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이 구광모 LG그룹 대표와 만났다. 만남의 최초 접점은 배터리 기술 고도화에 방점이 찍혔으나, 이후에는 모빌리티라는 큰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 중심에 정 수석부회장이 동맹을 조율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 정의선 수석부회장과 구광모 대표가 만나고 있다. 사진=LG

정의선, 움직이다
정의선 현대차 수석부회장이 LG화학을 방문하기 전, 정 수석부회장과 현대차 임원들은 지난 4월 13일 충남 천안 성성동에 위치한 삼성SDI 공장을 방문한 바 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정 수석부회장이 배터리 신기술에 호기심을 가진 상태에서 확인하려는 차원의 방문을 한 것"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으나 재계에서는 둘의 만남이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새로운 협력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의미가 있다고 봤다.

무엇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현장에 나타나 업계의 관심은 더욱 커졌다. 실제로 이 부회장은 본인의 승계 과정에서 벌어진 잡음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한 직후 본격적인 현장경영에 시동을 건 상태다. 그 연장선에서 정 수석부회장이 삼성SDI 공장을 방문해 이재용 부회장을 만나자 업계에서는 재계 1, 2위 기업의 배터리 시장 시너지 창출 여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당시 두 사람의 만남은 삼성전자 전고체 전기 기술이 매개였다. 삼성전자 종합기술원은 지난 3월 1회 충전에 800km 주행, 1000회 이상 배터리 재충전이 가능한 전고체전지 연구결과를 공개한 바 있다. 전고체전지는 배터리의 양극과 음극 사이에 있는 전해질을 액체에서 고체로 대체하는 것으로, 현재 사용중인 리튬-이온전지와 비교해 대용량 배터리 구현이 가능하고, 안전성을 높인 것이 특징이다.

덴드라이트 문제를 해결한 것이 핵심이다. 삼성전자는 덴드라이트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전고체전지 음극에 5마이크로미터(100만분의 1미터) 두께의 은-탄소 나노입자 복합층을 적용한 '석출형 리튬음극 기술'을 세계 최초로 적용했으며 이 기술은 전고체전지의 안전성과 수명을 증가시키는 것은 물론 기존보다 배터리 음극 두께를 얇게 만들어 에너지밀도를 높일 수 있다. 당연히 리튬-이온전지 대비 크기를 절반 수준으로 줄일 수 있다는 강점을 보여준다.

다만 삼성전자의 전고체 전지 기술은 당장 상용화되기 어려운 기술이다. 정 수석부회장이 직접 삼성SDI를 찾아도, 해당 기술을 현대차에 탑재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런 이유로 업계 일각에서는 두 사람의 만남을 두고 '미래의 협력'을 염두에 둔 포석으로 분석했다. 

현대차그룹은 전통적으로 배터리 분야에서 LG화학과 합작사를 추진할 정도로 강한 연대를 자랑하고 있으나, 이번 회동을 통해 현대차그룹이 "누구에게라도 문이 열려있다"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두 사람의 만남은 최근 정부의 한국판 뉴딜에 대한 재계 총수들의 적극적인 화답이라는 상징성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3년차를 맞아 한국판 뉴딜을 선언하며 미래차를 신성장 동력으로 지정한 가운데, 재계 1위와 2위 수장이 모여 미래차 비전에 대한 논의를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 삼성전자 전고체 전지 기술. 출처=삼성

빨라지는 K-배터리 동맹
이재용 부회장과 정의선 수석부회장의 회동 당시, 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이 전기차 로드맵을 가동하며 전통의 우군인 LG화학과 일정정도 거리를 두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LG화학이 글로벌 1위 배터리 시장 강자로 군림하는 상황에서 현대차그룹이 당장 파트너를 교체할 이유는 없지만 부품 수급의 큰 관점에서 현대차그룹이 다양한 선택지를 조율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LG화학 입장에서는 불길한 시그널이다.

에너지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4월까지 판매된 전기차(EV)·플러그인 하이브리드카(PHEV)·하이브리드카(HEV) 등의 배터리 사용량 순위에서 LG화학은 당당하게 글로벌 시장 점유율 1위에 올랐다. 중국공장을 기점으로 하는 테슬라와의 동맹이 주효했다는 평가다. 

