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믹리뷰=최진홍 기자] 글로벌 반도체 전쟁이 소위 국가 대항전으로 변하고 있다. 시장의 플레이어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여전하지만, 각 국 정부의 정책이나 기조에 따라 업계의 분위기가 출렁이는 장면이 연이어 연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반도체 강국 한국'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우리도 보조금 줘"
미국 반도체 업계가 370억달러(약 45조원)에 이르는 정부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미국 반도체 업계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정부의 지원을 끌어내기 위한 로비에 나서고 있으며, 구체적인 자금 활용 방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보도했다.

370억달러 중 50억달러는 공장 지원에, 150억달러는 각 주의 반도체 공장 유치에 따른 인센티브에, 나머지 170억달러는 연방정부 차원의 연구개발 비용으로 쓰여야 한다는 구체적인 로드맵이다.

미국 반도체 업계의 주장은 그 자체로 이례적인 일로 평가되지만, 업계에서는 '예견된 일'이라는 반응도 나온다.

미국 반도체 업계가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정부의 전격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시도하며 다양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27일(현지시간) WSJ에 따르면 중국은 국영 담배회사 및 개발은행이 참여한 반도체 펀드 출범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은 2014년 1차 펀드를 조성했을 당시 메모리 반도체 자급률을 크게 올린다는 방침을 정한 바 있다. 4% 내외에서 움직이는 자국의 메모리 반도체 자급률을 2020년 40%, 2025년 70%로 올리는 것이 골자다. 

그 연장선에서 반도체 군자금을 모으기 위한 정부의 결단이 내려진 셈이다. 시진핑 주석은 2025년까지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 70% 달성을 목표로 제시했다. 중국의 올해 팹 생산 능력은 글로벌 기준 16%를 넘기는 수준이지만 2020년이면 20%를 넘을 것으로 보인다.

성과도 나오고 있다. 중국 창신메모리(CXMT)가 연내 17나노 D램을 양산할 계획을 발표한 가운데 낸드플래시 분야도 심상치않다. 지난 4월 양쯔메모리(YMTC)는 128단 QCL 3D 낸드플래시 생산을 성공한 데 이어, 샘플 테스트까지 통과했다. 128단 QCL 3D 낸드플래시 칩 X2-6070을 SSD 플랫폼에서 샘플 테스트를 통과했으며 YMTC는 2021년부터 기업용 SSD, eMMC/UFS 솔루션 및 기타 제품에 적용한다는 각오다.

미국 반도체 업계가 자국 정부의 정책에 큰 타격을 받고 있다는 '불만'도 감지된다.

현재 미국 정부는 중국 화웨이에 대한 제재를 연장하는 한편 TSMC의 미국 공장 건설을 끌어내며 중국 반도체 인프라를 정조준한 상태다. 이런 가운데 화웨이와 거래를 할 수 없는 미국 반도체 업계는 여러번 자국 정부에 화웨이와의 거래를 재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바 있다. 미국 정부의 화웨이에 대한 제재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미국 반도체 업계도 화웨이와의 거래가 차단될 경우 그 피해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최근 발간한 '중국과의 무역 제한이 반도체 시장에서 미국 리더십을 어떻게 종식시키는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5월 미국이 화웨이에 대한 제재 조치를 취한 이후 미국의 25개 상위 반도체 회사는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BCG에 따르면 이들은 매분기 각각 4%에서 9% 사이의 평균 매출이 감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BCG는 미국이 수출 제한 기업 명단을 유지해 중국 기업과 미국 기업의 거래를 제한한다면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향후 3년에서 5년내 8% 포인트의 시장점유율 하락과 16%의 매출 감소를 겪게 될 것으로 분석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 반도체 업계가 자국 정부의 방침으로 중국과의 거래가 차단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정부의 지원금을 끌어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물론 미국 반도체 업계의 제안이 전격적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낮다. 그 효과에 대해서도 회의론이 감지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 반도체 업계가 이례적으로 정부 지원금을 요청한 배경에는,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전쟁이 이른바 국가 대항전으로 비화되는 지금의 현실을 반영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산업의 쌀, 정부 차원의 격돌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 통과를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폭발하는 가운데 미국은 홍콩에 대한 특별지위 박탈은 물론 1차 무역합의 파기 가능성까지 시사하고 있다. 강대강 대치다.

