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선 현대자동차 수석 부회장(왼쪽)과 구광모 LG그룹 회장(오른쪽). 출처=LG그룹

[이코노믹리뷰=박민규 기자] "영원한 동반자도, 영원한 적도 없다" 

현대자동차·삼성·LG·SK 등 국내 4대 기업이 전기 자동차 및 배터리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뭉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발 경제 위기로 업계 대부분이 정체된 가운데, 전기차 관련 산업이 전도유망한 미래 먹거리로 부상하면서 국내를 대표하는 기업들의 합종연횡이 빨라지고 있다.

배터리 공급선 다변화를 꾀하는 현대차를 주축으로 모여든 '배터리 동맹'이 글로벌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그 향방에 이목이 쏠린다.

동맹의 중심에 선 현대車, '저울질' 나선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 부회장과 LG그룹 구광모 회장은 22일 오전 충북 청주 소재 LG화학 오창 공장을 방문, 미래 전기차용 배터리 부문의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LG그룹에 따르면 두 그룹의 경영진은 기존 배터리보다 수명이 5배 이상 긴 '장수명(long-life) 배터리'와 에너지 밀도가 2배 이상 높은 '리튬-황 배터리', 안전성을 향상한 '전고체 배터리' 등 미래 배터리의 기술 현황과 개발 방향성을 공유했다.

정의선 현대차 수석 부회장의 전기차 배터리 관련 회동은 지난달 충남 천안에 있는 삼성SDI 공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만난 데 이어 두 번째다. 또 정 수석 부회장은 조만간 최태원 SK그룹 회장과도 접촉할 것으로 알려져, 4대 기업의 '배터리 동맹'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정의선 수석 부회장의 광폭 행보에 시선이 집중된다. 완성차 업체인 현대차를 중심으로 쟁쟁한 메이저 4대 그룹의 다각관계가 가시화 되고 있는 가운데, 특히 삼성과 현대의 '이례적 조합'에 세간의 관심이 쏟아진 바 있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는 이미 현대차와 기아차에 각각 탑재된 바 있으나, 삼성SDI만큼은 이 과정에서 배제돼 왔기 때문이다. 또 정 현대차 수석 부회장과 이 삼성전자 부회장의 '공식적' 업무 협의는 이번이 처음으로, 재계 사상 기록될 만한 경영 행보이기도 하다.

세대는 바뀌었다, "국내 경쟁은 무의미"

국내 재계의 전통적 라이벌로 평가 받던 현대차와 삼성은 경영 3세들로 세대가 교체되면서 '필요할 때 합칠 줄 아는' 유연한 협력 관계로 변모하고 있다. 한때 불편한 사이였던 과거를 뒤로 하고 신산업 먹거리 앞에서 의기투합 하는 모습이다. 

양사의 악연은 지난 1995년 삼성의 자동차 사업 진출을 계기로 선대 총수들 간 마찰이 일어나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국내 자동차 시장을 주도하던 현대차는 갑작스러운 경쟁사 출현에 따른 위축은 물론, 연구 개발(R&D)과 마케팅 등 여러 부문에서의 인력 유출 또한 겪어야 했다. 이후 양사는 2010년대까지 자동차 사업에 관한 한 신경전을 벌여 왔다.

현대차가 배터리 업체 라인업에서 삼성SDI만 번번히 제외한 배경으로 이 같은 과거가 한 몫 했으리라는 분석이 나오나, 여기에는 기술적인 이유 또한 존재한다. 삼성전자는 각·원통 형태의 전지를 주력 생산하는데, 파우치형 배터리를 쓰는 현대차로서는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 등의 배터리를 공급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전언이다.

하지만 최근 현대차-삼성 배터리 회동 등이 성사되면서, 3세 경영인들의 실리 추구적 행보가 기업 간 협력 구도를 활성화 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한편 일각에서는 현대차가 이미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를 납품 받는 상황에서 삼성SDI의 물량을 당장 추가 반영하기 쉽지 않으리라는 의견도 나왔다. 그러나 현대차와 삼성 두 기업의 총수들이 차세대 배터리로 주목 받는 '전고체 배터리'의 개발을 두고 이야기를 나눴다는 점에서, 장기적 관계를 도모하고 있다는 추측에 힘이 실린다.

전고체 배터리는 현대차가 '게임체인저'가 될 기술로 염두해 가장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부분 중 하나로, 이는 현대차가 삼성을 접촉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앞서 삼성 종합기술원은 전고체 배터리 원천기술 개발로 주목 받은 바 있다. 이른바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해당 전지는 1회 충전으로 800km 주행까지 가능한 등, 현재 전기차용 배터리로 주로 쓰이는 리튬 이온 배터리보다 성능·수명·안전성 등 대부분의 면에서 월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정 수석 부회장이 LG화학 서산공장을 찾아 여전한 배터리 동맹의 견고함을 과시하며 판은 더욱 커지고 있다. 현대차와 LG화학은 동남아시아 지역에 배터리 합작회사를 설립해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할 전망이며, 현대차의 전기차 로드맵을 두고 힘있는 행보를 보일 전망이다.

