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박정훈 기자] 과거에는 중대사(대개는 좋지 않은 ‘사건’)가 아니면 대기업 총수나 최고 경영자 등 재계인들의 행보가 대중에게 공개되는 일이 많지 않았다. 그렇기에 재벌가 사람들은 마치 일반인들과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처럼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19 확산으로 국내 주요 기업들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위기에 직면했고 각 기업 임직원들은 큰 불안감에 휩싸였다. 기업 총수들도 이전과 다른 태도로 기업의 위기 극복을 위한 솔선수범의 행보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최근 재계 총수들은 주요 사업장을 직접 찾아가 임직원들을 격려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직접 나서는 모습을 보임으로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시키겠다는 의도다.

위기 앞에 적은 없다

코로나19 이후 가장 부지런한 행보를 보여주는 재계 총수는 단연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다. 물론 이 부회장은 자신을 둘러싼 여러 의혹들이 있어 그와 관련된 조사에 임하는 모습이 많이 비춰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들을 제외해도 이재용 부회장은 ‘코로나 정국’에서 국내 재계인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경영 일선과 현장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는 삼성이 ‘역사적 라이벌’인 현대와 연대를 시도한 것이다. 창업주 시대부터 삼성과 현대는 재계 1,2위를 다투던 전통의 라이벌이었다. 삼성과 현대는 전자 부문과 자동차 부문 등에서 서로를 견제하며 치열한 경쟁을 해왔다. 삼성과 현대 소속 스포츠단이 대결하는 경기는 ‘재계 라이벌전’이라고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은 창업주 이후 후대 경영인까지 이어져 오는 과정에서 상황이 달라졌고, 삼성과 현대는 껄끄러운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최근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수십 년간 쌓아 온 벽을 허물고 현대와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지난 5월 현대그룹의 핵심 기업인 현대자동차그룹의 정의선 수석부회장을 만나 친환경 전기자동차 배터리 개발에 대한 상호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게 대표적이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글로벌 기업인들 중 최초로 코로나19 후 중국 현지 사업장을 방문했다. 사진은 중국 시안 반도체공장을 방문해 현장을 점검하고 있는 이재용 부회장.(사진 가운데). 출처= 삼성전자

또 이재용 부회장은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해 삼성의 주력 제품인 반도체 공급처에 문제가 발생하자 직접 중국 반도체 사업장을 방문하기도 한다. 코로나19 방역 강화조치로 중국에 방문한 외국인은 무조건 하루에 한 번 검진을 받아야 하는데, 이 부회장은 이 같은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삼성전자 중국 시안 반도체공장을 방문해 현장을 살폈다.

이 부회장은 주요 사업들의 미래전략 마련에도 애를 쓰고 있다. 각 부문별 사장단 회의를 열어 현재의 위기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하는가 하면 자사의 주력사업인 반도체, 무선통신, 그리고 가전사업부문 사업장을 직접 찾아 임직원을 격려했다.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수석부회장 역시 선대 회장들과 구별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정 수석부회장은 자사의 주력사업을 ‘자동차’에서 더 광범위한 개념의 ‘모빌리티 솔루션’으로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재계의 경쟁 기업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배터리 개발에 대한 협력을 논의한 정의선 현대자동차 수석부회장(사진 왼쪽)과 구광모 LG그룹 회장. 출처= LG그룹

정 수석부회장은 5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과의 회동에 이어 지난 6월 22일에는 주요 경영진들과 함께 LG화학 오창공장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LG그룹 구광모 회장과 만나 LG화학이 개발하고 있는 미래 친환경 배터리 기술의 적용과 방향성을 공유했다. 또 두 그룹 총수들은 미래 배터리와 관련해 양 측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앞으로의 협력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명확한 방향성으로 비전 제시

올해로 취임 2년째를 맞은 LG 구광모 회장 역시 부지런한 발걸음으로 LG의 주요 계열사들이 마주한 대내외적 위기에 대응하고 있다. 특히 지난 5월 7일과 22일 LG화학 인도 공장과 충남 대산(서산) 공장에서 연달아 발생한 안전사고에 대해 구 회장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그는 대산공장의 사고가 있은 직후인 23일 헬기 편으로 사고 현장을 찾아가 사건을 수습했다. 여기에서 구 회장은 사고의 책임자들을 강하게 문책하고, 피해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안전사고의 예방 시스템 강화를 직접 지시했다.

또 그는 LG그룹의 첨단기술 연구단지인 마곡 사이언스파크의 연구원들을 만나 혁신 기술의 개발을 위한 과감한 도전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구 회장은 연구 책임자들에게 “모두가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지만 절대 도전이 위축돼서는 안된다”고 연구자들을 독려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도전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실패”라고 말하며 미래를 위한 연구진들의 새로운 도전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 2020 확대경영회의에 참석에 올 한해 SK 경영의 화두를 던진 SK그룹 최태원 회장. 출처= SK그룹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기업이 이윤과 함께 추구해야 할 사회적 가치들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전하며 각 계열사들의 지향점을 명확하게 밝혔다. 지난 6월 23일 경기 이천 SKMS연구소에서 열린 ‘SK 2020 확대경영회의’에 참석한 최 회장은 SK 전 계열사 CEO들에게 “우리가 키워가야 할 기업 가치는 재무성과나 배당정책 등 경제적 가치와 더불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사회적 가치, 일하는 문화의 혁신과 같은 자산을 모두 포괄하는 토털밸류(Total Value)”라며 “SK의 각 사 CEO들은 이 같은 기업가치를 추구함으로 시장과 투자자, 그리고 고객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성장 스토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여기에 최 회장은 코로나19로 인해 가장 큰 타격을 입은 SK의 에너지·화학 분야 전략에 대해 “전통적 에너지 산업으로는 기업 성장이 정체될 수 있다”며 지속 가능한 발전의 가치를 반영한 친환경을 비즈니스 모델로 삼아 혁신을 이뤄가는 방안에 대해 책임자들과 논의했다.

이와 같은 대기업 총수들의 공개적 솔선수범은 다른 면으로 각자의 대내적, 대외적인 입지 강화를 위해 철저하게 의도된 행보일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19 여파로 불안감에 휩싸인 임직원들을 격려하는 차원에서 그들이 부지런히 현장을 찾는 모습은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행보 그 자체만으로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