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 출처= 현대자동차그룹

[이코노믹리뷰=최동훈 기자] #1. 1996년 12월 당시 정갑득 현대자동차노동조합 위원장은 부진한 내수 판매실적을 회복하기 위해 ‘고객불만 조사단’을 운영했다. 베테랑 조합원들로 구성된 고객불만 조사단은 영업·A/S 등 분야에서 발생한 고객 불만을 조사하고 개선책을 마련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정 위원장은 노조 이권을 확보하기 위해 강경한 파업을 불사하면서도 실리와 현장을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정 위원장은 당시 “조사단을 통해 고객불만 사항을 접수한 뒤 노사 대책회의에 상정해 노사 공동으로 품질을 개선하는데 노력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대차 사측은 노조 결단을 배척하지 않고 화답했다. 사측은 당시 “노조의 품질 개선 행보가 사측과의 협력 관계로 발전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2.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2000년 아반떼 세대 모델(XD)의 출시를 앞두고 생산·연구개발·마케팅 등 부문의 임직원들에게 ‘품질각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각서에는 ‘신차 품질상 문제가 발생할 경우 어떤 책임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정 회장이 각서 서명을 받아낸 계기는 해외 사업 위기였다. 현대차는 1986년 미국에 진출한지 12년 지난 1998년 역대 최저 수준인 9만여대를 기록했다. 문제는 차량의 낮은 품질이었다. 당시 현지 소비자들의 리콜 요청이 쇄도했다. 정 회장은 품질하자 때문에 기업 이미지가 고객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점에 촉각을 기울였다.

자동차 업계에 한파가 여전하지만, 현대차 노사의 '슬기로운 위기극복' 사례가 업계에서 회자되고 있다. 그 중심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취임 후 각종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품질을 키워드로 노조와 협력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2018년 9월 직책을 맡은 후 부친인 정몽구 회장에 이어 노사 협력 기조를 유지하는데 공들이고 있다. 실제로 업계에 따르면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중장기적 관점에서 노사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기업 성장을 도모하는데 이로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노사 양측간 알력 다툼 보다 화합하는 것이 업황을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길로 본다는 뜻이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노사 협력에 방점을 두고 경영을 이어온 배경엔, 앞서 미국 완성차 포드의 경영방식에 영감을 얻었던 점이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포드 노사는 사업 초창기 때부터 규정에 따라 임금 협상을 진행함으로써 빠른 합의를 이끌어 내고, 고용 안정을 약속함으로써 오랜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다. 사측은 노조와 협력하기 위한 구실로 회계 투명성을 실현하는데 주력했다. 포드가 지난 2008년 발발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미국 완성차 업체 가운데 유일하게 정부의 구제금융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에도 신뢰를 바탕으로 한 노사 협력이 유효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이 같은 경영철학을 실천하는 가운데, 현대차 노사가 과거 위기극복을 위한 협력 사례를 최근 재연해 눈길을 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나타난 현상이다.

현대차 노사는 지난 24일 현대차 서울 남부 서비스센터에서 만나 공동 선언문에 공동 서명했다. 선언문은 완벽품질, 최대생산, 지역경제 활성화 등 목표에 노사 함께 노력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의 사측 교섭진은 앞서 작년 9월 강경파 노조와 함께 2019년 임금 및 단체교섭 협상을 8년 만에 무분규 타결하는 성과도 거뒀다.

현대차 노사는 이 같은 협력 기조를 바탕으로 최근 미국에서 의미있는 성과를 거뒀다. 현대차·기아차 양사는 미국 시장조사업체 제이디파워(J.D.Power)가 발표한 신차품질조사(IQS) 결과 각각 1위, 10위를 차지했다. 해당 조사는 현지 소비자들이 제기한 차량 불만 의견을 100대 당 건수로 집계한 뒤 낮은 점수를 받은 브랜드부터 높은 순위를 매기는 식으로 진행됐다. 기아차는 앞서 2016~2017년 2년 연속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제네시스도 올해까지 4년 연속 현지 프리미엄 브랜드 1위를 기록했다.

현대차·기아차 양사가 브랜드 파워를 바탕으로 사실상 독과점하고 있는 시장인 한국이 아닌 자동차 선진국 미국에서 품질을 인증받은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분석된다. 정몽구 회장이 임직원들에게 신차 품질 각서에 서명하도록 했던 2000년 당시 현대차·기아차 양사가 J.D.Power로부터 각각 최하위 순위인 34위, 37위에 머문데서 ‘개과천선’한 셈이다.

미래도 고무적이다. 특히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앞으로도 부친 경영기조와 포드식 경영 등을 귀감 삼아, 노사협력을 바탕으로 기업 성장에 일조할 것이란 업계 관측이 제기된다.

정흥준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현대차 장점 가운데 하나는 각종 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품질개선 성과를 지속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라며 “현대차 노사가 품질을 향상시키는데 협력하는 것은 위기를 극복할 뿐 아니라 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는데 긍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지난 3월 현대차그룹 임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취임 1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노조에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노사 협력 관계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의 발로로 분석된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당시 이메일에서 “노사가 생산현장에서 위기극복을 위해 함께 노력해주는데 깊이 감사한다”며 “이번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서로 물리적 간격은 멀어지더라도,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심리적 간격은 오히려 가까워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