삼성과 현대차의 사례를 포함해, 이들 국내 전기차 및 배터리 관련 업체들의 협력은 전략적 이합집산의 결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전기차의 경우 기존 자동차에 비해 단순화 된 구조로, 따로 특화된 제조 기술이 요구되기보다 배터리 그 자체가 핵심 요소로 기능한다. 이는 즉, 전기차 시장의 패권을 배터리 업체들이 쥘 수도 있다는 뜻이다. 현재는 각각 전기차·배터리 분야에서 윈윈효과를 얻기 위해 손잡은 관계가 향후 시장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경쟁 관계로 돌아설 공산이 크다.

전기차-배터리 합종연횡, 불가피한 생존 전략

완성차 업체와 배터리 제조사의 '합종연횡' 전략은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추세라는 게 시장의 중론이다. 전기차 관련 산업이 미래 유망 업종으로 떠오르면서 시장 참가자 규모 역시 급속히 팽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 조사 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2017년 330억 달러 수준이었던 세계 리튬 이온 배터리 시장은 매년 25%씩 급성장 하면서 2025년에는 1600억 달러 규모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전기차 시장의 성장세는 앞으로 더욱 가팔라질 전망이다. 최근 유럽의 환경 규제 강화와 주요 국가들의 전기차 보조금 정책이 전기차 수요에 부채질 하면서 이르면 내년부터 배터리 물량이 부족해지는, '배터리 대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영국 완성차 업체 재규어의 경우, 지난 2월 LG화학으로부터 배터리를 충분히 공급 받지 못해 전기차 생산을 일시 중단하기도 했다.

전기차 업체들의 배터리 확보 작전은 국경을 막론하고 이미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양상이다.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은 주로 배터리 제조사들과 합작법인을 설립하거나, 이들의 지분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안정적 공급망 형성에 주력하고 있다. 

독일 폴크스바겐은 스웨덴 배터리 업체 노스볼트와 배터리 대량 생산 목적의 합작사를 세우고, 중국 배터리 제조사 궈쉬안하이테크의 지분을 26.5% 매입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도 LG화학과의 합작사를 통해 연 30기가와트(GWh) 가량의 배터리 셀을 양산할 계획이다. 

글로벌 배터리 시장 규모의 확대와 더불어 한국 전기차 관련 업체들도 동반 성장하고 있다.

먼저 국내 배터리 업체들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비약적 증가세로 두드러진다. 지난 16일 에너지 시장 조사 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판매된 전기차(EV)·플러그인 하이브리드카(PHEV)·하이브리드카(HEV) 등의 배터리 사용량 및 시장 점유율 순위에서 LG화학이 1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삼성SDI와 SK이노베이션까지 국내 배터리 3사 모두가 10위권 안에 들었다. 이들의 점유율 합계는 전체 시장의 3분의 1이 넘는 35.3%에 달하면서, 작년 기록한 16.2%의 2배를 뛰어넘었다.

완성차 업체인 현대차그룹의 입지도 만만치 않다. 전기차 전문 매체 EV세일즈에 따르면, 현대·기아 자동차는 2020년 1분기 순수 전기차만 총 2만4116대를 판매하면서 8만8400대의 테슬라와 3만9355대의 르노-닛산 얼라이언스, 3만3846대의 폴크스바겐에 이어 세계 4위를 차지했다. 

현대차는 2025년까지 전기차 판매량 56만대를 달성해 수소 전기차 포함 세계 3위권 내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기아차는 세계 전기차 점유율을 지난해 2.1%에서 2025년 6.6%까지 끌어 올린다는 계획이다. 

LG화학 역시 지난 30년 동안 선제적 R&D 투자를 통해 1만7000건 이상의 전기차 배터리 특허를 획득한 등 공격적으로 기술력을 제고하고 있다. 이를 기점으로 현대차와 LG화학은 최근 전기차 및 배터리 분야의 유망 스타트업 발굴에도 함께 나서는 등 업계 입지 선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정 수석 부회장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광모 LG그룹 대표를 연이어 만난 후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만날 예정인 점도 눈길을 끈다. SK이노베이션과 현대차의 시너지도 만만치 않은 저력을 보여줄 것이라 예상되는 가운데, K-배터리 동맹의 로드맵이 더욱 탄탄해지는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