전초전은 반도체 시장이다. 중국 정부가 강력한 투자를 통해 자국 반도체 인프라를 키우는 상황에서 미국은 그 예봉을 꺾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다. 화웨이에 대한 제재와 TSMC의 미국 공장 건설이 대표적이다. 그 연장선에서 미국은 코로나19를 기점으로 아시아 반도체 인프라 의존를 줄이려는 큰 그림까지 그리고 있다.

결국 전쟁은 국가 대항전으로 흘러가고 있다. 2016년 칭화유니의 미국 샌디스크 인수 불발, 2017년 중화권 국가에 기반을 둔 브로드컴의 미국 기업 퀄컴 인수 무산 등 굵직굵직한 반도체 업계의 인수합병 시도가 각 국가의 정책에 무산된 상태에서 특히 미국과 중국은 자국의 정치적 필요와 안보 프레임을 입맛대로 들이대며 반도체 대리전을 치르는 셈이다.

반도체가 산업의 쌀로 불리는 핵심 인프라이자, 각 국의 안보와 큰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래 글로벌 패권은 결국 ICT 전자 패권에 달렸고, 그 결정적인 방향성을 반도체가 쥐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과 중국은 정부 차원의 대결을 피하지 않고 있다.

▲ 평택 캠퍼스. 출처=삼성

한국 정부도 결단 내려야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서 국가 대항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메모리 반도체 강국 한국의 정부도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민간 차원의 인프라 확보는 이미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삼성전자가 대표적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달 18일 진교영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 사장, 박학규 DS부문 경영지원실장 사장, 황득규 중국삼성 사장 등과 함께 중국 산시성에 위치한 시안반도체 사업장을 찾았다. 직후 증설 인력 300명을 추가로 파견하며 현지 생산 거점 강화에 나서는 한편 평택 EUV 라인 구축을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월 2030년까지 133조원의 투자를 단행, 시스템 반도체 산업의 최강자를 노린다는 계획인 삼성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다. 그 연장선에서 이번 평택 EUV 라인은 올해 초 V1 라인 가동에 이은 또 하나의 삼성 반도체 비전 2030 액션플랜이자 파운드리에 대한 속도전으로 풀이된다.

1일에는 평택캠퍼스 2라인에 8조원을 투입, 낸드플래시 생산라인을 구축하는 투자를 단행한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5월 평택 2라인에 낸드플래시 생산을 위한 클린룸 공사에 착수했으며, 2021년 하반기 양산을 시작할 계획이다. AI, IoT 등 4차 산업혁명 도래와 5G 보급에 따른 중장기 낸드수요 확대에 대응하는 한편 코로나19로 트렌드가 된 비대면 시대를 맞아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는 것으로 보인다.

▲ 평택 캠퍼스. 출처=삼성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전략마케팅실 최철 부사장은 "이번 투자는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도 메모리 초격차를 더욱 확대하기 위한 노력"이라며 "최고의 제품으로 고객 수요에 차질없이 대응함으로써 국가경제와 글로벌 IT산업 성장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다음 액션플랜이다. 삼성전자와 같은 민간 기업들은 현재의 불확실성속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총 동원해 공격적인 투자에 나서고 있으나, 이미 국가가 전면에 나선 미국 및 중국과의 전투에서는 초반 기선제압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의 과도한 개입은 지양해야 하지만, 정부도 민간의 반도체 투자에 보폭을 맞추며 글로벌 시장에서 벌어지는 국가 대항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물론 정부도 반도체 인프라 사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하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했을 당시 다양한 육성안을 발표하며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지나친 외교적 관점에 갇혀 그 이상의 액션플랜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산업의 쌀이자 국가 안보에도 영향을 미치는 반도체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정부의 파격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온다.