최근 분위기는 미묘하다. 최근 테슬라와 파나소닉은 미국 네바다주에 있는 전기차용 배터리 공장 '기가팩토리1'에 투입할 리튬 이온 배터리 셀의 제조 및 공급을 위한 3년 계약을 체결하며 여전한 동맹의 건재를 과시했기 때문이다.

▲ 출처=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

마냥 테슬라를 믿고만 있을 수 없는 가운데, LG화학은 현대차그룹과의 전통적인 연대도 지켜야 하는 숙제를 받아들었다. 이런 가운데 최근까지 합작사 설립과 관련된 뚜렷한 논의도 나오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재용 부회장과 정의선 수석부회장의 회동을 바탕으로 현대차그룹이 배터리 수급에 있어 유연한 모습을 시사하는 장면이 연출되자 일각에서는 LG화학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걱정은 정 수석부회장이 LG화학 서산공장을 찾아 구광모 대표를 비롯해 LG 경영진들을 만나며, 말 그대로 기우가 됐다.

현대차그룹 경영진은 LG화학 서산공장을 방문해 장수명(Long-Life) 배터리와 리튬-황 배터리, 전고체 배터리 등 미래 배터리의 기술과 개발 방향성을 공유했으며 두 총수 모두 미래 배터리 관심사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 및 기아차가 생산하고 있는 하이브리드카와 현대차의 코나 일렉트릭, 아이오닉 일렉트릭 등에 LG화학 배터리가 들어가는 가운데 2022년 현대차가 양산할 예정인 전기차 전용 플랫폼 'E-GMP(Electric-Global Modular Platform)'의 2차 배터리 공급사로 LG화학을 선정된 점도 중요하다. ‘E-GMP’ 기반의 현대·기아차 전기차에 탑재될 LG화학 제품은 성능이 대폭 향상된 차세대 고성능 리튬-이온 배터리로, 전기차 전용 모델의 특장점들과 시너지를 창출해 고객에게 더 큰 가치를 제공할 전망이다.

현대차그룹과 LG화학의 배터리 합작회사도 최근 국내가 아닌 인도네시아 지역에 설립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두 기업의 동맹은 여전히 탄탄한 셈이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은 조만간 SK이노베이션을 보유한 SK그룹의 최태원 회장도 만날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삼성과 현대차, LG 및 SK로 이어지는 국내 4대 그룹이 힘을 합쳐 K-배터리 동맹을 완성하게 된다.

시기적으로도 적절한 타이밍이다. 현재 국내 배터리 3사가 글로벌 시장에서 공격적인 전략을 바탕으로 엄청난 존재감을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글로벌 1위 LG화학은 현재 약 150조원의 전기차 배터리 수주 잔고를 바탕으로 2024년 배터리 분야에서만 30조원 이상의 매출을 달성할 계획이다. LG화학 CFO 차동석 부사장은 그린론 체결식 현장에서 “글로벌 배터리 시장 석권은 물론 국가 산업 경쟁력 강화에도 기여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SK이노베이션은 미국 조지아 주에 건설중인 1공장을 포함에 추가 2공장 건설까지 총 3조원을 투입하기로 결정하며 최태원 회장에서부터 시작된 강력한 동력을 자랑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중국 정부가 SK이노베이션 배터리를 탑재한 아크폭스의 전기차, 알파T를 보조금 지급 대상에 올린 것으로 알려지는 등 고무적인 분위기가 속속 감지된다. 삼성 SDI도 포트폴리오 다변화 등을 통해 글로벌 배터리 시장에서 의미있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K-배터리 3사의 기세가 상당한 만큼, 현대차그룹이 K-배터리 동맹을 위한 무대는 이미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 현재차의 NE 전기차. 출처=현대차

왜 배터리인가? 왜 전기차인가?
K-배터리 동맹의 핵심에는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있다. 그리고 현대차그룹은 정 수석부회장이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 K-배터리 동맹을 포함한 전체 전기차 로드맵의 퍼즐을 맞추고 있다.

최근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할 때, 국산 배터리 확보부터 전체 전기차 시장 장악력을 키우려는 의도가 보인다. 이미 액션플랜은 가동중이다.

실제로 현대·기아차는 2011년 첫 순수 전기차를 선보인 이래 현재까지 국내외 누적 27만여대 판매를 기록하는 등 글로벌 전기차 시장에서 핵심 플레이어로 위상을 강화하고 있다. 2025년까지 총 44종의 친환경차를 선보일 예정이며, 이 중 절반이 넘는 23종을 순수 전기차로 출시할 계획이다. 

