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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난세영웅전]③한국경제 구한 재계 영웅, 그 결단의 순간정주영 중동 도전기, 이건희 반도체 굴기… 글로벌 코리아 이끈 단초

[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질곡(桎梏·매우 고통스러운)’의 역사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돼 있다. 다행스럽게 수많은 국난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당대를 대표하는 ‘영웅’들이 등장했고 그들이 내린 결단은 국난극복의 원동력이 됐다. 재계의 역사도 다르지 않다. 수많은 위기를 겪었던 한국경제도 ‘재계 영웅’들의 활약 속에 쓰러져가던 국가경제를 회복할 수 있었다.

“해보기는 했어?”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고(故) 아산 정주영 회장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손꼽히는 입지전적 인물이다. 아주 약간의 과장을 보태면 정 회장이 내린 수많은 결단들은 “나라를 먹여 살렸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모두가 “안 된다”고 말하는 것들을 과감하게 밀어붙여 보란 듯이 일궈내는 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전매특허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도전을 두려워하는 임직원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임자(책임자), 해보기는 했어?”

▲ 1986년 중앙대학교에서 특별 강연을 한 현대그룹 故정주영 회장. 출처= 현대자동차그룹

정주영 회장의 결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2가지 일화가 있다. 1952년 2월 미군은 국내 주요 기업들에게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 일정에 UN묘지 참배가 있으니 묘지에 잔디를 심어 달라”고 요청했다. 우리나라의 2월 추위는 영하 10도 이하 혹한의 날씨가 계속돼 잔디가 자랄 수 없다. 그렇기에 미국의 요청을 받은 국내 수많은 업체들은 이를 거절했는데 정주영 회장은 이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정 회장은 잔디 대신 겨울에 싹을 틔우는 보리가 심겨있는 밭을 찾아가 그 땅을 전부 사버렸고, 트럭을 동원해 밭의 보리를 묘지로 옮겨 심었다. 옮겨 심어진 보리 싹들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방한 일정에 자라났고, 행사는 무사히 끝났다. 이 결단에 감격한 미군은 이후의 굵직한 공사들을 현대에 맡겼다.

▲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라는 명언을 남긴 현대그룹 故정주영 회장. 출처= 뉴시스

1970년대 오일쇼크의 여파로 찾아온 글로벌 경제위기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우리나라 역시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무렵 오일 머니로 많은 돈을 번 중동 국가들은 국내 기업들에 주요 시설의 공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국내 업체들은 연일 섭씨 40도가 넘는 날씨가 지속되는 중동지역의 더위 속에서 공사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를 전해들은 정주영 회장은 즉시 중동으로 달려가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고 건설 공사들을 맡기로 결정했다. 당시 정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한 기록에서도 그의 결단력은 잘 드러난다.

정 회장은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에서 “중동은 1년 내내 비가 내리지 않아 쉬는 날 없이 공사를 할 수 있어 기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라면서 “해가 져서 기온이 내려간 밤에 공사를 하고, 벽돌 제조에 필요한 모래는 주변에서 얼마든지 공급할 수 있고, 갈 때는 유조선에 식수를 싣고 가고 돌아올 때는 값비싼 석유를 가득 채워 온다면 이는 우리에게 절호의 기회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때 현대가 개척한 중동 건설시장에서 국내 건설사들이 벌어들인 ‘오일 머니’는 8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에 큰 밑거름이 됐다.

일류 도약의 시작 ‘삼성 신경영 선언’

지금의 삼성은 반도체, 스마트폰 등 기술 영역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가진 기업이지만 1990년대까지는 미국, 일본의 전자 기업들에게 늘 ‘2류’ 취급을 받았다. 삼성이 지금과 같은 1류 기업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이건희 회장의 과감한 결단이 있었다.

현재 삼성의 프랜차이즈 제품이라고 할 수 있는 ‘반도체’는 이건희 회장 부친이자 선대 회장인 이병철 회장을 비롯한 주요 경영진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진행시킨 사업이다. 1974년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주도로 파산 직전에 놓여있던 한국반도체를 인수한다. 이 결단으로 인해 이건희 회장은 온갖 비난을 받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후 반도체는 삼성을 글로벌 기업의 반열에 올려놓은 효자 산업이 된다.

삼성을 살린 이 회장의 결단은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한 번 더 빛을 발했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삼성은 미국과 일본의 전자기업들에게 늘 무시를 당하는 2류 기업으로 여겨졌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건희 회장은 디자인 부문의 일본인 고문 후쿠다 다미오(福田民郞)에게서 당시의 삼성을 냉정하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후쿠다 고문은 삼성이 1류 기업들에게 뒤쳐진 것이 무엇인지를 낱낱이 밝혀 이 회장에게 제출했다. 이 보고서가 바로 ‘후쿠다 보고서’다.

▲ 2013년 삼성 신경영 1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 출처= 뉴시스

보고서의 내용을 검토한 이건희 회장은 1류 기업들에게 한참 뒤쳐진 삼성의 현재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1993년 6월 이 회장은 “아내와 자녀 빼고, 모두 다 바꿔라”라는 그 유명한 지시와 함께 삼성의 ‘신경영’을 시작했다. 신경영은 단기간에 가시화되는 실적에 집중하는 그간의 관성에서 벗어나 장기적 관점에서 인간중심·기술중시·자율경영을 경영의 축으로 여기는 변화를 추구했다. 신경영 도입을 기점으로 삼성 스마트폰 사업의 전신인 무선통신 사업부의 급격한 성장이 시작됐다.

물론, 정주영 회장이나 이건희 회장이 이후에 보여준 행보에서는 그들의 수많은 흠결이 드러나기도 했다. 위나라를 세운 삼국지의 영웅들 중 한명인 조조도 자신의 오해로 지인(여백사)의 일가족을 잔인하게 몰살한 이력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정주영 회장의 정계 진출과 연관된 현대그룹의 정경유착, 아들인 이재용 부회장에게 삼성의 경영권을 넘기기 위한 이건희 회장의 온갖 무리수는 현재까지 그들의 오점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기업인의 소신으로 내린 결단은 국가적 경제위기 앞에 무기력하게 쓰러질 수 있었던 수많은 이들을 구해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박정훈 기자  |  pjh5701@econovill.com  |  승인 2020.06.29  08: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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