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일본의 여류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저서 ‘물의도시 베네치아’를 통해 중세 유럽 지중해 무역을 좌우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종말을 두고 ‘자연스러운 안락사’라 표현한 바 있다. 대항해 시대의 개막으로 태평양 항로가 개척된 것도, 프랑스 나폴레옹의 베네치아 함락도 역사의 극적인 순간일 뿐, 베네치아는 이미 시대의 소명을 다했기에 소멸했다는 뜻이다.

다만 변변한 자원도 없던 베네치아가 중개무역을 통해 지중해의 여왕으로 불리다 그 힘을 다한 결정적인 이유는 있다. 바로 대국병립의 시대를 읽지 못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베네치아의 쇠락은 프랑스에서 절대왕정이 탄생하고 동쪽의 강력한 일인제국 투르크가 웅비하며 시작됐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중론이다. 이윤을 남길 수 있는 이성적인 대화보다는 각자의 이데올로기와 국가적 오만으로 단숨에 베네치아 전체 인구를 넘기는 병력을 지도자의 손가락 하나로 움직이는 대국 병립의 시대. 상인들의 나라인 베네치아는 본인들이 이성적이기에 상대방도 이성적일 것이라 착각하며 반이성의 대국에 압도당하는 패착을 저질렀다.

미중 신냉전 시대를 맞이하는 수출중심 경제모델의 대한민국이 뼈아프게 참고해야 할 대목이다.

▲ 코로나19 사태로 다섯 차례나 연기됐던 등교 개학이 시작된 지난 5월 20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용산고등학교에 3학년 학생들이 등교하고 있다. 사진=이코노믹리뷰 박재성 기자

최악의 경제상황

코로나19를 맞아 최악의 위기가 닥쳤다. 세계은행은 지난 9일 올해 경제 성장률을 -5.2%라 전망하며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이라 표현했으며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0.2%로 하향 조정했다. 국내 실업률도 폭등하고 있다. 8일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고용행정 통계로 본 5월 노동시장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구직급여 지금급액은 1조162억원 규모로, 지난해 5월 7587억원 보다 무려 33.9% 늘었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대내외 수요 위축으로 4월 전(全)산업생산이 전월보다 2.5% 감소했으며 당분간 비슷한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봤다. 5월 수출은 전월(-25.1%)과 유사한 –23.7%를 기록했고 특히 제조업생산은 전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주요 수출품목이 부진한 흐름을 나타내면서 큰 폭으로 위축됐다.

전국경제인연합(전경련)이 2019년 기준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이 5월 중순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신고한 2020년 1분기 연결기준 매출 공시자료를 분석한 결과 국내 매출규모 상위 100대 기업의 올해 1분기 해외매출은 2019년 4분기 대비 약 10.4%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외생산 비중이 약 70%에 육박하는 자동차는 14.3%, 휴대폰 및 TV 해외생산비중이 90%를 상회하는 전기 및 전자는 9.0% 감소한 것으로 확인되어 논란이 커지고 있다.

미중 신경전에 따라 글로벌 경제도 요동치는 가운데 한일 경제전쟁도 실질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당장 한국은 일본의 수출규제를 세계무역기구인 WTO로 끌고 가기로 결정했다. 나승식 산업통상자원부 무역투자실장은 2일 브리핑을 통해 “지난해 11월 22일 잠정 정지했던 일본의 3개 품목 수출제한조치에 대한 WTO 분쟁해결절차를 재개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관련 절차를 밟았으나 한일 핫라인이 가동되며 중단된 WTO 분쟁해결 패널설치를 재개한다는 뜻이다. 일본이 수출규제와 관련해 해결 의지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역사 문제를 두고 한국의 전범기업 자산 처리를 두고 신경전이 커지는 가운데, 당분간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다행히 소재 부분에서는 탈일본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 포토레지스트는 지난해 7월 기준 일본 의존도가 81%에 이르렀으나 현재 일본의 수출 완화 및 미국 듀폰의 국내 생산시설 투자, 나아가 유럽 등 공급선 다변화로 위기를 넘겼다는 평가며 불화수소의 경우도 같은 기간 일본 의존도가 43%를 넘겼으나 LG디스플레이가 소재 국산화 100%에 성공하고 삼성디스플레이도 국산품 전면 대체에 나서며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그러나 소위 ‘소부장’ 전반에 대한 탈일본은 요원하다는 평가다.

▲ 출처=이코노믹리뷰DB

설상가상으로 저유가 기조까지 이어지며 ‘역 오일쇼크’ 공포도 커지고 있다. 비록 OPEC+가 최근 일 970만배럴 감산 정책을 7월까지 연장하기로 결정하며 국제유가가 소폭 상승해 한시름 놓는 분위기지만,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한다는 평가다.

