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미국과 유럽 사이에서 이상기류가 감돌고 있다. 미중 무역전쟁 당시 유럽은 화웨이 장비를 공격적으로 도입하는 한편 미국의 보호 무역주의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으나, 코로나19를 기점으로 다시 미국의 손을 잡은 바 있다. 그러나 최근 홍콩 국가보안법 정국을 통해 촉발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서서히 접점을 찾는 가운데 다시 미국과 유럽의 신경전이 시작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EU, 미국 관광객 차단
유럽연합(EU)이 역외 국가에서 오는 여행객에 대한 여행 제한 조치 해제에 돌입하며 미국을 역내 국가 입국 금지국으로 두는 안을 검토하고 있다. 실제로 뉴욕타임스는 23일(현지시간) EU 당국이 내달 1일 역외 국가 입국 허용을 준비하는 가운데 브라질, 러시아와 함께 미국을 제한 국가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하는 중이라 보도했다.

코로나19 사태 초기 미국은 일방적으로 유럽 여행객의 입국을 막아 논란이 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럽이 미국 여행객의 입국을 막는 카드를 꺼낸 셈이다.

EU는 코로나19 대응에 실패한 국가에 대해 입국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미국을 브라질과 러시아와 동일선상에 두고 '방역에 실패한 나라'로 규정한 셈이라 논란이 커지고 있다. 물론 EU가 미국 전국이 아닌, 일부 주 출신 여행객들의 입국을 제한하는 '핀셋 로드맵'을 적용할 가능성도 높지만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미국의 굴욕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실제로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이 러시아와 브라질과 같은 나라와 동일한 취급을 받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EU가 자국 여행객의 입국을 막을 경우 동일한 방식으로 보복에 나설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한편 EU가 역외 국가 입국 허용을 준비하며 미국을 배제하는 한편 중국에 대해서는 입국을 허용하는 방안에 무게를 두고 있는 점도 눈길을 끈다. 베트남 등 개발도상국도 입국이 허용될 가능성이 높아 미국의 불만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디지털세, 거칠어지는 공방
미국과 유럽의 불편한 관계는 디지털세 논란으로 더욱 증폭되고 있다.

프랑스는 지난해 7월 일정 규모의 글로벌 디지털 기업을 대상으로 매출의 3%를 세금으로 걷는 디지털세 법안을 통과시켰고 이탈리아는 당장 1월부터 디지털세를 전격 도입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지난 6월 프랑스의 디지털세와 관련한 조사에 착수하며 자국 실리콘밸리 기업들의 불이익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심지어 무역법 301조를 발동하며 프랑스 등을 대상으로 24억달러 상당 수입품에 100%의 관세 부과를 할 수 있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결국 미국과 유럽은 본격적으로 디지털세와 관련한 협상에 돌입했다. 올해 디지털세 부과를 위한 적절한 가이드 라인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첨예한 논란이 불꽃을 튀기는 가운데 협상은 최근 결렬됐다. 17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 등 외신에 따르면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은 12일 디지털세 부과를 조율하고 있는 프랑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 4개국 재무장관을 대상으로 서한을 발송해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명분은 코로나19라는 비상사태를 맞아 우선 방역 시스템 점검에 힘을 기울이자는 취지지만, 유럽의 디지털세 부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경한 프레임이다.

므느신 장관은 유럽이 디지털세 부과에 나설 경우 경제보복에 나설 것이라 경고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디지털세나 이와 유사한 단일 세금에 반대한다"면서 "미국은 적절한 대응 수단을 내놓을 것"이라 말했다.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도 하원에서 "미국은 유럽의 디지털세 부과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 강조했다.

유럽은 격앙된 반응이다. 프랑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4개 나라가 공동으로 미국의 협상 결렬에 맞서기로 했으며, 무조건 디지털세 부과에 나선다는 입장을 밝혔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재무장관은 18일(현지시간) 방송에 출연해 협상을 계속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전제로 "므느신 장관의 서한은 도발"이라며 거칠게 반발했다.

기술 패권전쟁, 제2의 트리거?
글로벌 경제를 휘청이게 만들었던 미중 무역분쟁의 경우 일종의 기술패권 경쟁으로 여겨진다. 미국 실리콘밸리가 주도하는 ICT 산업에 중국의 도전이 계속되자, 미국은 이를 좌시하지 않고 적극적인 제재에 나섰기 때문이다. 미국의 집요한 화웨이에 대한 제재가 이를 증명한다.

미국과 유럽 사이에서도 비슷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유럽은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들에 대한 디지털세 부과를 통해 그들의 과도한 현지 시장 장악력을 차단하려는 포석을 마련하려 움직이며, 미국은 이를 좌시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여기에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뒤섞여있다.

미국과 유럽은 2차 세계대전 후 글로벌 무대를 좌우하는 힘의 연대를 구축했으나, 유럽은 미국이라는 정부와 파트너가 되기를 원하지 미국 기업과 파트너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여기에 구글의 유럽 시장 점유율이 올라갈수록 ICT 원유로 불리는 유럽의 빅데이터가 미국 기업으로 흘러들어가는 것도 불안요소다.

프랑스가 비록 실패했지만 자체 포털 사이트를 만들고, 한국의 네이버 등 제3지대 ICT 기술력과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이유다. 그 연장선에서 디지털세는 유럽에 과도한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미국 '기업'의 예봉을 꺾으려는 전략이며,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시대를 맞아 자국 보호주의를 강화하는 한편 디지털세 부과에 따른 ICT 패권 경쟁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문제는 이 싸움이 통상전쟁으로 번질 경우다. 미국의 중국 기술굴기를 꺾으려는 시도가 무역전쟁을 일으킨 사례처럼, 미국이 유럽의 디지털세 부과를 이유로 무역전쟁을 일으킨다면 글로벌 경제는 또 한 번 격랑속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이미 미국이 독일에 주둔하던 미군을 철수시키는 등 발 밑의 갈등은 실체적 위협이 되고 있다. 전면전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