2025년 전기차 56만대를 판매해 수소전기차 포함 세계 3위권 업체로 올라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기아차는 글로벌 전기차 점유율을 지난해 2.1%에서 2025년 6.6%까지 끌어 올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큰 그림 아래에서 전기차의 핵심 전력인 배터리 수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한편 전기차에 이르는 모빌리티 그림을 완성한다는 각오다.

현대차그룹의 모빌리티 전략에도 시선이 집중된다.

현대차그룹은 내연기관 중심의 자동차 시대 종말을 예고하고, 수소차와 항공 및 전기차 등 세 개의 미래 모빌리티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수소차의 경우 수소경제의 확산을 중심으로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으며 항공에 있어서는 글로벌 모빌리티 플랫폼 우버와도 협력한다.

우버와의 협력은 지난 CES 2020에서 청사진이 나온 바 있다. ▲UAM(Urban Air Mobility : 도심 항공 모빌리티) ▲PBV(Purpose Built Vehicle : 목적 기반 모빌리티) ▲Hub(모빌리티 환승 거점) 플랫폼을 중심에 두고 미래 모빌리티의 큰 그림을 짜는 형식이다. 

UAM은 하늘을 정조준한 모빌리티 전략이며 PBV는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수용 가능한 개인화 설계 기반 도심형 친환경 모빌리티로 정의된다. 또 Hub는 하늘의 UAM과 지상의 PBV를 연결하는 구심점이자 새로운 커뮤니티다. UAM과 PBV가 각각 하늘과 땅을 의미한다면, Hub는 이를 연결하는 플랫폼이 되는 셈이다.

핵심은 UAM의 SA-1이다. S-A1은 최고 비행 속력은 290km/h에 달하고, 최대 약 100km를 비행할 수 있다. 또 100% 전기 추진 방식으로, 이착륙 장소에서 승객이 타고 내리는 5~7분여 동안 재비행을 위한 고속 배터리 충전이 가능하다. 여기에 각각의 프로펠러에 전기 분산 제어가 가능하도록 설계돼 최적의 안전 성능을 제공하며, 도심 비행에 적합하도록 소음도 최소화 했다는 설명이다.

정 부회장은 당시 “우리는 도시와 인류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깊이 생각했다"며 "UAM과 PBV, Hub의 긴밀한 연결을 통해 끊김 없는 이동의 자유를 제공하는 현대자동차의 새로운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은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고 '인류를 위한 진보'를 이어 나가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기에 전기차 비전이 덧대어지며 미래 모빌리티 전략이 완성되는 셈이다. 결국 정 부회장의 현대차그룹은 K-배터리 동맹을 바탕으로 전기차 로드맵에 시동을 거는 한편 수소차와 도심항공 플랫폼을 통해 '이동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야심을 숨기지 않고 있다. 당연히 K-배터리 동맹은 단기적으로는 전기차 로드맵에 순기능을 발휘하고, 장기적으로는 현대차그룹 세 개의 미래 모빌리티 플랫폼에 스며들 것으로 보인다.

▲ S-A1. 사진=최진홍 기자

일말의 우려
현대차그룹은 K-배터리 동맹을 통해 미래 모빌리티에 이르는 세밀한 전략을 그려나가고 있다. 당장 배터리를 내재화해 생산하는 것보다 외부와의 협력을 통해 가능성을 타진하고, 그 연결고리에 LG화학을 위치시키면서도 삼성 및 SK와의 연대도 고려하는 영악한 전략이다.

다만 현대차의 미래 모빌리티 전략이 원만하게 가동되려면 정무적 판단도 필요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특히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영업비밀 침해 소송전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 부담이다. 지난 4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예비판결을 통해 LG화학이 승리했으나 SK이노베이션이 이에 불복해 현재 판결 재검토 기간을 거치는 중이다.

당장의 K-배터리 동맹을 완성하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이다. 다만 각 그룹 총수들이 만나 톱다운 방식의 협의에 들어가면,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앙금도 빠르게 걷힐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국내 배터리 3사가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다"면서 "여세를 몰아 K-배터리 동맹이 구축되어 현대차가 전기차 중심의 미래 모빌리티 패권을 잡는다면, 국내 제조업 전반의 호재가 될 것"이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