내부에서 준비해야 할 것

코로나19, 한일 경제전쟁, 미중 신경전의 삼각파도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국내 경제를 타격하고 있다.

국내 산업계에 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가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기업 223개를 대상으로 현 상황에 대한 인식을 설문조사한 ‘코로나19 사태 관련 기업 인식 및 현황 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업들의 충격 체감도(평균치)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100으로 볼 때 IMF 외환위기는 104.6, 지금의 미중 갈등 및 코로나19 사태는 134.4로 집계됐다.

위기감이 커지는 가운데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특히 정부의 공격적인 기업환경 조성이라는 지원사격이 절실하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의 발목을 잡기 보다는 기업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하며 다양한 경우의 수를 열어둬야 하기 때문이다.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이 지난 5월 19일 제 21대 국회 개원을 앞두고 있는 여야의 원내 지도부를 만나 당부한 내용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박 회장은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와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를 차례로 만나 “대단히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라면서 “더 이상의 혼란을 막기 위해 정치권이 경제 현안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법과 제도, 운영 시스템을 개선하는 작업을 21대 국회에서 조속하게 처리해주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의견교류에 대한 필요성도 강조했다. 박 회장은 “경제계는 정치권과 많은 부분에서 의견을 교환해야 할 것”이라면서 “코로나19 이후 떠오르고 있는 빅데이터, 언택트, 제약바이오 등 미래 산업 그리고 글로벌 공급망의 급격한 변화에도 긴밀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적극적 지원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중요한 포인트다. 현재 글로벌 경제는 미중 분쟁에서 알 수 있듯이 이른바 국가 대항전으로 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이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정치권력까지 동원하는 가운데, 그 어느 때보다 정부의 인상적인 행보가 필요하다는 점에 이견의 여지가 없다.

기업들의 파격적인 행보도 필요하다. 당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5월 대국민 사과 후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과 함께 전고체 배터리 가능성을 타진했고 진교영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 사장, 박학규 DS부문 경영지원실장 사장, 황득규 중국삼성 사장 등과 함께 중국 산시성에 위치한 시안반도체 사업장을 찾았다. 직후 증설 인력 300명을 추가로 파견하며 현지 생산 거점 강화에 나서는 한편 평택 EUV 라인 구축을 발표했다. 또 낸드플래시 거점 강화 로드맵도 공개하며 경영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었다.

올해로 취임 2주년을 맞이한 LG 구광모 회장도 충남 서산시 LG화학 공장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즉각 현장을 찾았고 5월 29일 LG 연구개발의 핵심인 마곡 LG사이언스파크를 방문하기도 했다. 구 회장은 “비록 모두가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래를 위한 도전이 위축돼서는 안 된다”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도전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는 곧 ‘실패’와 같다”라고 연구 책임자들을 독려했다.

문제는 이상과 현실 사이다. 최악의 경제위기가 닥쳐오는 가운데 경제인들의 광폭행보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지만, 최근의 상황은 녹록지 않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일감 몰아주기 논란을 정조준하며 주요 그룹들을 조이고 있고, 검찰은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 과정을 문제 삼아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도 했다. 이는 법원에서 기각됐다. 삼성은 “법원의 기각사유는 ‘기본적 사실관계 외에 피의자들의 책임 유무 등 범죄혐의가 소명되지 않았고, 구속 필요성도 없다’는 취지”라면서 “향후 검찰 수사 심의 절차에서 엄정한 심의를 거쳐 수사 계속과 기소 여부가 결정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삼성은 이 부회장의 승계에 대한 의혹을 두고 “삼성은 장기간에 걸친 검찰수사로 인해 경영은 위축돼 있고, 그런 가운데 코로나19 사태와 미중 간 무역 분쟁으로 인해 대외적 불확실성까지 심화되고 있다”라면서 “현재의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삼성의 임직원들은 최선을 다할 것이고 아울러 한국경제가 마주한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도 최대한 힘을 보탤 것”이라 말했다. 삼성의 답답한 심정을 일정정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외부에서 해야할 것

내부에서 기업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면, 외부에서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필요하다.

현재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사실상 세계는 반으로 갈라졌다. 이들은 이성적인 정책이 아닌 정치적 의도로 경제논리를 재단하고 있으며, 어느 쪽을 선택하든 문제는 불거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핑계에 숨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선택을 해야 하며, 행동에 돌입해야 한다.

이미 진영 가르기 전쟁은 노골적으로 시작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G7 회의를 확대 개편하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국에 참여를 요청했다. 동맹인 미국의 요청이자 최근 북핵문제 등 정책적 공조에서 미국의 역할이 필요한 정부는 이를 전격적으로 받아들였다.

