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ÉCRITURE(描法)N0.62-72, 73×60.5㎝ Pencil and Oil on Hemp clothe, 1972

연필은 그림을 그리는 못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에서는 바탕을 싹싹 긁어서 파헤치고 일일이 뭉개어 버리는 갈고리 같이 파괴의 도구에 다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박서보(朴栖甫)씨에게 있어서는 캔버스나 색소나 연필이나가 다 무엇을 나타내기 위해서 동원된 소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크게 개방하기 위해 서로가 호응하여 금욕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친구들이라고나 할까.

기실 박서보(朴栖甫)씨의 자기라는 이미지란 희박하기 그지없는 것일 뿐더러 그것마저 순화된 것일수록 아무것도 표현되지 않은 높고 드밝은 세계가, 어쩌면 황량하기까지 한 투명한 세계가 열리게 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끝없는 자유와 해방감을 맛보게 하는지도 모른다.

▲ ÉCRITURE(描法)N0.19-76, 130×162㎝ Pencil and Oil on canvas, 1976

세상에는 기어코 표현이니 예술이니 하며 얘기나 의미를 화면에 담으려 억지를 부리는 화가가 있는가 하면, 그 불가능성을 깨우쳐 되도록이면 그저 한 조각 무미한 행위의 혼적에서 바탕을 드러내고저, 캔버스를 닦고 긁으며 자기를 순화시키려 애쓰는 자도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세계 속에 용해시키며 세계를 살자는 자에게 있어서는 제작이란 결국 이렇듯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짓을 구태여 하는 것, 표현욕의 단념과 극기(克己)를 위해 수양을 쌓고 도를 닦는 일에 가까운 프로세스가 되지 않을 수 없나보다.

▲ ÉCRITURE(描法)N0.8-76, 130×195㎝ Pencil and Oil on canvas, 1976(TONG-IN GALLERY)

주문을 외우듯, 참선을 행하듯, 필경 박서보(朴栖甫)씨는 되도록 단조로운 행위의 반복을 통한 수련과정에서 스스로를 참고 억제시켜감으로써, 끝내는 거기에 환히 열리는 드맑고 크낙한 해방의 경지를 노닐고저 함일러라.

△글=1974년 東京에서 이우환(李禹煥)

△전시=1976년 10월5~11일, 박서보(朴栖甫,PARK SEO BO)-ÉCRITURE(描法,묘법) 통인화랑(TONG-IN GALLERY)개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