대한 수사를 중지할 것과 함께 이 부회장에 대한 불구속 기소에 나서야 한다고 권고했다.

▲ 중국 시안 반도체 출장에 나선 이재용 부회장. 출처=삼성

기로에 서다
현 상황에서 검찰이 이 부회장을 다시 수사할 동력은 크게 사라졌다. 자본시장법 자체가 혐의를 입증하기 어려운 데다, 이 부회장이 받고 있는 승계 과정의 불법 혐의도 회계 전문가 사이에서는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수사심의위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있지만, 수사심의위 자체가 검찰의 기소 독점을 견제하기 위해 문재인 정부에서 처음 만들어진 정책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검찰이 다시 수사의 칼날을 들이밀기에는 어려움이 많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법조계 관계자는 "최근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이 충돌하는 등 검찰과 정부 여당의 분위기가 최악이며, 이런 가운데 공수처까지 출범되고 있다"면서 "검찰이 문 정부에서 처음 시작된 수사심의위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기에는 리스크가 크다"고 말했다.

삼성측 변호인단은 이날 위원회 결정이 나온 직후 “검찰 수사심의위원회 위원들의 결정을 존중한다”며 “삼성과 이재용 부회장에게 기업활동에 전념해 현재의 위기 상황을 극복할 기회를 주신데 대하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입장을 밝혔다. 현 상황에서는 이 부회장의 경영 전념 시나리오가 유력하다.

그럼에도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은 기로에 섰다는 평가가 어울린다.

우선 수사심의위의 판단으로 이 부회장의 사법 리스크는 크게 낮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검찰이 수사심의위의 권고를 따르지 않고 다시 수사를 시작할 경우 지루한 법적 공방은 재연될 가능성이 크다. 이 부회장과 삼성 입장에서는 생각하기 싫은 시나리오다.

검찰이 수사심의위의 권고를 받아들여 이 부회장에 대한 불구속 기소로 가닥을 잡아도 리스크는 여전하다.

지난해 8월 대법원의 파기환송으로 재개된 이 부회장의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은 현재 재판부 기피신청이 이어지며 시일이 지연되는 중이다. 이런 가운데 파기환송심 결과에 따라 이 부회장이 다시 법정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수사심의위에서 이 부회장 불구속 기소를 권고한 상태에서 검찰이 이를 받아들일 경우,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에도 이 부회장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 부회장과 삼성이 사법 리스크에서 자유로워진다면, 당장 공격적인 글로벌 경영이 재개될 전망이다. 미중 신경전 및 한일 경제전쟁이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코로나19'발' 경제위기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삼성 책임론이 부상하며 이 부회장의 결단으로 대형 인수합병 등 큰 그림을 그리는 전략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