문제는 한국의 G7, 혹은 G11 참여에 따른 후폭풍이다. 미국은 현재 중국과 신경전을 벌이는 한편 확대된 G11을 통해 중국을 사방에서 포위하려는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G11에 한국은 물론 호주와 인도, 러시아 등 4개국을 초청하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이는 중국의 외교적 고립을 위한 전략적 카드로 여겨진다.

미국은 지난 무역전쟁 당시에도 비슷한 전략을 택한 바 있다. 미 국방부는 지난해 인도·태평양 전략 보고서를 통해 대만을 국가로 분류하는 한편 가포르와 뉴질랜드, 몽고를 우방국가로 표기해 눈길을 끌었다. 이들 4개 나라가 자유와 개방의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적시하는 한편 중국 주변국을 포섭해 일종의 압박전술을 가동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왔다. 물론 미국은 중국의 반발이 커지자 대만을 국가로 분류한 지점을 수정하는 등 ‘톤 다운’했으나, 미국의 기본적인 대중국 전략 중 하나가 지리적 포위전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이 자국이 아시아 유일 G7 참여국이라는 의미가 퇴색된다는 점에서 우려하는 가운데, 외교가에서는 한국의 G11 참여를 바탕으로 대중관계의 변화에 집중하고 있다. 미중 관계가 험악하게 돌아가는 가운데 한국이 자칫 미국과의 정책적 공조를 바탕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모양새가 연출되면, 중국과 경제적으로 밀접하게 관련을 맺은 한국도 타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중국에서는 노골적인 견제구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SCMP는 지난 5일 ‘한·중 관계, 한국의 G7 초청 수락 후 도전 직면(China - South Korea ties face a testing time after Seoul accepts Donald Trump’s G7 invitation)’이라는 사설을 통해 상하이 푸단대학 국제문제연구소 치화이가오 부소장의 멘트를 인용하며 “한국이 가장 불편한 입장에 처했다”고 분석했다. 나아가 한국과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전선에서 힘을 합친다면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가 재연될 것이라는 경고까지 나오고 있다.

자오리젠(趙立堅) 외교부 대변인이 지난 2일 “중국을 겨냥한 포위망은 관련국의 이익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우회적으로 한국의 G11 참여에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 가운데 나온 메시지라 특히 눈길을 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월 18일 중국 시안반도체 현장으로 출장을 떠났을 당시에도 비슷한 기류가 감지됐다. 당시 중국 언론은 삼성전자와 중국의 반도체 협력에 주목하면서도 은근히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업계 일각에서는 미국의 압박으로 인해 반도체 수급에 어려움을 겪는 화웨이가 삼성전자 등에 칩 공급을 요청한 상황을 언급하며 “중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마냥 미국에 쏠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고 말한다.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방한과 가을에 열리는 G11을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정중동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줄타기를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일본처럼 무리하게 초반부터 미국의 편에서 화웨이 장비 불가를 선언하지 말고,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대북정책까지 아우르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뜻이다. 당장 다원주의에 입각해 전체를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최소한의 균형을 바탕으로 최대한의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논리다.

원론적인 논리지만 유일한 길이다. 미국의 의도를 간파하고 G11을 통해 선진국들이 만드는 게임의 룰에 일정정도 참여한 후 발언권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으로 G8에서 탈퇴된 러시아의 복귀에 대한 기존 국가들의 반감, 한일 경제전쟁으로 한일감정이 악화된 상태에서 한국의 G11 참여에 부정적인 일본의 상황을 주시하면서 홍콩 국가보안법 사태에 대한 대처를 종합하는 전략이 제기된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민간기업과 중국의 연결고리를 강화하는 것도 핵심이다.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가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만나는 등 한중 경제 활성화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평가다.

여기에 각 국의 리쇼어링(reshoring)으로 세계의 공장 중국이 위축되고, 이에 양회를 바탕으로 ‘자력갱생’을 선언한 중국과의 경제적 보폭을 맞추는 일도 필요하다는 평가다. G11 참여 결정을 통해 외교적으로 한 쪽에 기울어졌다면, 경제적 관점에서는 미국과의 오랜 연대를 바탕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중국과의 연결고리도 필수라는 뜻이다. 국내 재계 관계자는 “어차피 미중 신경전은 경제를 수단으로 한 치열한 국제외교의 전쟁터”라면서 “외교와 경제에 대한 투트랙 전략이 필요하며, 이 과정에서 정부가 경제적 관점의 선봉에 설 기업들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드넓은 망망대해에서 치열한 고래싸움에 고통 받는 새우의 유일한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